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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5. 2023

주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기만 한 건 아닌 결말

어른들의 세계가 재미있는 건 거기에 이야기가 있어서다.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신체의 노화에 관한 것일 텐데, 생리학적으로 어른의 기준은 생식가능성에 있다고 한다. 이는 번식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행위, 후대에 종을 남기는 행위임을 고려할 때 이야기의 전승과도 연결된다. 아직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에는 후대에 사실을 전할 요령으로 구전을 택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구전은 이야기를 후대에 전한다는 점에서 생식의 일종이기도 하다. 생식이 자신을 죽음 이후, 그러니까 결말의 바깥으로 넘기는 일이라면 구전도 그렇게 된다. 구전은 당사자에게 단순한 흥밋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이야기가 지속되어 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이야기에 개인을 은밀히 봉사시킨다. 이야기는 자신이 현재를 벗어나 알 수 없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전달매개로써 사람을 택한다. 즉 이야기는 우리의 몸을 초과해있고, 몸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반대로 안에 있지는 못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밈이 그런 설명을 대체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밈은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문화적 요인의 전파가 마치 유전자의 전달 형태와 닮았다는 점을 가리킨다. 문화적 요인은 밈의 중심에 있지만 반대로 안에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 그 말대로, 어떤 경우에 밈은 본래 창안되어진 배경과는 무관하게 유용되는데 이들 사례에서 ‘문화’란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전자가 종의 보존을 위해 생물을 조종한다면, 마찬가지로 밈은 문화의 보존을 위해 이미지와 배경을 끌어들인다. 즉 밈은 이미지와 배경에 의해 바라보아지는 자신을 경험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자기기술이자, 생식의 일종이 된다우리가 자식들이 어떻게 자랄지를 쉽게 떠올려볼 수 없듯이 적어도 밈은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우리는 밈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밈에 동화된다는 건 그런 미래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앎을 위해 무언가에 대해 알기를 포기한다.  


밈을 향유하는 우리 자신은 그런 이야기 바깥에 머무르곤 한다. 이야기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다른 곳에 전파할 수 있다는 건 생리적인 접촉 없이도 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건 내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다. 내가 없으니 우리가 될 수도 없고 우리가 없으니 세상도 없다. 즉, 밈을 향유하는 일에는 적어도 그런 의미가 있다. 이야기의 바깥에서 ‘나’를 당신으로 지칭하는 일. 우리는 밈을 향유함으로써 자신을 타자화하고 이를 통해 세계에서 추방당하고자 한다. 세계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어떤 세계의 당사자이기보다 타자일 때 더 잘 관측되거나 묘사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따금 추방당한 것들이 다시금 우리의 세계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 이상 밈을 향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밈은 우리가 이야기 안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게끔 하지만 오히려 밈은 문화의 안에 있지 않다. 밈은 이야기가 바깥에 머물 요령으로 선택된 생존의 방식이며, 본래의 맥락과는 다르게 변형되어버린, 오인의 사례를 지적하는 일로 연결된다. 


밈은 우리가 선택한 것에서 출발해 선택하지 않은 미래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책임에 대한 한 가지 제언이 되어준다. 개구리 페페를 둘러싼 오인과 오용처럼 많은 경우 밈은 이미 원작을 초월해버려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는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깥에서 밈을 지켜보는 우리는 정해진 결말에서 이탈해버린 밈을 바라보며 이미지의 표면에 시선을 고정할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른 이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진의는 왜곡되거나 달리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밈의 향유가 기본적으로는 개개인의 선택과 결말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더 큰 문화적 의지, 생리적으로 본다면 유전자의 의지에 이끌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선택이 좌절되라도 이를 구성하는 유전자만큼은 살아남는다. 어른과 아이에게 있어 가장 큰 능력의 차이는 바로 이렇게 자신을 재생산하는 일이 내부와 바깥 둘 중 어디에서 결정되는지에 달렸다.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살지만 어른은 세계의 자신을 산다. 아이는 본격적으로 주체가 되는 일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반대다. 


어떤 이야기의 결말은 자신에게서 완결되지 않지만 우리가 이를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이야기가 우리보다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일은 유전자의 전파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엔 그렇지만 사실은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몇몇 이들은 우리의 몸이 단지 유전자 전달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종으로서의 미래를 고정하고, 개인으로서의 미래는 선택하지 않은 곳으로 유기해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타자가 된다. 이미 우리의 몸을 초과해버린 이미지들에서 선택의 권리는 운명을 투과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이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인 것만큼이나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선택지를 초과해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범주라서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이 결말은 우리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에 되려 세계에 더 참여하게끔 하는 건 아닐까. 이런 마음은 가짜가 아닐 것이다. 유전자가 영화라면, 밈은 게임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


