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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04. 2023

꿈에 수렴하는 우연


<거울 속 외딴 성>은 하라 케이이치의 근작이면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두 개 매체에서 우리는 풀려나는 힘과 보여주려는 것의 알력 싸움을 본다. 소설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제시한다면 영화는 그러한 이야기를 바라보는 방식을 설명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 관한 내 입장은 최근까지도 마땅치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이들 이야기 안에서 개인의 관점이 부유한다고 느꼈고,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영화의 자생성을 생각할 기회가 생겼고 ‘서로 다른 입장’이 한 곳에 어울리는 기막힘을 떠올리게 됐다. A와 B지역이라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의 유사함 만으로 서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일이란, 정말로 어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를 자생성이라 부른다. 혹은 수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볼 수도 있다. 들뢰즈는 방향성이라는 말을 리좀의 형태를 설명하는 일에 사용했는데, 영화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게 정 반대로 행해지는 때이다. 가령 AI 그림을 떠올려보자. 불규칙한 패턴이 하나의 규칙이 되어 알고리즘화 될 때 여기에는 이야기가 생겨난다. 끌고 가는 힘은 없지만 드러나는 일에서 유사점이 있고, 전혀 다른 것들 사이에서 화풍을 찾을 수 있다. 즉 여기서 화풍은 이미 그들 안에 자생해있다. 


이와 유사하게 <거울 속>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공통분모를 찾는 방식을 취한다.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 초반에 드러나는 것에 반해, 그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점은 거의 끝에 가서 밝혀진다. 영화는 아이들 모두가 모여있는 현실을 보여주지 아이들 각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는 의도적인 서술 트릭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이들의 모습은 외딴 성에서 캐릭터성의 일환으로만 보일 뿐 살아온 환경과 배경, 가족 관계 등을 투영할 수 없게끔 한다. 그래서 이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 어른들의 세태를 비판하는 것일뿐더러 관점을 달리하면 같은 현실 안에서도 다른 현실이 발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서로 다른 상을 발하는 렌티큘러(Lenticular)처럼 <거울 속>은 각자의 현실에 대한 한 가지 제안이 아니라 사적인 현실들이 수렴적으로 진화하는 일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는 학교폭력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이야기들에서는 징후적으로만 드러날 뿐 언어화되지 않는 여러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영화에서는 징후들이 이야기를 대체하고 있으며 그들 징후의 종합인 성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공간이 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선보이는 서술트릭이 다소 개연성이 없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트릭이라 볼 만큼 정교하지도 않다는 점을 변명으로 내세울 순 없겠지만. 인간의 삶을 결정체에 빗댈 수만 있다면 여기에는 다양한 부류의 삶이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삶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거기에서 무언가 유사점이 발견된다면 그런 발견은 다소곳이 결론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여기 있는 아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일로 출발하지만, 사실은 객관적이지 않은 현실 안에 있었다는 게 이 작품의 가장 큰 시사점이다. 영화는 사적인 현실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적인 현실은 내가 사는 곳이기에 현실의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한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는 현실이 기본적으로는 배치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평상시에는 운명에 포섭되었던 서사가 그러한 개연을 벗어날 때야 비로소 서로 간에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개연은 우리로 하여금 앞을 보게 하고 또 그런 방향성이야말로 자연스럽지만, ‘개연성이 없다’는 게 꼭 진실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개연성이라는 말이 꼭 우연의 일치나 상상가능한 범주 이내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가령 최근에 있던 일인데, 같이 일하는 분에게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추천했다. 그는 영화가 개연성이 없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갱들의 싸움터에서 돈 가방을 가져온 후, 다음 날 아침에 가서 생존자에게 물을 건네는 일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미 죽었을 게 뻔한데도 굳이 거기에 가는 건 쓸데없이 목숨을 재촉한 게 아니느냐고 그는 물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영화가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우연들이 상상을 대체해버린 이 영화에서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을 ‘상상’들이 모두 제거된 듯 보였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란 없는 게 아니냐고. 실제로 그의 말은 이치에 틀리거나 한 건 없었다. 단순히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이 아니라 상상하는 힘을 앗아갔다는 점에서 영화는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말처럼, <노인>은 어떠한 초현실적인 존재에 끌려가는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미 결정된 장면을 풀어가고 있을 뿐이며, 이들의 운명은 그저 정해져 있을 뿐인 게 아닌가. 하지만 운명과 상상가능한 영역은 서로를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다. 운명이 잡아당기는 힘이라면 상상은 풀어지면서 확장되는 힘에 가깝다. 이는 즉, 운명이 상상을 인도할 수는 있더라도 상상의 필요충분조건이 운명은 아니라는 점을 뜻한다. 


