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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3. 2023

고립을 출발점 삼아

장소의 정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졸업논문을 작성하며 했던 가장 큰 실수가 그랬다. 단순히 비-장소를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장소’를 언급했었다. 이는 학문적인 엄밀함을 갖추지 못했고 논문의 완성도를 낮추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생각을 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장소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모르겠다. 인문학적인 의미에서의 장소를 정의하는 일을 제쳐놓더라도, 영화와 장소를 같이 고려하는 일은 너무 다양한 사례를 가리킨다. 가령 영화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감금’은 푸코의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폭력이 되기도 했고, 들뢰즈의 맥락에서는 의미의 발생 장치로 이해되었다. 이 경우 ‘장소’라는 말은 배치의 양상, 혹은 들뢰즈 다양체를 가리키는 게 된다. 소위 말하는 장치와 디스포지티브의 맥락인데, 이 경우 장소는 배치의 양상들 ‘사이’를 가리키는 게 된다. 특정한 지리적 좌표를 지닌 게 아니라 어떠한 것들의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는 뜻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장소는 사물들 자체다. 또한 그런 사물들 중 하나가 인간이며, 이러한 상태를 ‘존재자’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관한 인식을 ‘존재’로 칭한다. 즉, 하이데거에게 장소는 ‘놓임’과 연결되며 인간은 시간을 인식함으로써 ‘존재’한다. 말하자면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존재자에 우선하지 않으며 존재자에 의해 존재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도 이와 유사하게 고찰해볼 수 있다. 영화를 보는 상태를 두고서 관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본다는 것 이전’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관객이라는 표현이 ‘극장’이라는 공간에 진입함으로써 성립한다고 인식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므로 사실상 극장이 없을 때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극장에서 관객이 도출된다는 말은 극장의 이전에 영화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오히려 영화적인 경험에 의해 관객이라는 상태가 도출된다고 보는 게 옳다. 


이를따라 ‘본다는 것’ 이전은 가장 원초적인 시각의 상태, 우리가 ‘영화적’이라고 말하는 몇몇 순간들에 의해 발생되는 배치의 양상으로 이해된다. 관객이라는 주체의 탄생은 극장을 경험하면서가 아니라 영화적이라는 순간에 의해 촉발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영화적 순간은 일종의 충돌로서 ‘영화에 소속될 수 없는 우리와 영화의 위치를 강조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러한 “충돌로 인해 공동체의 정체성이 선명해진다”[1]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세계에 내쳐짐으로써 세계-내-존재가 되는데, 여기서 ‘내쳐짐’은 존재가 세계와 ‘충돌’하는 일에 등치될 수 있다. 요컨대 관객=존재는 영화=존재자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고 볼 때 여기에는 비로소 배치의 양상으로서의 장소가 드러나게 된다. 관객은 영화가 촉발하는 영화적 순간을 겪음으로써 자신이 ‘장소’임을 인식한다고 말이다. 이처럼 충돌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낳으며 이때 공간은 공동체와 그 안의 나를 발현한다.


장소란, 주체와 세계를 따로 구분 짓지 않는 세계-내-존재를 가리킨다. 이를 따라 관객 주체가 개인이기보다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할 이유는 관객 주체가 위치와 충돌에 따라 변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특정한 좌표가 아니라 어떠한 구획으로만 발견되며 이는 곧 영화와 개인 사이의 불가분함을 뜻한다. 우리가 관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곳에는 장소가 있으며, 이는 영화를 보는 경험이 단지 개인의 것으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와 개인의 ‘사이’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적 순간은 개인에게 시간성에 대한 새로운 지표를 세우며, 이때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순간에서 멀어진다. 이러한 내쳐짐의 경험이 바로 영화에 소속되지 않는 자신을 구성하며, 이는 ‘관객’이라는 말이 영화에 이끌리는 집단이 아니라, 영화에 의해 끌려진 반향적인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을 설명한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영화와 플라톤의 우화를 명징히 이해하게 된다. 


영화에서 장치 이론은 플라톤의 우화를 따라 설명되었다. 관객은 스크린에 비쳐진 세계만을 볼 수 있고, 이러한 그림자 세계는 이들이 진정으로 보아야 할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요지는 영화가 관객을 속이는 허구이자 기계적 이데올로기 장치의 산물이라는 점. 그러나 충돌에 의해 형성되는 관객 주체에게 영화는 진짜 세계이거나 이데올로기 전파 기구가 아니다. 이들에게 영화는 세계가 배치의 구조물이라는 점을 말해줌으로써 ‘나’와 세계 간의 보이지 않는 연결과 유대에 대해 알게 해주는 수단에 가깝다. 이른바 영화는 개인에게 세계를 열어주며 이때의 개인은 충만함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다. 바로 이 충만함의 감정이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유대, 공동체의 감정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충돌은 영화적 순간이 ‘영화’에 대한 반향임을 말해주면서,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연결’은 ‘겪고 있음’에 대한 감정이다. 


