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Sep 26. 2023

‘국적’과 ‘극적’으로서의 애니메이팅


정성일 감독의 영화를 봤다. 이 영화들에 관한 글은 대부분 이런 문장으로 끝나고는 한다. “정성일은 (…) 영화적인 것에 진심이다. 그는 항상 영화로 돌아와 이 문제를 생각한다.” 대표적인 건 왕빙에 대해 찍은 <천당의 밤과 안개>의 마지막 장면이다. 왕빙의 영화 현장을 따라가던 이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가공의 픽션으로 변모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한 여자가 극장에 방문하는데 그녀는 “나 지금 왕빙 영화 보고 있어.”라는 말을 한다. 일종의 메타적 발언, 정성일이 이 장면에서 의도한 건 왕빙의 영화 만들기 작업을 따라가는 행위 또한 왕빙의 ‘영화’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정성일은 영화를 찍고 싶어한 게 아니라 그저 왕빙의 영화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에 관해 정성일은 “정신병원에서 왕빙의 카메라 뒤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간호원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시선에 더는 촬영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정성일이 고백하듯 영화란 특정한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 현장엔 둘 이상의 화자가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두 개의 시점으로 보는 일은 가능하더라도 둘 이상의 화자를 가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영화의 안에서는 단일한 시점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영화 만들기에 동참한다는 건 곧 영화를 본다는 것이며, 이는 반대로 우리가 <천당>을 보며 왕빙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정성일의 방법론이다. 정성일은 임권택에 대해 찍을 때 영화 현장보다 거장의 일상에 머무르기를 택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그는 임권택의 초대를 받으며 다도의 의식을 거친다. 이 의식은 아마도 정성일이 임권택의 영화에 들어가는 포문이 되어주는 것만 같다. 왜냐하면 영화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영화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영화 안에는 ‘하나의’ 시점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임권택의 시점에 머무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는 정식으로 임권택의 초대를 받아, 그 시점에 머물며 임권택의 영화를 생각한다. 정성일의 이 관점은 영화를 보는 것 다음 단계가 왜 찍는 것인지를 말해주는데, ‘본다’는 건 결국 타인의 관점에 서는 것이므로 자기만의 것이 있어야만 한다. 


영화를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자기를 떠올리는 일.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의 바깥에 서 있는 자기를 생각하곤 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보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도 같다. 영화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자신과 분리해 바라보아질 수 없다. 영화에서 국적성을 발견하는 일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영화는 태어난 곳의 법령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일처럼 영화는 항상 되고 싶은 이상을 생각한다. 영화를 찍는다는 건 결코 타인의 관점을 찍는 일이 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영화가 자신을 말하는 일에서 ‘자신’이 빠질 수는 없으므로, 영화가 보여주는 꿈은 모두 영화 자신의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국적은 우리가 정체성을 생각하는 일과 유사하다. 언제 태어났는지를 결정할 수는 없어도 언제 죽을지를 결정하는 일은 가능하다. 우리는 자기를 결정할 권리가 있고 반대로 말하자면 세상이 자신을 결정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칸트적 의미에서 세계시민은 정체성을 자신이 아닌 세계에 두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오늘날 UN의 설립 헌장이기도 한 이 개념은 우리가 세계에 ‘소속’되어 상호 간에 존중을 보내는 일을 배경 삼는다. 누군가는 이를 분열된 자아에 빗댈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분열이라는 말은 몸 하나에 여러 정체성이 공존하기에 ‘자기’를 하나로 규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 시민에서 ‘자기’란 정체성을 세계에 둔다는 점에서 분열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영화도 여러 시점이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평화적 공존 따위를 생각 중인 게 아니라 영화를 끝내는 방식을 떠올리고 있다. 세상이 자신을 결정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외부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자기를 유지한다. 이는 생물의 일반적인 구조를 따라가기에 압력이 다른 곳에 가면 안팎의 균형이 깨져 쉽게 죽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분열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될 때, 이곳에는 상대화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점이 여러 개라고 해서 그곳에 ‘자기’가 없다고만은 볼 수 없다. 가령 한국영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영화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이냐는 것. 누군가는 만든 사람이 한국인이면 그렇다고 말한다. 어딘가에서는 한국적인 게 잘 드러나면 한국영화라고 말한다. 사전적으로 다 맞는 말이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국적성은 이 영화가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지고 있느냐는 점에 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의식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 서술의 방식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삶의 고유 패턴을 감지하게 되고 이는 곧 인물의 국적을 추론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 국적 문제는 적어도 받아들여지는 쪽의 문제가 해결된 영화에서 다르게 고민할 일이 없다.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간에 괜찮다면, 강요된 방식이 없다면 여기에는 오직 자유로움만이 있을 테니까. 이들 영화에는 난민이 없고 히피가 없고 부랑민이 없다. 이들 영화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능통하다. 여기에는 입국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국경 또한 없다.


영화에 두 개 이상의 시점이 공존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 영화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지를 고민하면서 시점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정체성이라는 표현은 어떤 면에서 세계시민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우리는 국적이나 성별, 연령대를 넘나들면서 작금의 자신에게 상충하는 요인들을 한 자리에 어울러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요인들에서 벗어나는 자기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소속되기를 원하지만 ‘자기’는 공통분모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고,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그게 매력이라고 여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발견과 요구는 오랜 역사를 지녀왔던 것 같다. 외국영화에 짧게나마 한국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해외 매체 속의 한국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졌던 때가 있었다.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표현은 한국적인 시점과 같은 말이 아니었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실질상의 이물질로 여겨졌고 이를 따라 ‘한국’은 시점에 동화될 필요가 있었다. 


“꽈찌쭈”가 한국에서 밈으로 돌았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발견은 대개 “~계 미국인”과 같은 형태가 주류였다. 시점은 여전히 외부에 머물러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소명은 그런 한국이 어디인지를 논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나리>나 <파친코>와 같은 작품이 등장한 건 한국적이라는 말이 비로소 하나의 시점으로 기능하게 됐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발견을 새롭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이 하나의 시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걸 누구나 잘 아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주장하는 일이 그다지 새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점에 동화되지 않는 정체성이 등장해옴에 따라 한국적인 요인은 다시금 여러 시점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한국적이라는 말에서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한국이라는 말은 프리즘에 투과되어 여러 색채들로 분광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엘리멘탈>에서 우리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볼 수도 있겠지만 언론에서는 ‘K’라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관객들의 수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엘리멘탈>은 한국에서 이례적으로 역주행하는 영화 중 하나다. 역주행의 이유는 여러 방면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뜻으로도 그렇지만, 다양한 시점이 한 자리에 공존한다는 점이 그렇다. 일단 이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어느 정도 녹아 들어있고 이를 따라 한국인들에게 모종의 공감을 끌어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룬다. <파친코>의 경우도 원작 소설에서 강조된 것은 이러한 혈연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분석은 한국과의 직접적인 연결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이 안에서 여러 시점이 분열되어 나온다고 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런 분석은 정성일이 왕빙을 촬영하던 방식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대상을 포착하는 일이 세계의 빛을 통해 정체성을 이루는 방식, 즉 편광판에 입자를 응집하는 방식임을 떠올려보자. 카메라의 시점은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 머무르는 방식의 문제로 이해된다. 오늘날 영화에서 ‘한국적’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우리는 이들 영화에서 한국을 발견한 게 아니라 우리가 머물 곳을 찾은 것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기만 한 건 아닌 결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