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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2. 2023

뼈와 세계: 아이의 마음이 생겨먹은 방식

소설로 들어가는 입구는 그 제목에 미리 펼쳐져 있다. 『인간의 제로는 뼈』라는 제목은 “여러 이야기들이 몸에 달라붙는다”(p.275.)는 말을 위해 이곳에 있다. 만약 뼈라는 말을 작품의 뼈대라는 점에서 주제의식에 빗댈 수만 있다면, 인간은 이야기를 달라붙게 하는 존재이지 어떠한 진행상황 안에 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서로를 달리 보이게 하는 건 주변에 둘러싼 이야기 탓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의 증거로 사회화를 말하듯 아이는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며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운다. 흔히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어려서나 지금이나 나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고, 단지 자신을 숨기면서 상대방에 어울리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제로’가 뼈라는 말은 희생과 폭력으로 점철된 그라운드제로의 제로가 아니라, 모 애니메이션처럼 ‘리:제로’라는 형식이 되어야 할 테다. 인간의 뼈가 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제로는 뼈라고 말해두고 싶다. 


특히나 나에게는 ‘뼈’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그것도 두 개나. 페드로 코스타의 <뼈>(1997)와 최양일의 <피와 뼈>(2005)다. 소설의 내용과 별 관련은 없지만 이들 영화에는 뼈에 살점을 붙인다는 점에서 소설과의 유사점이 있다. 인간의 본질은 뼈에 있고, 이를 가꿔나가는 건 우리들 이야기의 몫이라고. 페드로 코스타의 경우 영화는 주로 멀리서 지켜보는 쪽을 택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공백은 이들의 삶, 또는 살아가는 이야기일 테다. 즉 페드로 코스타는 영화의 공백을 이야기로 만드는 형식을 취한다. 최양일은 가족의 형태를 ‘뼈’에 빗대지만 여기서 아버지와 자식 간의 공백은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 또는 이야기에 의해 보충된다. 마찬가지로 최양일 또한 코스타처럼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공백을 이야기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런 요약을 전하며 나는, 영화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있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이야기가 있다고 말해두려 한다. <인간의 제로는 뼈>도 비슷한 맥락을 취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란 대체 무엇일까?”(p.52.)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서술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어려움은 세계를 향해있지 않다. 여기서 어려움은 내가 아는 자신과 세계에 속해있는 자신 간의 괴리에 있다. 자신을 대하는 문제를 떠올려보자. ‘뼈=주체’인 나에게 ‘세계=이야기’는 어떻게 구성될까? 소설은 뼈에 이야기가 달라붙는 게 몸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은 이야기가 없으면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면 거긴 그저 공백에만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배운 건 그런 점이었다. “나는 이제 19살. 세상도 세계도 사회도 인간도 거의 모든 것을 애매한 상상과 어쩌다 얻은 지식으로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p.112.) 영화는 애매한 상상과 어쩌다 얻은 지식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그리고 영화는 어쨌거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에게 말해준다. 따라서 영화에서 공백은 우리 삶의 의미를 찾는 곳이면서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곳이 된다. 


몸을 구성하는 문제를 따져 묻기란 사실 쉽다. “실제와 다른 세계를 바라지 않으면 된다.”(p.208.) 하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야말로 너무나 어렵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은 현실에 카메라가 없다는 점으로 인해서도 그렇지만 있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는 항상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인해 극적이거나, 비극적인 태세로 흘러가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삶의 주인공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기분에는 항상 “기쁘게 받아들인 본래의 자신”(p.132)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제로가 뼈라면, 기쁜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기에 곱하면 모두 제로로 환원되고 말 테니까.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이야기에 둘러싸였지만 이들 이야기의 뼈대일 뿐 그 본질에서는 언제나 제로일 뿐이다. 바로 이 영원이 우리가 와비-사비(わび・さび)라고 부르는 정취인 것은 아닐까. 삶은 단순하지만 불완전하고, 부족함과 쓸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영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여러 이야기들이 몸에 달라 붙는다.”(p.275) 하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더더욱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p.259.) 실제와 다른 세계를 바라는 일은 그런 영원성에 대한 한 가지 소망이다. 영혼은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는 더욱 몸의 불안정함에 끌린다. “어른은 아이의 연장선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어릴 적에 가졌던 감각들을 전부 그대로 가지고 있거든.”(p.222.) 결국 어른은 아이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본다면 여기서 몸은 단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공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된다고 볼 때, 그 몸은 뼈에 이야기가 달라붙는 방식이나 형태에 의해 달라질 테다. “이야기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p.81.) 분명 우리의 몸은 각자 다른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서로는 자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는 항상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니까. 또는 그런 공백에 이야기가 있다고 봐야만 몸에 대해 알게 되니까. 역설적으로 우리는 몸을 알게 됨으로써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를 별 다르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인간에게서 성장의 가능성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가령 이 이야기가 성장담이 아니라는 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언어는 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p.71.) “나의 언어는 몸 안에서 바깥으로 도망치고 말았다.”(p.39.) 이야기의 안에서 바깥으로 도망쳐나오는 언어들은 서사화되지 않는 감정, 그 불안정함을 알레고리로 환원한다. 이른바 몸의 알레고리라 부를 이것은 역자의 말대로 스스로를 서술하며 ‘나’라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p.288)로써 알려진다. 그렇다면 이는 불사조 설화의 일종이기도 하지 않을까. 잘 알다시피 불사조는 삶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동물로 알려졌다. 불사조는 적당한 때가 되면 자신을 뼈까지 불태워 잿더미가 된 후, 그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정직함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은 주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p.207.) 불사조가 자신을 태움으로써 얻는 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아니라 소진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에너지계의 역학, 그 끌어들임의 과정이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아이의 마음이 생겨먹은 방식”(p.126.)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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