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26. 2023

거창하지 않은 자기를 침묵하기

한국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장애, 혹은 미숙한 사람을 두고서 ‘찐따’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이 말의 어원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찐따’라는 말의 속내인 ‘커뮤증’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일반적으로 찐따라는 말이 대인관계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숙한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았을 때. “’찐따남’이 좋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기본적으로는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어리숙한 구석이 있어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찐따남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렸고, ‘어리숙함’이라는 요인만을 모에로 가져온 결과물이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 반대로 보면 자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정도의 어리숙함.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손을 잡아주는 정도의 애호심리가 여기에 자리한다. 


찐따라는 말의 본질이 커뮤증에 있는 만큼, 우리는 그런 어리숙함이 자기폐쇄적이면서 내향적인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찐따’는 사회적으로 소통이 잘 되고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개인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의지 혹은 실현 여부를 따른다. 이른바 커뮤증은 해야 할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미완의 상태로써, ‘커뮤증’이란 마음을 닫아버린 이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증상이다. 언어로 구성되지 못한 것들이 내면에 남아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의 ‘화병’과 같은 맥락에서, 커뮤증은 주체가 ‘나’를 대하여 구성하는 문제에서 이를 외면할 때 벌어지는 ‘증상’인 듯 보인다. 커뮤증은 언어화의 실패이며 여기서 ‘언어’란 자신을 코드화하여 하나의 기호로써 산출해내는 일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커뮤증이란 ‘자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보아도 좋다. 


언어로서의 커뮤증은 사회와 만날 ‘나’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사회화의 실패를 겪는다. 자신을 세계에서 붙들지 못한 채 부유하는 상태가 바로 커뮤증인 셈이다. ‘모에’ 요소로의 커뮤증은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화의 상태, 혹은 그런 가능성에 매력요인이 있다. 아직 ‘나’가 없는 상태의 그/녀에게 자신을 첨가하는 일이야말로 커뮤증의 모에요소다. 손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집착증의 형식이 ‘상대방을 바꾸려는 형태’가 아닌 ‘이미 결핍되어 있어 자신이 채워넣기만 하는 형식’의 간편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을 바꾼다”라는 통제행위에서 더 나아가 “상대방을 구제한다”라는 심층심리에 귀인한다. 전자의 경우가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거나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라면, 후자는 고양이에 밥을 주는 정도의 관심만을 요한다. 


요는 이러한 관심에 부가되는 판단이 아니라 “그저 도움을 주기만 하면 될 뿐인” 일에 관한다. 유니셰프 등을 통한 기부가 상황이나 도덕에 관한 판단을 제하고서 만족감이나 성취감만을 후원자에게 전달하듯, 커뮤증은 그러한 의미에서 성애적이다. 언어화의 이전에 있는 존재는 우리가 그를 소명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커뮤증에서 ‘나’를 발견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심리치료의 일선이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커뮤증의 당사자다. ‘결핍된 것’으로써의 행위 주체는 어떤 방향으로 우리 곁에 등장해왔을까?  이를 위해 커뮤증이 실현된 2000년대 전후를 방문해보려 한다. 에반게리온의 신지와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2000)에서 실어증에 걸린 아이들 말이다. 


그/녀를 세계에 설명하는 단 하나의 요인이 자신이라면, 그보다 더 기쁠 일은 없으리라. 그/녀를 만나 개인의 세계가 구원받는 서사는 큰 틀에서 볼 때 [세계]를 장르화하는 일과 연관있다. 세카이계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코드가 상실되어버린 ‘자기’를 세계의 무대로 확장한 것과 연결된다.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가 자신의 크기만큼 축소되어버린 이 상황은 ‘자기’의 크기를 세계만큼 확대하는 효과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세계의 통로를 자기에만 한정함으로써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사이를 일치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를 구한다는 말이 무언가 거창하게만 들린다면, 서로를 껴안는 일은 무엇보다 가볍고 일상적이어서 실천되기에 쉽다. 여기서 커뮤증은 일치를 위해 예비된 침묵을 담당한다. 세계는 침묵을 통해 바깥을 소거하고 몸집을 세계에 맞춘다. 


김예솔비는 씨네21에 기고한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에서 실어증을 ‘무언증’과 ‘지연된 애도’로 분리하면서 언어화의 문제를 다룬다. 이 글에서 그는 2010년대에서 20년대를 다루지만, 관점은 시대를 아우른다. 가령 지연된 애도가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지 않았는가 하는 마음가짐이다. 애도를 마칠 준비가 되었기에 이제 방문한다는 수식언은 어떤 면에서 ‘편지가 도달할 일 없다’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들 애도에서 회복은 언어 이전의 문제, 언어화되지 않는 것들끼리의 소통이자 끌어안음이다. 말로 표현해도 전달되지 않는 게 있고, 말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전달되는 것도 있다. 아오야마의 <유레카>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에서 담론적 발화의 창구와 자기 위치 바로잡기에 실패한 이들은 자신이 마주할 세계에 관해 말하지 못한다. 