상상은 운명에 인도받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상상은 영화 아닌 우리만의 고유 영역이다. 영화를 보는 한, 관객은 영화의 서사를 초과해있기에 영화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은 그러한 현재를 뒤로 풀어낸 후다. 현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몸에 대한 인식과 맞물린다. 이른바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느낄 때 그곳에 몸에 대한 인식이 없음을 고려하면, 본다는 것 이전에 존재함이 없으며 이를 따라 상상 이전에 운명이란 없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운명을 위해 상상해야만 한다.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세계를 잘 상상하는지에 따라 달렸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지만, 그런 비판점이 죽음에 대한 불가항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이들 영화에 개연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배후에는 ‘선택권이 없다’는 일에 대한 항변이 자리한다. 주어진 서사나 미래를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기보단 영화가 특정한 장면을 달성하는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인간이 풀어야 할 숙제를 영화가 풀어버릴 때 이곳엔 의미란 게 전혀 남지 않게 된다. 영화는 단지 자기가 보여줄 뿐인 것만을 받아들이기만 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잡아당겨지는 일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을 그리 달갑지 않게 바라보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결정론이 아니라 결과론의 관점에서.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는 말에는 그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말하는 피의자의 항변이 따라붙곤 한다. 이들 사건은 항상 결론으로 우리에게 제시되지만, 우리가 영화에 관해 말하듯, 사건은 늘 하나의 좌표를 남기지만 그에 도달하는 길은 셀 수 없이 많다. 영화는 어떠한 결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결말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이때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몰라도 통계학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하는 실험물리학자의 입장이 된다. 이는 영화에서 결말은 단순한 목표 달성인 것만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서의 우리를 남긴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른바 영화의 목적은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를 설득하기보단 우리를 이들 이야기에서 부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개연성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개연성은 가능성과 확률의 수싸움이 아니라 성립된 미래에 관한 실험적인 재현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미 결말을 마주한 이상 우리는 그걸 부정하기보다 맞서 싸우면서, 확정된 미래를 자신이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정도의 수식으로 변화하는 일을 시도해야만 한다. 


영화에서 개연성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그런 정도의 입지가 있다. 고독한 현실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일을 자주 보지만 여기서 찬가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에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인간찬가라고 불리는 장르의 산물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서사에 공통 미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이 말하듯 희망은 낙관하지 않는 방식으로 미래에 결탁해야만 한다. 희망은 높은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그렇기에 시야를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궤도를 수정하는 일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달을 향한 궤도 탐사선이 중력에 의한 궤도 왜곡을 어느 정도 응용했다는 점이다. 스윙-바이를 통해 안정적인 운용을 끌어낸 아폴로 탐사선에서는 바로 그 왜곡조차 계산의 범주에 있었다. 즉 이 계산은 어떠한 일이 벌어질 확률을 실험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에 개연성이라는 표현은 그런 점을 가리키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개연성은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에서 운명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해준다, 상상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하고 반대로 말해보면 꿈은 모두에게 허락되어야만 한다. ‘말도 안 되는’ 현실 따윈 현실로 족하니 말이다. 우리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서 우연이라는 말은 늘 결말 이후에만 자리할 뿐이고, 이들 우연은 꿈에 수렴진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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