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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3. 2023

베타의 워크샵: 어른스러움과 추방의 '메타'

https://blog.naver.com/vadomori12/223201846749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현대 영화에서 워크샵 영화의 부상을 애니메이션과 연결짓는다. 이 둘은 얼핏 보았을 때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한 자리에 두는 것으로 상호 간의 얽힘이 증명되는 것만 같다. 가령 다이스케가 워크샵의 특징으로 ‘프로세스를 그리는’ 일을 지적하는 일은 디지털 환경이 “완성품으로서의 뚜렷한 윤곽이나 종착점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점과 연결되고 있다. 자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신 안에 반영하는, 우리가 ‘메타’의 성질이 있다고 말하던 작품들. 다이스케는 <시로바코>와 <영상연>을 어떠한 사례로서 언급하지만 사실 이는 영화에서 꽤 오래된 방법론이다. 가령 역사적 사실을 정교하게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영화의 신화가 디지털 환경에 대한 묘사에 거의 부합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완전영화는 영화가 완전함에 관한 한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여기에는 윤곽도 종착점도 없다. 바꾸어 말해 영화는 인간이 어떠한 윤곽이나 종착지를 두루 갖지 않기에 더욱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영화가 자신을 미완에 빗댈 때, 여기에는 패배의 흔적이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점이 마냥 희망차기만 한 건 아니다.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은 뭔가 투지가 넘치지만, 누군가는 그냥 깔끔하게 패배하고서 집에 가고 싶을 수도 있다. 패색이 역력함에도 경기를 끝까지 뛰어야 하는 선수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윤곽이나 종착지가 없다고 보는 일은 여행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반대로 무한한 미래를 끌어들이면서 그러한 불안감에 침몰하는 일을 낳기도 한다. 즉, 물질적 지지체를 갖지 않는 ‘메타’란 그런 점에서 얽힐 상대를 요구한다. 물질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면, 정서적으로라도 지지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정서적 교감 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듯 보인다. 마노비치의 말처럼 결국 모든 영상 매체는 애니메이션의 메타몰포시스로 귀결된다고 본다면, 영화에서의 완전함은 소멸의 맥락이 아니라 합일의 맥락인 메타몰포제에 가깝다. 그러니까 애니메이션과 워크샵 사이에는 미래에 대한 합일이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은 완전하지 않음에서 출발해서 다시 거기에 안착함으로써 완성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개인적으로 <시로바코>와 <영상연>을 같은 자리에 두는 건, 초점이 정확한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영상연>은 물과 녹아듦의 이미지를 잘 활용하는 유아사 마사아키의 맥락에서 더 잘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유아사는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 ‘메타’의 관점을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물질은 ‘정서’인 설화에 의해 대체되고, 그러한 정서적 지지(=바다)가 마을을 연결한다. 적어도 <영상연>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서 희망을 얻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작품 안에서 이들의 꿈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인 ‘제작기’에 봉사한다. 즉, 개인의 목표와 꿈이 있는 듯 보이지만 세기의 꿈과 마땅히 구분되진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싶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들 작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힘으로 해내고 싶다”는 자주성을 본다. 말하자면 이들 작품은 ‘지지 않는다.’ 확장해서 바라보면 이들 작품은 ‘말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선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목격하기보다 자기 스스로 나서서 발언대에 서는 용기가 발견된다. <신에바>에서 신지와 레이의 마지막 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결말을 위해 달려가기보단 열린 세계를 내부로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공백을 추진력 삼는다. 자신은 아무런 능력이 없거나 미래가 불투명하거나 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런 점이 되려 작품이 말하려는 것을 더 잘 드러낸다. 하마구치가 <우연과 상상>의 열린 문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연기의 본질이 바로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 카메라가 자신을 ‘목격’하거나 ‘포착’하는 게 아니라 그런 카메라에 의해 투과되는 시선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유운성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워크샵을 두고서 그런 표현을 쓴다. “불확정적 얽힘의 관계 속에서 (…)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어 미래의 ‘무한한 시선’을 위해 고정된다.” 유운성이 말하는 건 카메라가 무한함을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얽힘을 관통하는 시선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영화 다수가 워크샵에서 출발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 불투명한 미래는 설사 그것이 연기일지라도 개인의 시선에 의해 주목받고 또 확정될 수 있다고 본다. 현황이 불투명하다면 그런 혼돈은 되려 자신이 뚫고 나갈 ‘얽힘’의 지점이 되어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는 믿는다. 


그러니까 하마구치가 <드라이브>에서 고도를 말하던 맥락이 얽힘이라면, 이런 일은 다이스케가 ‘영원한 베타’로 일컬은 변형 가능성에 정면 반박하는 것이다. 자기 기술 워크샵이 미래의 불투명함을 내면에 끌어들이면서 완전함을 소유하려 한다면, 다이스케가 말하는 ‘베타’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인 듯 보인다. 혼돈이 변화의 국면이 아니라 질서가 변화의 국면이라고 말하는 이 관점은, 영화에서의 프레이밍이 갖는 함의를 드러낸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얽힘’이 갖는 고정의 기능으로, 뚜렷한 윤곽이나 종착지를 갖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주는 일이다. 무언가를 포착해서 드러내려면 먼저 구도를 잡아야만 한다. 무언가를 포착했다고 표현하는 수어가 망원경과 카메라의 틀을 묘사하듯, 무언가를 프레이밍하는 일은 대상을 세계의 프로세스에 빼내는 일이다. 우리는 그를 포착함으로써 실재계에서 현실계로 데려온다. 쉽게 말해 우리는 세계를 모두 가질 수는 없지만 무언가에 ‘관해’서만큼은 서술할 수 있다. 이른바 윤곽과 종착지는 우리가 통과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서 분리해내는 데 필요하다. 


영화와 삶의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가 이 이야기에 끝이 있다는 걸 잘 안다는 점이다. 영화와 삶은 도중에 중단될 때 ‘죽음’을 맞이하여 소멸한다는 점이 닮았다. 그리고 신체에 경계를 세우려면 세계의 주름을 인식해야만 한다. 즉 삶이란 우리가 세계와의 접촉을 인식할 때, 그 경계면에서 때와 같은 소멸의 징조를 느낄 때 줄곧 지속될 수 있다. 경계는 우리에게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자 끝나는 지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경계를 지니지 않는 메타몰포시스란 시작과 끝을 지움으로써 항상 여기에 있고자 하는 유예의 감각과 긴밀히 연결된다. 아이들은 어른을 인식하는 순간 그들 세계로 ‘추방’되기에, 특정한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고서 그러한 특정함에 관한 원류를 따라가는 이들 ‘메타’는 어른스럽다. 그런 점으로 보면 자신을 ‘영원한 베타’로 규정하려는 ‘메타’의 성질이란 갈 곳을 잃은 부량민이 아니라 어른스러움을 위해 마련된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자주’라는 말이 그런 점을 뜻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포착의 순간에 자신을 홀로 있게 하지만, 정작 그런 행위에 끌려나오는 건 눈에 비치는 세계 전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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