이러한 ‘2000년대 콤플렉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옴 진리교 사건 이후 사회상을 다뤘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의 주된 모티브는 ‘심리테라피’다. 트라우마적 사건 이후 일본 사회는 범사회적인 심리치료가 요구되었으며 이에 심리상담은 사회의 흔한 풍경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침묵’은 요구되는 것이기보다 아직 애도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를 잘 몰랐고, 치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침묵의 현장이 실어증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하지 않은 것’으로의 20년대에 커뮤증은 거진 트라우마의 연장선에 있다. 커뮤증은 ‘미완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치유의 불가능성을 말하던 실어증과 닮았고, 회복을 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후 사그라지던 심리테라피는 2011년의 3.11을 거쳐 다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치유의 속성은 완결이 아니라 지속에 있음을 배웠다.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은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애도에 품은 감정과 예비적인 감정, 즉 ‘갚아준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끔 한다. 이는 재난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언제라도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렇기에 이들은 언제라도 서로를 껴안아줄 수 있다. 이들에게서 삶은 모든 지점에서 자기가 될 가능성을 품는다. 결국 자신을 대하는 문제에서 중요한 건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자신인지를 알 수 없게끔 살아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미완의 과정들을 겹칠 때야 비로소 구원이 자리할 뿐이기에, 삶이 분절되지 않을 때는 마찬가지로 중단의 지점 또한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크기를 곧 자기에 맞추면 이 부분은 말끔히 해결된다. 살아있는 것이 곧 지속이 되는 상황에서는 ‘나’가 되는 게 곧 세계의 존속을 꾀하는 방법이 된다. 즉, 언어화의 실패는 언어의 부재를 암시할 뿐 존재의 불가능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가령 알랭 바디우가 말하듯, “주체의 존재는 존재의 증상이 된다.” 언어화의 실패는 되기의 종결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패’이며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되기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디우의 말대로 트라우마의 상황에서 ‘생존’의 무대로 내쳐진 주체는 ‘생존’의 감정에 의해 삶이 분절되지 않는 경험을 하기에 오히려 삶을 체감한다. 이들은 삶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서, 그저 세상에 의해 살게 될 뿐이라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언어화는 항상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증상으로 발현되고야 마는 것이다. 


회복이 불가하다고 말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부정적인 태도처럼 보인다. 트라우마적 세계는 주체가 성장하는 것에 반해 세계는 더는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세계에 관한 내외적 일치는 주체가 그만큼 빠르게 성장해서가 아니라 세계가 멈춰버렸기에 가능한 처사라는 것이다. 소비할 수 있는 언어가 고갈되어버렸으니 이제 주체는 자신을 설명할 수단을 얻지 못한다. 이른바 끝나지 않는 언어화의 과정은 <유레카>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발견된다. 한 사건에 있던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껴안을 때, 여기에는 이들이 같은 세계를 산다는 게 중점이 된다. 이들의 순간은 사건 이후로 멈춰버려서 사건이 벌어진 곳이 아니라면 갈 곳도 없고,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무어라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아 ‘나’가 되기를 택한다. 이 세계의 하나됨이 곧 살아감의 이유가 된다. 


여기서 세계는 오히려 침묵과 소거에서 충만함을 얻는다. 상처를 특정 지점 삼아 움직이는 이 일에서는 되려 상처에만 집중해야 한다. 무엇이든 자기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소거법을 통해 자신의 본류를 찾는 것이 중요해진다. 지금의 자신에게서 상처가 없음을 말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지금의 상처에서는 자신이 있음을 말할 권리다. 말하자면 언어는, 주체가 떠나온 곳이지 나아갈 곳은 될 수 없다. 자기가 떠나온 곳이 곧 세계 전체가 되는 상황에서는 상처가 아니라면 주체는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다. 즉 언어화라는 건 혈흔적 응고의 관계에 결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커뮤증의 기원은 피폐이기보다 회복의 씨앗을 내포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따져 묻는 일은 우리가 커뮤증을 통해 상대방에게 접속하려는 마음, 어디를 공략해야 그에 다가설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과도 같다. 


<스파이의 아내>나 <산책하는 침략자>,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 같은 부류도 떠오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나 <목소리의 형태> 같은 부류보다 <코미…>나 <봇치…> 같은 부류를 떠올릴 사람이 더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만화는 분명 일상물의 연장선에서 ‘별 시답지 않은 일’이 계속되는 세상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이는 커뮤증을 겪는 주인공에게서 특정한 부류의 인물군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개인의 삶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야기란 것은 결국 삶의 흐름을 언어화하는 과정, 세계 안에 나열해 배치하고 이를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커뮤니케이션 장애로서의 침묵을 모에화하는 일은 세계에 대한 거창함보다 그다지 거창하지 않은 자기에 더 잘 적용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립계의 일원과 인서트 쇼트의 위생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