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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8. 2023

고립계의 일원과 인서트 쇼트의 위생학

“대다수 기계는 존속하는 동안 영구적인 해체 상태에 처해있다.”(p.261) “존재지도학적 맥락 안에서 중력은, 어떤 특정 기표가 인간의 삶을 조직할 방식 (…) 등과 같이 다양한 기계적 매개 작용을 가리킨다.”(p.289)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가 지적한 대로, 상호작용이 상호작용하는 항들의 바깥에 있다는 점이다. 기계들은 상호작용하게 되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런 상호작용과 결별할 수 있는 역능도 품고 있다.”(p.277) “그러므로 존재지도학적 의미에서 중력은 한 기계의 구조적 개방성과 움직임, 되기가 다른 한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방식을 가리킨다.”(p.297) -레비 브라이언트[1]-


근래에는 글을 쓸 기회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쓰지 않을 글을 써서 좋았다. 이렇게 글을 쓰며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그런 말이 떠오른다. 예술가와 아티스트의 차이는 지속가능성에 있다고. 예술가는 다음에 들어올 청탁을 염두에 두며 창작하지만, 아티스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즉 예술가는 나가는 일에 들어오는 일을 내포하지만, 아티스트는 자신을 소진하거나 발산하는 느낌에 더 가깝다. 속되게 표현하면 아티스트는 “아니면 죽지 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구분이 예술인들의 속성에 관해 세부적이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다만 적어도 확실한 건, 직업인으로서의 내 의식은 후자라는 점이다. 평론가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미칠 다음 여파를 생각하지만, 예술가는 세계가 부질없다고 여기며 그로 인해 세계에 자신을 남기는 일을 더 중요시한다.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은 세계에서는 잠시라도 타오르는 것, 자신을 발산하는 일이 더 희망적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글쓰기는 즉흥적이거나 발산적이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진 않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것은 세계를 위해 행동하기보단 세계 아래에 투신하면서 삶의 구멍난 부분을 메우는 느낌이다. 존재의 바다로 잠수하며 재앙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상이 완전히 떨어져나가길 기다리면서. 


블로그에 쓰는 글은 바다 한복판에서 낚시하는 느낌이라 주제나 구성 면에서 자유롭지만, 어딘지 모르게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반면 어떤 주제를 요구받아 그에 관해 쓸 때는, 마치 마라톤처럼 호흡은 느리더라도 목적지는 일정하므로 자기페이스에 맞게 달릴 수 있어서 좋다. 자유로이 쓰는 글이 하나를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한다면,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글은 지켜야 할 것과 지키고 싶은 것들에 관해 움직이기에 책임감이 깊다. 물론, 여기서도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많은 경우 나는 이미 세상이 끝나버린 듯이 행동한다. 세상에 있는 많은 부박함과 비천함을 생각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그것들과 거리를 두려는 위생적인 시도에 실패하고야 만다. 그래서 유운성이 문학과 위생을 주제로 <드라이브 카>에 대해 쓴 글을 다시 읽었다. 이 글을 다시 찾게 된 건 <드라이브>가 말하던 「바냐 아저씨」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에 가후쿠가 바라보는 무대에는 쏘냐가 바냐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각자의 삶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문장이 ‘길다’로 보인다. 낮이나 밤 같은 단어에 메타포를 연상하기보다, 그저 삶은, 어떤 경우에도 길고 길어서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현실에 도망쳐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삶의 지배적인 현실은 글을 통해 바깥에 도달할 수 있고 또 시간에 빗겨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나에게 글쓰기란,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과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볼을 꼬집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현실에 빗겨서고자 자신에 상처입히는 부류가 있다. 나는 그저 현실에 거리를 두며 그런 삶의 현실적인 문제가 내 속에 들어오지 않게끔 밀쳐내고만 있다. 세계의 문제들에 결벽증을 느끼면서, 이들이 자기 몸의 일부가 되지 않도록 몸에 청결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말을 이어가자면 유운성에게 위생은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도 보는 이의 삶에 어울리게 하는 것’, 즉 정동의 보편화를 뜻한다. 온갖 더러운 것을 멸한다는 퇴마의 개념이 아니라 로컬 의식의 확대, 세계화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지역성을 뜻한다. 이는 일본 영화의 일본적인 것으로 표출된 히로시마가 일본적인 맥락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일을 가리키지만, 그보다는 <스파이의 아내> 같은 쪽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말하자면 나는 취향이 다원화하고 서로에 대해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말을 섞지 않게 되어버린 이 풍토가 다소 위생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유운성의 영화론과는 달리, 우리네 삶에서 “배경에 대해 이해할 마음 없이 타인의 삶에 어울리는 태도”로 작동한다. 


