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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7. 2023

안의 사람 되기: 부여잡기로의 버츄얼 방송


나는 모든 인간이 해체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줄이라는 표현을 떠올린다면 이를 이해하기란 쉽다. 사람들은 자기가 항상 합리적이고 명징하게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삶은 위태롭기 마련이라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출 때 쉬이 흐트러지곤 한다. 피로감을 느끼거나 정신이 분산될 때 우리는 자기가 사라진다고 느끼며, ‘자기’란 의식하지 않으면 금세 사라지고야 마는 허상과도 같다. ‘자기를 대하는 문제’가 항상 껴안기나 부여잡음의 형태로 나타나는 건 그 때문일 테다. ‘나’란 존재는 자신을 규정하는 약간의 단서에 의해서만 응집될 뿐인, 가녀린 물방울과도 같다. 우리는 의식의 바다에 태어나 자기를 대하는 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가녀린 영혼일 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기를 껴안는 일에 항상 많은 자원을 투자하기에 ‘나’란 존재는 항상 스트레스에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 ‘나답게’ 사는 일이 뭔지, 또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런 고민을 한들 정답이 나오진 않지만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삶의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버츄얼 방송의 유행은 그런 면에서 고찰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버츄얼 유튜버, 버츄얼 방송에서 버츄얼에 관한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은 꽤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하다. 이를 위해 거시적인 흐름을 따라가기보단 가장 최근에서 동향을 살펴보고 싶다. 최근 인터넷 방송에서 버츄얼 아바타는 속칭 ‘판떼기’로 불린다. 이는 방송인의 외양을 드러내는 ‘나’가 화면에 있는 것과 없는 경우에 방송 주목도가 천지차이기 때문이다. 일단 시청자로서는 화면에 화자가 보이지 않으면 전달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고, 이는 해당 방송인에게 흥미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기본적으로 1인 방송이란 방송인의 매력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이를 간과하기란 어려운 일인 것이다. 화면 상에 드러나는 화자가 없다면 이는 화면 위에 출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실질상의 나레이션에만 불과해지고야 만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시청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고 여겨지기보단 그런 영상들의 위에 존재하며 화면을 타고 흐른다는 점에서 시청자와의 공감을 끌어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버츄얼 방송에서 방송인의 존재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다. ‘안의 사람’에 대해 탐구하는 일은 불문율에 부쳐지며 방송을 해치는 행위, 더 나아가면 이들 간에 있는 놀이 문화를 해치는 일이 된다. 혹자는 ‘안의 사람’과 연기자를 분리해 바라보기도 하지만, 안의 사람이 캐릭터를 조작하는 사람이라면 연기자는 역할을 부여받아 연극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컨셉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한때 [무한도전]에서 불거졌던 오인과 마찬가지로 방송상의 컨셉이 평소의 삶과 겹쳐지는 일을 종용한다. 하지만 안의 사람과 연기자는 역할극의 무대 위에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안의 사람이 버츄얼 아바타를 통해 지시되는 지표의 일종이라면, ‘연기자’란 아바타와 지표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 또는 그런 자아의 응집력이다. 그러니 버츄얼 방송인은 실질적으로 무대 위의 희극인, 카메라 앞의 방송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간에는 영역을 설계하여 적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여기에 장악력을 발휘한다는 점 또한 같다. 요컨대 이들 ‘연기자’란 자기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바타와 지표를 끌어안는다. 


‘끌어안는다’라는 표현에 중점을 두고 싶다. 만약 인간의 기본 상태가 해체라면 그러한 끌어안음은 헐거움에서 이탈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의 기본 상태가 느슨함이라면, 끌어안음은 현실과 거울 간에 행동을 잇는 거울뉴런과도 같은 역할일 테다. 말하자면 자아는 쉽사리 망가지거나 찢어질 수 있는 위기에 놓여있으며 이는 항구적이어서 인간의 존재 근원은 고독과 위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버츄얼 방송의 진미가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고서 서로를 자기 대하듯 하는 것, ‘껴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버츄얼 방송에서 사용하는 아바타는 우리가 페르소나라고 말해왔던 일상 심리학과 별반 다르지 않거나 그 연장선에 있다. 장소에 따라 역할을 다르게 적용한다는 이 가면극의 비유는, 어떤 점에서 인간은 모두 속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일에 사용되기도 하는 듯하다. 하지만 버츄얼 방송에서 이 가면극은 ‘자기’를 부여잡기 위해 노력하는 껴안음의 과정이 적용됨에 따라 핍진함과 부단함, 성찰과 토로의 장이 되고야 만다. 버츄얼함은 안의 사람과 아바타 사이에 작용하는 공허를 가리키는 게 된다.


