꿈에 관해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대개 둘로 나뉜다. 자신이 그걸 할 수 있다고 믿거나, 재능이 없다고 말하며 이를 회피해버리거나. 어쩌면 꿈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가령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개인이 무언가를 꿈꾸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성취와 탈락, 풍파 등을 말한다. 두 영화는 인물이 (비교적)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면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택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서사를 따라가며 이들을 지켜보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꿈세계가 무너짐에도 나름의 위안을 받는다. 어떤 점에서, 결말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를 멋지게 끝내는 법이다. 끝이 다가온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하기보다는 이를 줄곧 지켜보아 주었음에 감사하는 것. 오시이 마모루의 <뷰티풀 드리머>는 반복되는 여름날에 의문을 품고서 이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엔 남자와 여자 캐릭터가 한 세계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이를 세카이계라 불렀다. 중요한 건 주인공 사내가 자신을 기망한 꿈 요정을 비난하거나 힐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영화는 담고 있는 내용물보다 이를 보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영화는 이 세계가 반복될 뿐이고 그래서 미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두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세계]라는 말은 이들의 운명이 어떠한 결말로서 수행되는 일에 반대한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엔딩크레딧은 그저 눈을 가리는 일일 뿐 한 세계가 결말을 마주하는 건 아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핀다면, 영화가 저무는 때는 하나의 삶이 이야기로 탄생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이의 꿈을 바라봐주는 일은 그 이야기가 황혼의 벽에 가로막혀만 비로소 세계로 드러남을 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를 속이는 거짓말은 미래를 속인다.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은 운명을 예견하면서도 이를 피하지 못한다. 영화를 찍는 사람에게 유년기는 어른이 된 자신을 위해 소환되는 과거의 한 회상물이다. 그건 마치 유령이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류는 아니다. 한때 자신에 속했던 그 무언가를 다시 돌아보는 작업은 영화가 지닌 유령성이 단순히 으스스함과 기이함으로만 파악되는 일을 회피한다. 하지만 자기를 속이게 되면 한 세계가 말하는 운명도 거짓을 말하기에 때문에 바라는 미래를 관찰할 수 있다. 사실은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은 그런 점에서 필요하다. 한 세계를 상대하는 일은, 우리를 그를 상대하기에만 벌려지는 거리에 대해 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거리는 무언가를 응시하기 위해 필요한 간극이기도 하지만 꿈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를 체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이 얼마나 아픈지를 우리는 느끼지 않으려 노력한다. 영화는 자신이 부닥친 현실에 아파하거나 초라해 보이게 만든다. 그 점에서 영화를 말하는 일은 단순히 비평이라는 신분을 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화는 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한 세계를 등지는 일이 아니게끔 해준다. 살다 보면 이 세상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처연하게 느껴져서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가만히만 있어도 상대화되어 자신의 처우를 깎아내리는 이 세계는 끝내 생존했다는 사실로도 기뻐할 수 있는 정도의 소소함으로 축약된다. 그래서 이 세계가 마치 무통주사처럼 가느다란 시야를 몸에 들이댈 때, 우리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우리의 고통받는 신체를 대변한다. 아무도 우리를 위해 울어주지 않지만, 우리는 함께 앞으로 가고자 서로에 슬픔을 공유한다.
우리를 가로막는 이 벽이 도리어 자기를 말하고, 슬픔을 연기하는 무대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결국, 처음 영화를 꿈꾸었던 순간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그 영화를 벌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보려면 결국 영화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점은 단지 아이맥스 상영관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꿈을 꾸려면 도리어 그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아먄 한다. 그러니까, 꿈을 꾸는 일이 남루하고 누추한 것도 그 세계가 도리어 삶의 종착지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는 버츄얼 세계의 일화를 인용해보려 한다. 버츄얼 스트리머는 가상의 아바타를 통해 넷상에 자기를 드러내고 연기한다. 이때 안의 사람이 모종의 사유로 활동을 중단하게 되면, 아바타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항구적인 인격권으로서 해당 안의 사람에 귀속되어 추후 어떤 형태로든 재사용이나 가공을 하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안의 사람에 관한 디자인이나 활용 권리가 아바타의 제작을 서포트한 기업체에 귀속됨으로써 신체에 대한 권리를 잃는 것. 이미 안의 사람이 자리를 떠났다는 점에서 이 육신엔 영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바타를 재사용하며 안의 연기자를 바꾸는 일에 대한 팬들의 반발은 키즈나 아이와 같은 사례에서 이미 잘 드러난 바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버츄얼이라는 단어가 한 현실과 꿈 사이의 결합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반대로 그 분자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거리를 요구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팬들이 해당 버츄얼에 보냈던 애정과 관심은 이 세계에 종언을 내리지 않는다. 언어는 오직 말해지는 것, 이 꿈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한 세계에 자신을 덮어씌우는 힘은 운명에 자기를 필중하는 효과가 있다. 그 미래가 엇나가지 않도록 줄곧 지켜보아 주는 것은 운명을 응시함으로써 이를 도래할 미래로 확정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