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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3. 2023

위기론과 바깥


취업준비라는 말에서 준비라는 말은 대체 뭘 말하는 걸까? 과정이나 단계를 설명하려면 차라리 ‘전-취업 단계’가 나을 것이다. 이 말을 다른 곳에 적용하면 얼마나 우스워지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예비신랑신부에게 결혼준비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랑신부는 이미 한쌍으로 맺어졌고, 그런 결합쌍이 서로에 의해 지지받기 때문에 불확실성과 관련된 표현은 지양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취업준비생이라는 말에서 준비라는 표현은 ‘놀고 있지 않다’의 반대항인 ‘취업’이라는 말에 봉사한다. 즉 취업준비생은 되기의 과정에 속한 ‘예비’라는 표현보다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라는 식의 어감에 더 가깝다; “이제 더 놀고만 있지 않을게요.”라는 다짐이 ‘준비’라는 말에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부와 취준생 간의 어감 차이를 이해하게 된다. 결혼은 그들 간에 선택한 일이지만, 취업은 선택사항이 아닌 것이다. 취업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취업준비생이라는 말은 취업을 하나의 단계로 규정하면서, 이를 토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길 권한다. 


‘준비’의 모호함이 그렇다. 준비라는 말은 우리가 반드시 겪게 될 일들에 관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진 알 수 없다. 취업을 인생의 다음 단계에 놓는 현실에서는 취업에 대한 무게감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된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만큼이나 모든 인간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 ‘준비’라는 말은 ‘바깥’이라는 허울 좋은 광경에 대해 쓰이지만, 정작 그런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동물을 구조한다는 명목으로 무턱대고 동물을 야생에 풀어놓는 일만큼이나, ‘바깥’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불투명한 현실이다. 내가 이후와 바깥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깊은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포스트라는 말을 매체론으로 이해할 때, 나에게는 사적인 고민이 더 크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관객들 사이에 이야기가 꽃핀다면, 나에게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극장에 머무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가장 큰 기능은 영화를 통해 1인칭 세계의 ‘바깥’을 봄과 동시에, 영화가 끝난 ‘이후’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1. 


판데믹 이후 한국영화 펼쳐진 위기론에는 판데믹을 영화에 빗대었든가 하는 인상이 있다. 사람들은 판데믹을 통해 세계의 바깥을 기대하면서, 판데믹이 끝난 이후를 기대했던 것 같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영화의 위기를 판데믹에 책임지우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말년 작가의 모 짤처럼 “정말 다행이야! 망한 건 그냥 영화가 못 만들어서인 것뿐인데 판데믹 덕분에 그렇게 보이지 않게 됐잖아!”라고나 할까. 박동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영화가 지금-여기를 잃어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따라 ‘이후’와 ‘바깥’을 추구하게 됐다는 말은 판데믹에 관한 인상과 어느 정도 비슷해 보인다. 우리에게 판데믹은 인상면에서 영화였지만 생활에서는 전쟁과도 같았다. 일단 판데믹이라는 말은 개인의 생활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전시의 계엄령에 비견될 만하다. 한편으로, 판데믹은 바깥과 이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이는 아마 판데믹이 우리의 삶에 출구를 없애버리면서, 모든 게 끝나면 무언가 달라져 있으리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끝날 일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판데믹은 일종의 예비 행복단계였다. 


그렇지만 현 상황에서 바라본 판데믹 이후는 신혼부부의 삶보다 취업준비생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판데믹 이후를 ‘행복’이거나 그게 보장된 단계로 이해했다. 이를 따라 한국영화가 부활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현 상황은 일종의 예측 실패이거나 기대를 엇나간 게 된다. 한국영화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한국영화는 “조금만 더 부진해 있을게요.”라고 말해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이후’는 한국영화의 필연적인 회복을 뜻했고, 이를 따라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지속되는 상황은 ‘예비’가 아닌 ‘준비’로 인식됐다. 한국영화가 처한 상황은 취업준비생과도 같다는 소리다. 한국영화는 언젠가 활기를 되찾으리라는 점이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지금-여기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취업준비생들이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듯이 한국영화는 무엇을 발전동력 삼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 궁금해하듯이, 한국영화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헌데 정말 그럴까? 한국영화는 꼭 무언가를 실천함으로써 대중에게 뭔갈 보여주어야만 흥행할 수 있는 걸까? 위기라는 말은, 어쩌면 한국영화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세계를 가리키는 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 위기론에 대한 생각은 다소 개연성 없게 느껴진다. 의도적으로 위기를 조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냥의 시간>의 청년들처럼 한국영화가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런 위기를 탈출하는 일은 무엇을 염두에 두는지가 궁금하다. 한때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듯 한국을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정작 한국의 ‘바깥’에서 무엇을 할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부재한 현실이 연상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영화의 위기론은 어서 빨리 위기를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정작 그런 위기의 ‘바깥’에서 무엇을 할지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위기란 무엇일까? 관객이 들지 않아서 투자가 위축되고 이를 토대로 한국영화 자체가 제작되지 않는 것? 이런 의견은 사실 인구론의 맥락에 올라탄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율이 왜 낮을지를 걱정하면서 출산율을 반등시켜야 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여기에는 ‘빠져나오는 것’이 목표로 제시될 뿐 구체적인 수치나 지점이 제시되어있진 않다. 그냥 나라가 잘 굴러가려면 이 정도의 인구 재생산이 이뤄져야 한다고만 말할 뿐. 즉, 부진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목표이며 어떠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게 여기에서 기준점이 되고 있다. 