기계적인 시선을 줄곧 유지해나가자. 게임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게임에 관해서는 게이머의 참여가 동반된다는 점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교정 장면이나 <겟 아웃>의 의식 세계처럼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의식하진 않는다. 연구자나 비평가의 사례를 제한다면, 영화는 마치 가스처럼 알게 모르게 새어나오는 무언가에 더 가깝다. 영화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재생된다는 점에서 강제성이 있고, 그런 점에서 흔히들 삶에 빗대어지곤 한다. 가령 태어나는 순간은 정할 수 없지만 죽는 순간만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세계에 의식을 갖는 순간부터 이미 삶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을 의식하지 않아도 세계는 마치 숨 쉬듯 흘러간다. 때때로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만 가면 알아서 흘러나오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영화에서 스크린은 다른 세계를 엿보는 창문에 빗대어지기도 했다. 즉 영화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에 연결됨으로써 우리가 그를 특정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여기게끔 했다.


게임의 사례는 좀 다르다. 게임은 영화와는 달리 장소성이 배제된다. 게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으며 게임의 역사는 초창기를 제외하면 곧바로 집과 연결됐다. 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투자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집합에서 얻어냈다면, 게임은 세계의 속성을 초대와 연결로 내세웠다. 이는 게임의 역사가 게임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와 상영기술은 상호 간에 분리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게임의 역사는 곧 게임기의 성능에 관한 것이었다. 즉, 게임기가 보내는 신호를 표출하는 모니터는 비교적 느슨하게, ‘보여준다’라는 역할에만 충실했던 반면 영화는 카메라의 성능보다 극장의 관람 환경이 더 중요했다. 게이머에게는 게임 속 세계를 더 화려하게 구동할 수 있을 성능이 중요했던 반면, 관객에게는 영화를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화질이 중요했다. 관객에게는 이곳에서 저곳을 바라본다는 의식이 더 강했던 반면, 게이머에겐 저곳에서 바라보아지는 자신을 의식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게임 속 세상은 본격적인 유희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게임은 홈 엔터테인먼트의 일환이었고 이를 따라 게임은 ‘집’이라는 돌아갈 공간 위에 실행됐다. 영화는 상영 중에서 관객의 세계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만, 게이머는 항상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세계, 배변욕과 수면욕, 식욕 등이 지배하는 아득한 집을 의식하고 있다. 즉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발명의 이른 시기에도 이미 홈 엔터테인먼트였다. 게이머에게 게임을 한다는 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등지는 일과도 같았고 이를 통해 저곳과 이곳을 비교하는 일이 가능했다. 게이머의 삶은 늘 집과 함께했으며 그들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게이머에게 세계는 늘 자신의 선택을 동반한다. 게임은 게이머에게 돌아갈 곳을 고려하지 않게 함과 동시에 세계에 관한 책임의식을 부여한다. 스스로 선택한 세계인만큼 게이머는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게이머는 집에 몸을 고정해둔 채 게임기를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기에 여기에는 항상 게이머 본인의 의식이 

함께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게임은 현실과 분리된 곳이지만, 게이머에게 게임은 이입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령 게이머에게 게임은 자신이 선택한 곳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파괴할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가 투입을 의식적으로 끊어내려는 노력하는 일이 거진 불가능한 반면, 게임은 저곳과 이곳의 분리가 확실하지만 이곳의 내가 저곳을 선택, 투입, 책임지지 않는다면 연결은 완전히 끊겨버리고야 만다. 그래서 영화가 관객에게 무기력감에 면책특권을 동시부여하는 한편, 게임은 관객에게 선택의 권리와 책임져야 할 의무를 동시부여한다. 물론 두 매체에서 세계는 마땅히 분리돼있으므로 이런 일들은 그저 화면을 끄고 현실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어떤 게임에서는 게이머가 마우스를 클릭하는 정도의 한정된 자유도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들 게임에서는 여러 선택지가 제공되고 선택에 따라 여러 결말이 제공되지만 게임 개발 알고리즘은 게이머가 이들 중에 어떤 결말이라도 도착하게끔 짜여져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건 게임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결론을 전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무조건 결말에 도달하는 반면 게임에는 결말이란 게 없다.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부여받은 자산이 아니므로 게이머는 언제든지 세계를 저버릴 수 있다. 세계를 책임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영화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많은 노예를 양산한다. 노예는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게이머는 자신이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른이 된다. 영화가 끊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의 문제를 연상케 한다면, 게임은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삶의 문제를 연상케 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게임의 연속성이 갖는 이점은 모든 선택지가 자기를 대하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의미는 우리가 집중적으로 선택하여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이를 토대로 우리는 의미를 밀고 나갈 수 있다. 반면 게임에서 의미는 우리가 온전히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막아서는 일이 요구된다. 결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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