이 대목에서는 잠시 매체론의 관점으로 넘어가 보자. 버츄얼 방송의 유행은 노캠(No camera) 방송과 관련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캠 방송이 지양되는 이유가 이를 마치 나레이션처럼 느끼게 해서였다면 이 경우 ‘캠’은 존재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해 이는 분해에서 구축을 택하는 일, ‘자아’를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시청자로 하여금 껴안을 무언가를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화면 위에 아무런 존재도 드러나지 않을 때 시청자는 방송에 들어갈 만한 손잡이를 제공받지 못한다. 그래서 버츄얼 방송인은 방송에의 유입을 유도하고자 판떼기를 세운다. 시청자는 방송인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부여잡고, 껴안음에 따라 서로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신기한 점은 이러한 껴안음의 과정은 서로에게서 자기를 발견함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버츄얼 방송인에 대한 매료는 외양으로 드러나는 판떼기가 아니라 안의 사람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안의 사람은 연기자와 판떼기를 잇는 존재로서 껴안기의 형상화와도 같다. 즉, 안의 사람은 ‘되고 싶은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빌리자면 노캠 방송은 프레임 밖에서 목소리가 흘러들어옴에 따라 화면 전체가 일종의 바깥으로 여겨지는 상태다. 기본적으로 이는 감독의 자아가 세계로 확장되는 일을 뜻하며, 감독의 자아 안에서 카메라가 포착하는 곳이 바로 버츄얼 방송에서의 판떼기 역할을 한다. 즉, 판떼기란 초점이다. 감독의 자아 안에서 카메라가 어떠한 의식적인 되기의 과정을 수행한다면 마찬가지로 ‘안의 사람’이란 우리가 영화 안에서 발견하는 화자의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안의 사람은 연기자가 컨셉에 맞춰 행동하는 되기의 결과이면서, 연기자 개인의 자아가 자신을 발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연기자가 부여잡은 이것은, 판떼기를 통해 화면에 송출되며 시청자는 이를 고리 삼는다. 시청자는 판떼기에서 안의 사람을 의식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한편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의 연결점을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서로를 ‘껴안는다.’ 시청자는 화면 뒤의 존재를 상상하기보다 세계의 공허함을 붙잡는 능력에 더 매료된다. 한 장소에서 두 존재가 만날 때 세계는 비로소 충만해진다.


인간이 해체되어 가는 중에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존재는 공허하다. 전체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상하리만치 비어있는 게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서로에게 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공허함이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보는 이 가정에서 흥미로운 건 안의 사람 자체가 연기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연기’란 자기가 아닌 것에 들러붙으려는 성질이라서 연기자와 안의 사람 간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연기자가 현실의 한복판에서 분해의 과정에 있는 존재라면, 안의 사람은 그런 연기자가 네트워크의 실재에 잠수하기 위한 잠수복과도 같다. 익명성과 평탄성으로 무장한 네트워크 세계는 자칫하면 녹아들고야 마는 것이라서 그곳에 분해되지 않도록 하는 방호구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부여잡는다는 건 카메라에서 포착의 기능과 같다. 프레이밍은 대상을 특정한 사고와 관점에 종속시키지만 바꾸어 말하면 의식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레이밍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부여잡으려는 시도이자,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버츄얼 방송을 위해 요구되는 인프라, 일러스트레이션, 트래킹 프로그램, 아바타 메이킹 등의 문턱이 낮아짐에 따라 버츄얼은 그 투자의 간소화만큼이나 ‘철저함’을 요구하지는 않게 됐다. 초창기의 몇몇 귀족스포츠나 문화가 엄숙한 예절과 복장을 요구했지만, 대중화됨에 따라 장비나 복장, 예절 등에서 간소화를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츄얼은 일반명사화됐다. 또한 초창기의 버츄얼 ‘유튜버’ 식의 녹화에서는 연기자로 볼 수 있을 ‘안의 사람’이 역할극의 성격이나 주제에 대해 숙지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실시간 방송이 주가 되는 버츄얼 방송에선 그런 철저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도 했다. 이때 그들은 생각했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기보단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선택하자고, 세계=나를 ‘부여잡자’고 말이다. 이 맥락에서 판떼기가 버츄얼 방송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버츄얼 방송의 초창기에 ‘버츄얼’이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를 의미했고, 이는 마치 이세계와도 같았다. 버츄얼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현실을 이어주는 환상과도 같았고 이는 일종의 완충지대였다. 


어떤 면에서 버츄얼 방송인과 시청자의 관계는 서로의 환상을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이름만 바꾼 식으로 언급되는 현실 세계의 관계는 우리가 현실에 품은 환상을 지켜주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이른바 취향이라고 하는 부여잡기의 능력이 사용되어, ‘나’를 좋아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최애가 자기에게서 발견될 때 이는 탐색과 방향잡기의 행위가 된다. 시청자가 방송인에 매료되어 그를 최애로 느낄 때, 그는 무너지는 세계 안에서 자신을 되찾는다. 이들에게서 자기를 의식하는 일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에서 자신일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른바 버츄얼 방송의 초창기에 있었던 연기하는 히로인은 이제 문밖에 나서기를 망설이는, 소심한 인간들의 창구가 되어주고 있다. 분명 버츄얼 유튜버의 시대에서 안의 사람은 모에의 동력원 정도로만 취급됐지만, 버츄얼 방송인의 시대에 안의 사람은 잠시라도 자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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