2. 


그렇다면 한국영화 위기론은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가? 한국영화 위기론은 기본적으로 한국영화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 위기론은 무언가에 대항하는 성격이 아니며, 맞서 싸우는 일 따위는 하고 있지 않다. 부진의 상태에서 벗어나자고 말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여기에 특정한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출구전략을 위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옳지만, 한국영화에서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이들을 ‘예비’가 아닌 ‘준비’단계에 놓는다.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이 현실에서 한국영화는 ‘위기’라는 말을 구체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판데믹 이후는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행복을 마주하지 못했고, 이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은 자연스레 불행에 위치지어졌다. 행복의 반대편에는 불행이 있다고 말하면서,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말을 위기라는 말로 곧바로 받아들여 버렸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여기 없이 ‘어디’를 논할 수는 없기 마련이다. 


한국영화 위기론을 말하려면 한국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위기가 단순한 추상으로만 남을 때, ‘위기’는 시대상으로만 남을 뿐 구체적인 탈출구나 전략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물론 시대상으로만 남는 일에도 장점은 있다. 판데믹 이후를 한국영화의 위기로 위치지으면 이후에는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온 한국영화라는 제목을 거머쥘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좀 멋있고, 위기라는 표현으로 자긍심이 좀 높아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서사는 완성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의 서사를 위해 지금의 위기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말한다면 그런 일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쉽게 말해 한국영화 위기론에는 딱히 방향성이란 게 없다. 한국영화가 위기라는 사실을 잘 알겠고, 기대만큼 잘 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영화는 무엇이고, 위기는 또 무엇인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게 위기일 수도 있겠지만, 돈을 못 벌어서 방구석에 박혀있는 것도 위기다.


문득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배우들을 떠올려본다. 사람들은 두 주연배우보다 조연배우인 이병헌의 연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술한 대로 영화에서 이병헌은 두 주연배우보다는 꽤나 평면적이다. 그러니 이병헌이 두 배우보다 더 부각되는 일은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다. 이병헌이 연기를 잘해서였을 수도 있고, 조연이 주연을 돋보이게 해줬다는 점에서 약방의 감초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이병헌이 바깥이나 이후의 영향력 안에 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안사람이면서 바깥사람이기도 한 모호한 입장이다. 이른바 이병헌은 1인칭 시점도 3인칭 시점도 아니며, 사람을 죽여 집에 은폐한 시점에서부터 이미 이후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주연배우 2인방은 부부로서 함께 꾸려나갈 미래가 있지만, 이병헌에게는 아파트가 아니면 갈 곳도 없고, 사태가 회복되어도 갈 곳은 감옥 말곤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병헌에게 위기란 황궁아파트 그 자체였다. 아파트의 바깥이 모두 사라져버린 상황은, 아파트 자체를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 보이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후’ 로 나서지 않는 바로 이 장소가 삶의 유일한 장소가 된다. 


3. 


한국영화 위기론은 ‘겁쟁이들의 쉼터’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위기론은 문제를 타파하기 위한 현상파악이기보다는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문제의식에 더 가까웠다.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말을 꺼내는 건 ‘위기’를 감지하는 일에 우선하지 않았다. 즉, 이미 닥쳐온 현실에서는 암묵적으로 공유하던 일을 겉으로 꺼내는 일이야말로 용기있는 행동이 된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용기 있는 소수의 발언이 세상을 바꾼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소신 발언은 피어리뷰를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낳는다. 피어리뷰를 거치지 않는 논문에 정합성이나 윤리가 부재하듯, 긴급함에 호소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우리가 바라보는 문제가 보다 선험적인 것으로 착각하게끔 한다. 가령 한국영화 위기론을 문제로써 제기하는 일은 원래부터 있던 문제들이 드러나는 과정으로써 풀이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고마워 판데믹아! 네 덕분에 한국영화에 위기가 왔어! 문제를 돌아볼 기회를 주다니 정말 고맙다. (…)”라고 말하면서 위기론을 꺼낸다. 판데믹을 하나의 문턱으로 삼는 것이다. 


