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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0. 2023

구성을 넘어 존재하기, 혹은 로컬의 가치

아리 애스터가 참수에 관심이 깊은 것엔 아무런 영화적 이유도 없다. 아리 애스터는 그냥 참수가 좋다고 말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언제 나올지 생각하면서 보다가, 문득 보의 어머니가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됐다는 점을 알아챘다. 보는 어머니가 샹들리에에 깔려 머리가 박살 났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린다. 이윽고 보의 여정이 시작되고, 영화는 초현실주의에 빠져들며 보와 어머니의 관계를 한편의 전위극으로 표현한다. 그는 동료를 만나거나, 극단에 참여하기도 하며, 적대자와 협력인을 각각 만나 끝내 이야기의 종합이 이루어지는 최종장에 도달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이 모든 일이 어머니의 시험이었다는 점을 고지하고, 보의 여정을 단순한 초현실에서 신화적 여정으로 승격시킨다. 신화의 영웅에게 주어지는 과업처럼 보는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보의 여정이 어머니를 향했다면, 목이 잘린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가 소위 단체의 수뇌부를 ‘머리(Head)’라고 부르는 점에서 착안하여 ‘지휘능력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다. 지휘능력을 상실한 수뇌부는 사건에 대한 인식을 종합할 수 없으며 이를 따라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다. 이를 토대로 신경망은 와해되고 조직의 말단 근육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데, 경련하거나 또는 본체를 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아마도 후자가 아리 애스터의 생각에 더 가깝다. 머리의 상실이 몸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보단, 인식의 종합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 말이다. 그렇게 보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분열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가 군데군데 조각나 있고 이를 관객이 추리해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정신분열자가 말하는 것 마냥 여기저기 논리의 형태와 정합성이 조각나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실종을 두고서 사망이라고 표현하지 않듯, 연결이 수복되지 않은 상태를 두고서 분열로 보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껄끄럽다. 그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건 “종합할 수 없음=분열되어 있음”이라는 등치이다. 우리의 자아가 정신과 신체의 일치라고 가정할 때, 다양한 감각을 종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컬어 ‘죽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아리 애스터가 극의 마지막에 원형극장을 통해 보여주듯 이 영화는 관객에 의해 보여진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고, 이를 따라 보의 자아는 시종일관 관찰됨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보’를 성립시키는 건 관찰자의 존재이며, 이는 곧 관객이 없을 때 아무것도 아닐 뿐인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관객이 없다면 보는 단순한 정신분열증으로만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형식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배우가 됐다. 


이러한 점으로 영화에 관해 서술하는 건 영화를 벗어나거나 초과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반대편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개인의 삶은 “자신을 바라봐주는 누군가에 의해 종합된다”고. 자아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분열되어 있고 이는 죽어도 봉합되지 않는다. 개인이 지닌 삶의 몇몇 모순이 이를 증명한다. 신체는 독립적으로는 불합리하거나 괴상하지만 그것이 신체에 종합될 때 별도의 기능과 쓸모를 부여받는 경우가 잦다. 가령 인간의 눈이 오징어보다 더 뒤떨어지는 구조라는 이야기가 그렇다. 인간의 눈은 독립적으로 볼 때 괴상하지만 이것이 뇌와 같은 기관에 종합될 때 비로소 인간 신체의 일부가 된다. 즉, 개인은 오히려 분열된 상태로 있기에 다양체가 될 수 있으며 이런 프리즘 구조는 세상으로부터 빛을 받을 때 그가 다양한 색을 발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같은 영화는 방치형 RPG처럼 관객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부류라기보다, 분열의 상태로 어떠한 종합을 향해 횡단하는 일을 묘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열의 형식을 불안의 감정과 연결하는 일은, 단순히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조에 벗어나기보다 불안 자체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과 분열 자체가 표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둘 간에 찾은 합의점처럼 보인다. 분열되었기 때문에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것들은 이미 그런 환경을 토대로 살아왔기에 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분열이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런 조건 안에서만 성립하는 삶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같은 영화를 모순으로 설명한다. 이런 영화는 모순을 제조하려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모순에서 제조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영화에서 자주와 로컬, 수렴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제작 판에 속해 있지 않기에 영화를 제작하는 환경과 일들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영화들이 특정한 강령이나 이론을 지향하는 일이 ‘공격’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외적 교류가 없는 영화들에서 의문의 교차점이 발견되는 일은 흥미롭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황은 꽤 흥미롭고,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는 몇몇 사례를 떠올려보자. 어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만으로 흥미롭다”는 평가를 하곤 한다. 이런 평가에서 ‘본다는 것’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일에 우선하며, 이는 영화가 하나의 시각예술이면서 정해진 형식을 갖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가까이서 볼 땐 의미 없어 보이거나 이해되지 않지만, 멀리서 볼 땐 특정한 양식과 구도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분열과 불안의 관계, 또는 영화 만들기의 구도가 정확히 그렇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것들은 형식과 체계 안에서 하나의 모순으로써 공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전혀 관계없고 교류가 없는 것들끼리 특정한 목표를 향해가는 듯한 면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공격’이라기보단 ‘자주’나 ‘로컬’에 더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를 토대로 말하자면 영화는 꼭 특정한 목적의식을 갖고서,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이기보단 현상으로 촉발되는 여러 결과들을 관측하는 일에 가깝다. 왜냐하면 오히려 멀리 떨어져야만 전체적인 형상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오늘날 포스트 매체 조건하의 시네마가 전통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전통에 의해 설명되는 영화가 아니라 전통이 영화에 의해 더욱 확장되는 오늘날 ‘로컬’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조직되어야 할 게 아니다. 


