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06. 2023

숭고와 몰락, 얽힘의 분기점

만화에 진지함을 품는 건 어떤 면에서 과몰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만화들이 가져오는 레퍼런스에 관해서 만큼은 따져볼 만하다. 가령 <하루히>나 <청춘돼지>는 서브컬처가 양자역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과학을 인문학의 영역에 가져온다. 이들 미디어가 양자얽힘을 관계의 증표로 사용하는 일에서는 <너의 이름은> 같은 식의 붉은 실 설화가 참조되기도, 혹은 악인은 항상 처벌받는다는 고정의 서사가 응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 하등 관계없어 보이지만 존재가 서로 얽혀있고, 이들의 상태가 동전처럼 상시 붙어있다는 이 해석의 방식은 크게 위의 두 가지 방식으로 응용됐다. 서로 독립적이지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이 해석의 방식은 소위 말하는 ‘운명’과 ‘고정’의 틀로 전개되었다. 운명 같은 만남은 서로가 어디에 있든 간에 항상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감정의 논리를 펼친다. 혹은, 히어로와 빌런은 서로가 어떤 상태에 있든 간에 특정한 사건이나 숙명을 공유한다. 이들은 어느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한쪽은 자연스레 강해지지만, 이들에게서 선택지를 제거하는 것은 오직 ‘꺼짐’ 뿐이기에 서사의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전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미끄러짐이야말로 미디어가 양자역학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이는 기존에 있던 것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얽힘’은 항상 쌍(paring)을 이루어 전개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원리가 관측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얽힘은 관측의 상황을 1과 0으로 공유하는 상태이다. A가 1로 관측되면 상응하는 B가 0으로 고정되고 또한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점. 여기서 미끄러짐이 발생한다. 잘 짜인 이야기는 일단 시작되고 나면 작가조차 개입할 수 없게 된다고들 하는데 이는 정확하게 얽힘을 가리킨다. ‘얽힘’은 이미 상태가 결정된 상태에서 개인을 출발시킨다는 점에서 인물이 세계를 바꿀 가능성은 내적으로 제로에 수렴한다. 즉, 여기에는 마찰계수가 없으며 자연스레 상황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작품이 A와 B 서로를 지정하고 나면 운명은 이들 관계를 넘어 날뛰기 시작하며, 여기서 세계를 결정하는 방식은 내부와 바깥의 논리로 확장된다. 서로가 얽혀있다면 이들 이야기를 끝내는 건 아예 바깥으로 나가는 일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얽힘의 논리는 가속주의 세계의 일면과도 기묘하게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가속주의는 세계에 대안이 없으며 그래서 바깥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얽힘’은 상태가 운명을 초과한 관계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어 있으므로 바깥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 상태에 출구란 정녕 없는 것일까. 


얽힘은 관계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통제 가능한 범주 바깥에 있다. 얽힘은 상태를 고정하진 않지만 관계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세계에 변화를 몰고 올 수 없다. 이때 A와 B는 서로 얽힌 운명을 저주하지만, 관계를 끝내는 일이 세계 내에서 불가하다면 이는 결국 세계를 끝장내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바깥에 관해서는 너무 과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얽힘’에서 주가 되는 건 개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자신과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없다면 내가 아닌 것은 곧 세계에 대입되기 때문이다. 즉, ‘바깥’으로 나간다=’나’를 벗어난다는 공식이 성립함에 따라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상황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고정에 관한 인식이 그렇다. 고정이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이나 대상, 개념에 단단히 얽매이는 일을 뜻하며 대표적으로는 고정관념을 떠올려볼 수 있다. 고정관념이란, 어떤 개념이 다른 무언가와 단단히 얽혀버려서 A에서 B를 분리해 바라볼 수 없는 일을 뜻한다. 즉, 고정관념에는 ‘바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주술회전> 같은 만화에서는 발동하면 곧바로 유효타로 이어지는 개념이 존재하며, 여기서는 발동과 적중 사이의 무언가는 배제돼있다. 즉 대상에 대한 인식과 거리감은 이미 세계 바깥으로 추방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영역전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세계를 확장한 것에 가깝다. 이야기적으로 보면 배경을 날리고 인물 간의 싸움에 보다 집중하게 하기 위한 편리도 있을 것이다. 고정은 포커싱 효과와도 연계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포커스 이외에는 죄다 블러처리를 해버리기에. 그러니 이는 마땅히 추론하거나 늘어져야만 하는 일을 거부하는 사이다패스의 시대와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얽힘과 고정은 이것 이외에는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지정하는 효과가 있다. 마치 레토르트 식품처럼 큰 고민 없이 즐길 수 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 바깥이다. <주술회전>이 영역을 전개하고 필중효과를 발동하는 양식에서는 기본적으로 양자얽힘의 원리가 관측된다. 개인의 내면세계를 전개하고 여기에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효과의 발생이 고정된다는 점은 세계를 이야기 바깥으로 추방하는 효과가 있다. 이른바 고정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세계의 문제를 인물 간의 관계 바깥으로 추방해버린다는 점에서 그런 세계를 사유화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는 의도적으로 외부를 묘사하지 않는 세카이계나 러브코미디와는 다르다. ‘얽힘’은 세계를 사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자기 내면 삼는다.  


