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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0. 2023

그들에게 짐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


요나스: 예술이 정말로 사회에 짐이 되나요? / 브래키지: 내가 이후에 사랑하게 된 모든 예술이, 시작할 때에는 현실적으로 내게 짐이었다고 말해야겠네요. 사회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난 공통의 시각으로 되돌아갑니다. (…) 개인적 위기에서 비롯된 영화들은 새롭고 개인적인 방식의 보기로 도약해요. (…) “그들에게 짐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대학 같은 기관은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개인적 시각을 파괴해야 한다고 가정합니다.[1]


한때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다.”라는 말이 밈으로 돌았다. 이 둘은 언뜻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라는 수식을 붙일 때 이해의 범주에 들어온다. 가령 법의 기능이 배제가 아니라 보호라는 점에서, 악법은 그 울타리의 범주가 잘못 설계되었지만 그럼에도 무법과 문명을 가로질러 있다. 악법과 법은 경계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영토를 구성한다. 만약 우리가 악법에 군림하려 든다면 법 또한 무력화되고야 말 것이고, 이는 결국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즉, 악법은 법의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소외된 법에 가까우므로 이를 개발하고 고침이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악법도 지켜야 마땅한 건 그 때문이다. 악법을 고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선제타격과 직접공격이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후폭풍에서는 영토의 재구획에 따른 붕괴와 사상이 벌어진다. 


위선의 경우는 그와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이준익 감독이 모 인터뷰에서 말하듯, “평생을 위선으로 살았다면 결국 그건 선이 아닌가.”하는 의견이 있다. 의도야 어떻든 간에,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은 이가 있다면 그건 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선은 선의 ‘어쨌거나’ 판본이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따라 이러한 “어쨌거나”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말하는 “아무튼, 그럼에도”라는 표현의 범주에 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잔존의 상태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베르만에게 이미지란 ‘존재’하기 위해 존재를 벗어나야만 하며, 그는 이를 두고서 이미지의 잔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와 유사하게 위선은 선을 행하기 위해 선에서 벗어나는 형태의 ‘이탈’일지도 모른다. 선함이 정상적으로 행사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오직 위선만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시네필 문화에 관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원리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장의 경험이 무색해진 상황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은 무기력해졌다. 한국에서 시네필 문화는 본디 극장의 문화였으므로, 운동권의 현장성과 극장의 물리적 성질이 파훼된 오늘날에 시네필이라는 말은 ‘엄밀히’ 보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영화애호가라는 의미에서 재정의하는 일은 잠시 내려놓자. 우리가 궁금한 건 극장 문화와 영화 활동의 교차로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영화를 통해 활동하는 일도, 극장에서 어떠한 문화를 꾸려가는 일도 모두 힘들어진 상황에서 이 둘이 교차하는 지점이 있는 걸까. 한국의 영화 체인은 극장을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꾸리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문화란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영화 문화다. 


과거에 시네필이 극장을 통해 서로와 만나고 교류하는 존재였다면, 여기서 만남과 교류의 장소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영화의 경험이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만날 수 있는 것으로도 좋다. 네트의 발달은 연결의 방식과 관계를 발전시켰고, 이를 따라 우리는 방구석에서 ‘길을 잃은 영화’들을 마주한다. 그러니까 과거에 시네필 문화가 길을 잃은 이들이 영화를 마주하는 일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우리가 길을 잃은 영화를 마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가 돋는 건 이러한 마주침의 과정이다. 영화를 마주하는 방식이 개인적이라면, 이런 영화에서 문화가 만들어지는 건 브래키지의 말마따나 ‘개인적 위기’를 암시하는 게 아닐까. 과거 한국의 시네필 문화가 운동권과 맺었던 관계는 사회적 위기와 그에 반향이었음을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오늘날 영화 공동체의 파멸은 필연적이다. 


사회적 위기가 사라졌다는 게 아니다. 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현실에 스며들었고 이를 따라 ‘네트’는 형성된다. 이 네트에서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반대로 어디로도 갈 수 없기도 하다. 과거에는 영화를 보려면 극장에 가면 됐지만 오늘날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모든 만남은 우연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런 우연을 필연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시네필 사이에서 리스트에 대한 애호와 강박이 드러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우연을 생략하고서 곧바로 필연으로 점프하려 든다. 즉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남기려 든다. 네트가 제공하는 환경도 그렇다. 네트와 알고리즘은 선형적으로 보이고 또 그래서 이용자가 따라갈 수 있어 보이지만, 직관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사유와 경험의 가능성을 빼앗는다. 