시네마는 전통적인 예술의 연장이나 종합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에 시네마는 사라져가는 전통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도구가 됐다. 전통은 영화라는 형식 안에서만 관측됐고 이는 되려 영화에 보존의 역할을 맡겼다. 영화가 여러 매체를 흡수한 만큼 반대로 희미해져 가는 정체성을 영화 안에서 관측할 수 있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본 로컬은 세계에 대한 자의식을 꾸리기보다 개개인에 대한 의식이 세계에 대한 자의식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 안에서 그런 세계 바깥을 떠올릴 수 없는 채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상태에 집중하게끔 해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OTT 영화와 극장 영화를 양립시키는 체제에 관해 묻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떠한 체제가 실존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는 방법이 발생했을 뿐이다. 


극장에서 OTT가 갈라져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OTT는 디지털 환경에서 자생했고 그렇기에 극장과 비교될 수 없다. 오히려 극장은 영화가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꾸릴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되었고, 이를 따라 극장에는 로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블록버스터 영화와 아트하우스 영화를 같은 선에서 바라보는 일은, 괴상한 영화 취향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이들을 같은 세계에 두는 동시대적 인식만을 말해줄 뿐이다. 즉, 우리가 영화에서 로컬이라는 표현을 통해 논해야 할 건 문제를 넘어선 문제의식이다. 사실이 현실에 우선하는 인터넷 사회에서 데이터는 내포한 값들의 총량을 넘어선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사회의 영화는 내포한 이미지의 총량을 넘어서며, 이는 DVD CD 리핑과 같은 사례에서 매체의 포함 용량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의미는 영화 안에서 지리적 정보와 좌표를 두고서 데이터의 총량 및 합계를 유도하지 않는다. 내포라는 말은 이제 공통으로 지향해야 할 바깥이 없다는 말을 가리킨다. 영화는 특정한 의미와 대의를 향해가기보단, 공통된 의식이 상실된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관객들에게 종합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특정한 유전자만을 갖고서 전혀 다른 특성을 보이는 밈 이미지처럼,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각각의 로컬이다. 이 로컬은 유기체 안에 유전자의 형태로 깃들어 있고, 이렇게 자생하는 것들을 종합해 몸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영화는 구성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다시금 <보 이즈 어프레이드>로 돌아가 보자. 그런데 존재한다는 건 정말로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함은 모순덩어리기에, 작동할 리 없는데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의 엄마는 보를 두고서 스스로 제대로 된 결정 하나 내린 적 없다고 말한다. 보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상황을 종합하는 능력이 없는 걸까. 이 영화는 보의 여행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횡단의 일종처럼 보인다. 보의 현실인식 능력은 조각나있고 이로 인해 영화는 초(과)현실과 비(교)현실을 넘나든다. 자의식이 충만해서 자아를 수렴시키는 현실이 있는 한편, 바깥을 가정함에 따라 반발하는 현실이 있다. 이런 현실들 사이에서 보는 여러 인물, 혹은 ‘이미지’를 마주하는데 보는 계속해서 그들의 예측을 벗어남으로써 자신이 이미지의 총량을 벗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보는 마치 하나의 밈처럼 보인다. 보는 전혀 다른 것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혹은 변형되면서도 줄곧 같은 형식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영화가 자생하는 방법이자, 로컬에 관한 묘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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