이는 영화와 개인을 설명하는 일이 왜 영화=나에 빗대어질 수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영화가 개인을 세계에 내침으로써 주체와 세계를 연결한다면, 이때의 연결이 충만하다함은 마치 신학에 가까운 무언가일 것이다. 최초에 빛이 있었고 이후 세계가 탄생했다는 말은 마치 “최초에 영화적 순간이 있었고, 이후 시네필이 탄생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삼위일체는 스크린과 관객, 카메라라는 세 개의 구성요인에 유비되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신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론적인 설명에서 신학은 개인과 세계를 연결하는 믿음이자 연결일 것이다. 그러나 믿기 때문에 연결되는 게 아니라 연결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세계에서 내쳐지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 내쳐졌기에 영화가 되는 것이다. 본다는 것에 관한 문제는, 적어도 영화를 보고 난 후로서의 관객 집단을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것들의 사이에서, 자신이 본 게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없는 영화임이 파악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관객이 된다. 


서로 다른 것들, 영화와 개인의 관계는 간극을 유지하면서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이’이다. 그러므로 영화란 세계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존재자에 의해 존재가 드러난다면 세계는 영화와 영화적 순간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들을 생성하거나 변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와 관객은 극장의 경험이기보다 “영화적 경험에 의해, 둘 사이의 배치가 드러남에 따른 관계의 형성”에 가깝다. 이때 핵심은 배치와 동시에 형성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관객은 주체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주체를 어떠한 상태로 분류한다는 점에서 관객 개인의 고유성을 해치지 않는다. 영화적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을 수행해야 한다는 전략적 설정이 아닌, 자신의 위치와 양상을 보완하는 형식으로 세계와의 간극을 채운다. 즉 배치가 유발하는 ‘사이’는 대상과 주체가 거리 두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었다는 의식을 가리킨다. 


이렇게 배치의 양상들 간에 드러나는 사이가 장소로 지칭되는 일은, 그러한 장소가 관계와 연결 자체가 아닌 관계와 연결의 양상으로 개인을 재분류한다는 점에서 연대의 관점으로 풀이된다. 요약하자면 영화적 경험은 개인을 배치함으로써 영화와 개인 간의 관계를 드러내며, 이때 ‘사이’는 이들 간의 연결의 증표가 된다. 그러니 소위 말하는 시네필 문화가 어떠한 신학처럼 보이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첫 번째로 이들은 어떠한 영화적 순간을 범접한 후 달라진 자신을 고백한다. 이들에게 영화적 순간은 세상의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지만, 세계 안에서 재배치된 자신을 통해 뉴런의 연결회로를 재구성한다. 두 번째로 이들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두고서 사람들과 유대를 맺는다. 이들은 각자의 경험에 대해 고백하면서 같거나 다른 점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연결의 의식을 강조하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를 멀티버스의 교차축으로 삼는다. 


이는 영화에서 장소라는 말이 영화적 경험 이후에 자리한다는 점에서의 포스트로, 배치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의 거리두기로 이해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모든 영화는 영화적 경험에 선행하지 않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란 선험적이지 않다. 영화를 두고서 발견이나 재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오직 영화적 경험만이 영화를 세계에서 드러낼 수 있다. 이는 발견이 아니라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일 뿐이라서 항상 상대적이기만 할 뿐 무언가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즉, 이러한 경험에서 들어가고 나올 때 세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고, 또 실제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간이 변한 것도 아니기에 차이와 반복의 개념 또한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변하지 않음’은 고유성의 또 다른 표현이며, ‘사이’란 극복될 수 없음이 아니라 ‘겪고 있음’에 관한 소명이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그 무엇일 뿐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고귀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이란 무엇일까? 간극? 혹은 연결? 개인적으로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핀과 다이아몬드, 흑연의 차이처럼 ‘사이’란 분자의 간극을 유지하면서 연결되는 부류에 속한다. 배치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과 특성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러한 구조는 배치와 연결의 동시적인 상태로 소명된다는 점에서 ‘겪고 있음’에 대한 하나의 진단이 되어준다. 이들이 지닌 특성은 이러한 구조에 의해 감금된 게 아니므로 구조 자체가 이들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다. 반대로 이러한 특성을 유발하기 위해 배치와 연결을 의도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허나 장소는 특정한 지리적 좌표를 지닌 게 아니라 어떠한 배치의 사이에서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영화적 자아가 항상 고립에서 출발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를 파국의 순간에 의해 촉발되는 무언가로 보았듯이, 관객은 본다는 것 이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는 ‘사이’의 거리두기와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1] 마누엘 데란다, 『새로운 사회철학』, 김영범 역, (서울: 그린비, 2019)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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