리스트는 직관을 대체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리스트는 직관=결론에 선행한다. 그렇다면 리스트는 선험적인가? 칸트주의자가 좋아할 만한 말이겠지만 어쨌거나 리스트는 유명한 평론가들에 의해 ‘결정적’인 참으로 인식되곤 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이들 영화는 좋을 수밖에 없노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런 리스트가 시네필 문화를 분열시키노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라면 리스트도 결국 문화인 것이다. 확실히 리스트는 언령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시각이 파괴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시네필’이라는 말을 복원하려면 이러한 언령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획득한 자유를 헌납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한번 무너졌던 곳에서 출발한다는 맥락으로 이를 받아들여 보자. 


극장 문화가 없는 상황에서 극장과 문화를 끌어내려면, 우리는 위선을 떨어야만 한다. 설사 그게 구역질 나는 사악함처럼 보인다 한들 결과적으로 그게 누군가에 도움이 된다면, 위선도 선이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는 시네필들에 꾸려지는 게 아니라 되려 시네필의 가치 창출을 위해 요구된다. 개인적 위기를 겪는 이 시네필들이 세상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고, 존재의 위기와 소중함을 잃고 있다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문화와 공동체는 형성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환멸해마지 않는 것들에 전적으로 투신해야 하고 또 환대해야만 한다. 심지어는 스노비즘과도 결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몇몇 매체에서는 밀레니엄 시네필 문화를 스노비즘의 맥락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잉여 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이 스노비즘 시네필들조차, 개인적 시각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존립의 근거가 유동할 때 불안감을 느끼는 부류에는 단지 영화만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된다. ‘어디’라는 지리학이 지정학적 현상으로 뒤바뀐 지금, 시네필은 더는 영화를 찾는 존재가 아니다. 영화를 마주하면서 그들 간의 지정학에 영향을 받을 뿐인 존재다. 영화가 매체 특정성을 통해 자기를 합리화하려 들 때 이들 시네필은 영화를 통해 자기 존재를 특정하려 들며, 영화에 의해 말해지는 자신을 두고서 존재를 합리화한다. 즉 이들은 영화를 말함으로써 자신이 말해질 수 있다고 믿으며, 이는 곧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를 말하는” 구도이다. 이때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허세나 악용이라고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바라볼 수 없게 된, 우회의 감정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는 마치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만 말하는 영화 비평의 현실과도 맞닿아있으니 말이다.  


영화에 대해서만 말하는 영화 비평이 꼭 나쁘다고만 할 건 아니다. 이는 개인을 위해 개인을 먼저 희생해야 한다는 일만큼이나 자조적인 일이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영화는 목록 안에 뭉탱이로 엮여있어야만 한다는 이 주장이 영화 활동과 시네필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시네필을 위해 문화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문화에 봉사하는 시네필이 여기에 있다. 다른 한편 영화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아니라, 활동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영화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리스트는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록에 오른 영화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간접호명한다. 그렇다면 다시금, 이것들은 악한가? 아니다. 관계는 지속되어야만 한다.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무언가에서 고립되는 일을 자청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유통 방식이 어떠한 제도 안에 소속되어 있는지 여부를 따져 묻는 일은 잠시 제쳐두자. 중요한 것은 네트 덕분에 우리가 그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의 발굴이 쓰레기 매립장에 놓인 필름릴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발굴은 네트의 망적 교류 안에서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융기에 비견된다. 영화 한 편에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이 줄었다 한들,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에 꼭 봐야 할 영상” 같은 제목의 유튜브 영상은 영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늘린다. 그리고 영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개인적 시각이 사라져갈수록 오히려 영화에 대한 공동체 의식이 발현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네필은,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서 단지 어떤 세계로 도피할 뿐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1]요나스 메카스, 『요나스 메카스와의 대화』, 이여로 역, (서울: 미디어버스, 2023)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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