판데믹 이후 촉발된 한국영화 위기론은 크게 보았을 때 환경변화를 문제 삼는다. 판데믹 기간에 벌어진 OTT로의 관객 이동이 다시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있고, 판데믹 기간에 부진했던 영화 제작 환경이 영화 퀄리티를 낮췄다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판데믹론은 한국영화의 위기가 한국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판데믹이라는 기행적 시기에서 귀인했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위기론은 한국영화이기보다는 판데믹 이후에 대한 위기론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대충 한국영화 위기론으로 서술하는 일은 한국영화랑 위기론을 같이 말하고 싶을 뿐인 것처럼 보인다. 즉, 한국영화 위기론은 영화 매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포함되거나 희석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 시네마라고 말하는 이후의 문제가 한국영화에 결합할 때, 여기에 있는 위기론은 한국영화랑은 하등 상관없는 게 된다. 왜냐하면 매체의 관점으로 바라본 위기론은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해두었던 한국영화 위기론의 선험성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문제에 대한 인식에 선험성을 부여하는 일은, 이를 우리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 여기게 한다. 세계 일반에 관한 보편타당한 논제가 됨으로써 이제 위기론은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문제에 대한 인식은 위기가 과연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논할 뿐이라는 점에서 미래가 아니라 기원에 대한 탐구가 되기 마련이다. 즉, 위기론이라는 말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보다 부모와 고향에 대한 탐구에 더 몰두한다. 한국영화 위기론에 대해 고찰하는 글에서는 흔히 한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서술이 보이곤 하는데, 이런 서술들이 보여주려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깊은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영화 속의 공간과 장소가 한국이기에 이를 한국영화로 인식하는 것일까? 단순히 한국영화의 국적성에 대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한국영화 위기론에서 매체론을 분리해내면 여기엔 ‘한국 위기론’이라는 간명한 결과가 남는다. 굳이 판데믹 이후에 한국영화 위기론을 꺼내야 한다면, 매체론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4.


웹툰을 원작으로 한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한국영화에서도 한국은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만화 캐릭터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만큼이나 한국영화에서 한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속성에 가까워졌다. 미디어가 양산하는 뉴욕, 파리, 도쿄처럼 서울이나 다른 장소들에선 한국적인 특성들이 자주 등장하게 됐다. 예를 들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를 하나의 거주구로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가 캐릭터화된 결과다. 주연합인 미국 사회가 항상 지도에 구역을 묘사하는 것처럼, 한국사회에는 아저씨아줌마 그리고 초록소주병 그 외에 몇 가지 오브제가 등장하곤 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와 같은 한국적인 요인들이 구성하는 한국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한국영화의 공간들을 떠올릴 때, 그곳에 먼저 연상되는 건 사람일까 아니면 공간일까? <수리남>에서 히트했던 문장인 “식사는 잡쉈어?”는 수리남이라는 이국땅을 한순간에 한국적인 분위기로 바꿔놓는다. 다른 한편 완전한 판타지 세계처럼 보여야 할 <오징어 게임>에서는 의도적으로 한국을 묘사하는 장소를 나열하지만, 여기서 한국을 완성하는 건 ‘깐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영화를 한국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로 바라보자. 이를 위해 한국영화 위기론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먼저 살펴보자. 판데믹 이후 한국영화 위기론은 영화 매체의 달라진 지형도를 근간에 둔다. 매체의 관점으로 바라본 위기론은 한국과 영화 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지시한다. 일단 푯값이 올랐다. 유통방식도 좀 바뀌었고 좀 안 된다 싶은 영화는 극장 상영과 동시에 VOD로 풀리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달라진 산업구조 안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판데믹 이후는 판데믹 이전에 의해 바라보아지고 있고, 재밌게도 이는 우리가 그토록 말하던 뉴노말의 관점을 악용한다.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은 그냥 없던 일로 해버리자는 식이 돼버렸고, 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리가 깐부라고 말했던 것, 한국영화 위기론은 판데믹 이전과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사이의 사람들에 관해서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있던 일은 무엇일까? <오징어게임>이 우리에게 말해준 건 ‘사이’의 관점이었다. 지금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들이 판데믹 기간에 주로 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영화 위기론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영화 위기론에는 사이에 대한 고찰이 없다. 한국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여기에는 한국이랑 영화에 대한 고민이 있을 뿐, 이 둘 사이에 한국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영화란 정확히 무엇일까? 이 물음이 바로 한국을 완성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한국영화 위기론에 부재한 건 한국영화의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한국영화 위기론에서 지적되어야 할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는 한국이라는 장소가 어디이고 또 무엇인지 등을 따지는 문제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작진이든 관객이든, 이 위기론에서는 사람에 대한 고찰이 없다. 한국을 구성하는 게 한국사람이라면, 한국영화도 사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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