누군가는 ‘얽힘’이 가속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말하고, 누군가는 ‘고정’이 상대방 히로인과 짝짓기만 하면 그만인 편의주의적 설정의 일환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선택의 문제를 들어보고 싶다. 바깥은 없고, 관계는 고정되어 있고,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기 상태가 결정된다면. 이 안에서 자유의지란 무엇일까? 부자유가 자유로 통할 때 우리는 이를 진정으로 ‘선택’했다고 여기게 될까?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 전개에서 플레이어는 문맥에 따른 답변을 취사선택하지만, 어떤 것이든 이야기는 변하지 않는다. 이 선택지는 모두 플레이어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착각하게끔 하는 요인일 뿐이며 단지 게임상의 연출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 선택지는 모두 같은 미래에 얽혀있고 전개는 모두 특정지점에 고정된다. 게임의 개발자들은 알고리즘을 개발하며 돌이킬 수 없는 지점과 탈락하는 지점 등을 설계하며 이 과정에서 선택지는 일종의 지뢰찾기 취급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플레이어는 미래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간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단지 선택함에 따라 선택되지 않은 미래를 배제하고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얽힘’에 관한 역설을 보여주는 일이 있기도 하다. 어떤 분기가 되더라도 결국에는 같은 선택을 한다는 점 말이다.


게임사와 플레이어 간에는 그런 사실이 암묵적으로 전제돼있기에 선택지는 사실상의 대화 출력기로 전략해버리는 경우가 잦다. 실질적으로 두 개의 문장인 걸 위아래로 배치해 마치 A와 B인 척하는 일이 그렇다. 여기서는 아무 선택지나 클릭해도 게임오버가 되는 일 따위 벌어지지 않으며 결국 어떤 것이든 안전한 미래로 연결돼버린다. 즉, 여기에는 게임이 갑작스레 끝나버린다는 암전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괜찮아! 우린 주인공이니까 어차피 안 죽어!”라고 말하듯이 이들에겐 안전한 선택지와 자발적 격리만이 존재한다. 이른바 이 선택지는 어떤 선택지를 택해도 플레이어가 안전한 미래로 확정되어버린다는 ‘얽힘’을 대외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변형 판본이 있기도 하다. 평행세계에의 침공과 그에 따른 파국을 막아내는 이야기를 다룬 [블루 아카이브]의 1장 마지막 이야기는 게임의 선택지가 유효한 연출이 된다. 어떤 경우에도 선생은 학생을 지킨다는 표현은 순간의 선택으로 분기하는 미래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분기를 확정하면서 이를 플레이어에게 책임의 문제로 보여준다. 세계의 각 수정 판본이 플레이어의 선택지에 봉사하는 이 상황은 게임사의 편리에 따른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마치 분기들에 관한 고정점이 플레이어의 시점이 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같은 이야기에 도달하지만, 그들은 마치 다른 이야기라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연출에서 선택은 잘못된 것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이미 잘못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즉 이 선택은 개인의 신념을 대변한다. 개인과 세계는 선택지를 따라 고정된 결과 값을 갖기보다 그 자신의 선택을 세계를 위해 바쳐지는 유일한 것으로 만듦에 따라 ‘전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선택은 순간으로 나머지 시간을 잃어버리는 몰락이기보다 나머지 전부를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하나라는 숭고의 맥락에 더 가닿는다. 이른바 ‘얽힘’을 이해하는 방식은 몰락인 것만이 아니라 숭고 또한 있다고 보아야 한다. 누군가는 이 세계에서 모두가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자기만이 추방당한다면 모두는 안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나 하나를 위해 바깥을 잃어버리는 일은 그 본질에서 단 하나를 위해 바깥을 이루어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점에서 비평은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과 닮았다. 우리가 비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가 결국 개인의 신념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우리 세계와 운명적으로 얽히기보다 우리 자신을 세계 바깥으로 추방하는 역할에 더 가깝다. 


혹자는 비평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꼽는다. 무언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건 세상을 더 선명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세계는 비록 여전할지언정 더 많은 가능성을 품게 되리라고. 비평은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을 바깥으로 추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무언가에 의해 자동적으로 선택되기만을 바라는 구원의 장소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운명적인 얽힘이란 명령이 아니라 추방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같은 삶을 살더라도 더 많은 가능성을 품는다는 점에서 시간절약이기도 한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뿐이기에, 우리는 그걸 알차게 보내려 한다. 비평에 관해서도 이런 의견은 옳은데, 영화는 시작되고 끝나는 일을 통해 우리의 삶과 분리된 게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일은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의 문제일 뿐, 전적으로 세계를 분리해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휴일은 또 다른 삶으로 가는 문턱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연장선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항상 어딘가를 바라보는 일에서 항상 우리 자신이 있다는 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니 비평은 예술작품의 부산물일 수 있겠지만 거기에도 줄곧 우리의 삶이 계속되기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성비를 추구하며 숏폼 콘텐츠를 소비하는 와중에 비평은 세계의 영상을 다시 그리고 있다, 고나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꿈에 수렴하는 우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