자신의 현실에 들어오는 타인의 삶을 깨끗이 세탁해 자신의 삶에 어울리게 하는 일을 이해라고 볼 수 있을까? <드라이브>는 남녀의 겹치는 몸으로 시작해 남녀의 겹치는 몸으로 끝나는 영화다. 이 두 장면 간에는 대조되는 몇몇 특징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삽입이 없다는 점이다. 유운성은 <드라이브>의 인서트 쇼트에 관해 말하며 그 인서트 쇼트는 외부 현실에서 침투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마구치는 이를 위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현실에서 탈각해 신화적으로 포장해버린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침투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 거리를 두는 일이 어느 순간 존중과 이해로 탈바꿈하는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드라이브>의 껴안음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아내’에 대한 거리두기의 감각에서 그 삽입의 맥락을 출발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보인다.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는 장면은 영화 내에서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인서트 쇼트에 대한 감정을 전한다. 이 인서트 쇼트는 머리로는 이해를 바라지만, 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게 다가오는 일을 묘사한다. 즉, 이 인서트 쇼트는 ‘바깥’과 ‘이후’의 개념을 언어화되지 않는 맥락에서 질문하고, 또 도전한다. 영화에서 몸을 겹치는 남녀들에 관해, 체액이 오가지 않는 ‘위생적인’ 관계란 가후쿠와 미사키의 껴안음, 이들 세계엔 ‘바깥’과 ‘이후’가 없어서 더럽혀진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질문의 관계이다.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인서트 쇼트는 삽입을 위생적이지 않은 불결한 행위로 간주한다. 인서트 쇼트가 역사의 맥락에서 탈각화해 신화적인 소탕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는 입장에서 이러한 삽입은 머리를 합리화한다. 쏘냐와 바냐의 대화처럼 이제 세계는 이해 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부단히 견디어내어야만 하는 세기의 창구가 된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세기의 감정들은, 첨탑이 열어놓은 탈출로를 따라 바깥 세계를 소탕하려 든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인서트 쇼트의 기능은 그 자신을 소독하면서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에 침투해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픈 몸에 주사를 놓기 위해 거쳐 가는 소독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좋아했던 상대라도 외도사실을 알고 나면 성교의 행위는 그저 더럽게만 느껴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위생적인 세계란 타인이 자신에게 침투하지 않는 세계이기 전에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세계, 관계를 맺지 않으면 상처에 관계될 일도 없다는 세계이다. 이 영화의 인서트 쇼트는 오히려 <드라이브>를 무엇과도 관계 맺지 않게 하고자 요구된 것이다. <드라이브>는 표면상에서 포스트 3.11의 감정을 안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에서 ‘바깥’과 ‘이후’의 감정을 풀어놓고자 그 모든 일에서 멀어지려 한다. 결국 이 영화가 위생적이라는 전언은 다음처럼 이해돼야만 한다. 이들이 겪는 세상은 그 누구보다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외로운 곳이라고. 


여기서 나는 끌어안음에 대해 생각한다. 상대방을 단지 위로할 목적으로 감정을 떠안는 일은 어떤 면에서 이해관계에 따른 성교행위처럼 보인다. 혹자는 감정 없이 몸만 섞으면 정을 통한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마찬가지로 <드라이브>의 인서트 쇼트가 역사에서 완전히 탈각했다면 이건 불륜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에 모두가 동의했다면 가후쿠가 상처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후쿠의 아내가 외도할 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서로 감정을 통했는지가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 관계의 바깥으로 벗어나버렸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문제되는 건 가후쿠가 이미 한번 뚫린 관계를 소통의 창구로 이용하기보다 침전로 나아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제 가후쿠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세계의 외부로 추방한다. 외부로 추방된 가후쿠에게 이해는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 적용되며, 이해받지 못할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 세계에서 위생적인 건 자신이며, 그렇기에 더러운 곳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는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는 장소가 설원인 것은 그런 이미지를 강화한다. 반대로도 질문해보고 싶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보다는 일차적인 관계가 없거나 혹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터넷에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마치 고민이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온전한 자신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세계의 바깥에 추방하는 일이다. 어쩌면 이 말이 인서트 쇼트의 위생학에 약간의 이해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인서트 쇼트가 만약 영화에 섞여들어 가지 않는 이례적인 무언가로 여겨진다면, 이는 그 자신이 영화에 편입됨으로써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왔다는 증거일 테니까. 인서트 쇼트가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일은 그게 본래 있어야 할 곳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립계에 있는지를 강조하기만 할 뿐이다. 즉, 인서트 쇼트는 삶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인서트 쇼트의 위생은 우리가 그걸 바깥으로 밀어내려 한다는 결벽증적인 심리를 강조한다. 우리는 이렇게나 더럽고 불결하고, 비애로우면서 비탄한데 그런 깨끗함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삶의 포로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살아가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을 통해서만 감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이 너무 순탄하게 풀릴 때 살아있지 못하다고 느끼며, 무언가 불안한 감정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데 너무 환경이 깨끗해서, 즉 위생적이어서 도저히 받아들 수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인서트 쇼트는 아무런 당위 없이 등장해옴으로써 미지에 대한 불이해를 종용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불이해가 우리 자신을 고립시켰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래서 이 인서트 쇼트는 그 무엇보다 우리를 더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1] 레비 브라이언트, 『존재의 지도』,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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