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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30. 2023

쇼츠화된 영화와 관객 없는 영화


언젠가 유운성은 “홍상수와 라스 폰 트리에를 모두 좋아하는 건 굉장히 아스트랄한 취향”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어떤 문맥에서 나온 것일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다만, 확실한 건 취향이라는 단어를 일종의 대피소로 여기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고다르 영화를 보지도 않고서 고다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하는 감독 지망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에게 고다르는 영화적 정전 중 일부로서,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부류인 듯 보인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 등을 모조리 다 흩어보는 사람은 예전에 다 죽었고, 그냥 자기가 보던 영화나 줄곧 보는 사람의 존재는 더욱 늘었다. 과거에는 리스트가 취향을 인도했지만 오늘날엔 알고리즘이 취향을 대체한다. 다시 말해서 취향은 ‘재현’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에 가까워졌고, 이 안에서 고다르 영화는 영화사가 아니라 개인사의 일부일 뿐이다. 즉, 과거에 고다르 영화가 기계론적인 면에서 어떠한 완성으로 시네필을 인도했다면, 오늘날 고다르 영화는 코카콜라나 햄버거처럼 국적 불명의 기호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고다르 영화를 보지 않고서 고다르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실질상의 네이션을 자칭하는 것에 다름없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을 두고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관광객의 철학』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국민에 있어 국가=정치는 사유의 장소, 시민 사회=경제는 욕망의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즈마의 논의에서 ‘네이션’이란 사유와 욕망을 매개하는 상상력으로 봐도 무방한데, 위에서 말하는 취향이란 바로 그런 부류다. 오늘날 어떤 영화에 관해 말한다는 건 이를 통해 사유함도 아니고, 그 자체를 욕망하고자 함도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을 대체하는 상상력의 존재를 갈구하며, 이때 알고리즘은 영화사의 어떤 면을 소개하기보다 ‘자기를 대하는 문제’로써 다뤄진다. 즉 알고리즘으로서의 영화는 ‘상상가능성’이라는 면을 통해 현재에서 미래를 발굴하고자 하며, 여기서 ‘자기’는 그런 미래를 향해 나아가거나 결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결국 고다르 영화를 보지 않은 ‘나’와 고다르 영화를 싫어하는 ‘나’가 공존하는 건 “다소 이질적이거나 모순된 ‘취향’”임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상상력/장소인 ‘나’는 사유/욕망으로서의 영화를 결집하는 대피소이기 때문이다. 


“극장을 카타콤이 아니라 대피소로 이해하자”고 말했을 때 극장은 시뮬레이션의 일종이다. 카타콤이 세상이 망해버렸다는 점에서의 종말을 생각하고, 또 이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피소는 미래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러 든다는 점에서 무한한 ‘만약’을 가능케 한다. 말하자면 대피소는 ‘선 긋기의 불가능성’을 논하는 장소이며 여기서는 그 어떤 것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취급된다. 이때 취향을 존중한다는 말은 ‘선 긋기의 불가능성’을 논한다는 점에서 대피소와의 유사점이 있다. 취향에 대한 존중의 행위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서로와 거리를 두는 일에 불과한데, 반대로 취향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해는 서로와 거리를 두지 않음으로써 ‘선 긋기의 불가능성’에 몸을 의탁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선을 긋는 건 불가했다고 말하면서 취향을 구분 짓는 일을 포기해버리며,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대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란 세포벽이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하는데 세계가 곧 주변부일 뿐이라면 그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따라 우리는 본격적으로 벽을 치고 그 안에 들어가 대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취향을 대피소로 이해하는 건 자신을 세상에서 더 잘 구분 짓게 되는 일일뿐더러, 무한히 펼쳐진 가능성과의 단절을 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위 말하는 취향 존중의 사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에 대한 의도적인 편승에 가깝다. 일어날 확률이 높은 일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로 둔갑하고,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예측’의 범주에 들면서 과정이 생략된 무언가가 된다. 취향이 없다면 대피소를 두지 않는 것이고 대피소가 없다면 영화를 보는 과정 또한 없다. 이 점에서 시네필리아의 요건은 그러한 예측의 범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발달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아주 분명하게도 홍상수와 라스 폰 트리에를 한 자리에 두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 개념은 이 둘을 한 자리에 모아둔다는 의미에서의 배치에 더 많이 의존하기에 이 자체로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하다. 그러나 경험이 부재한 취향은 과정보다 결론이 더 빠른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이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묻기보다는, 그런 차이를 딱히 구분 짓지 않는 일에 관해 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결론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취향의 종말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삭제,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를 대피시킬 공간조차 없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후’에 왔단 말인가? 요컨대 우리가 묻고 싶은 건 그런 사람의 아스트랄한 취향이 아니라 영화들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일이 어쩌면 ‘자기’의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일이다. 홍상수와 라스 폰 트리에 둘 중 하나를 꼭 포기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둘 다 좋아한다면 그 사이에는 항상 자기가 있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고다르 영화를 보지 않고도 고다르에 관해 말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고다르에 의해 말해지지 않는 자신은 영화를 본 이후에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실 취향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건 자신을 무엇으로 말할 것인지가 아니다. 취향은 무엇에 의해 말해지지 않는 것, 영화를 자신의 외부로 인식하면서 그에 거리를 두어 내부로 대피하는 일을 가리킨다. 시네필리아는 영화를 보며 자기만의 취향을 기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취향으로 도피함으로써 영화들에서 거리를 둘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시네필리아는 어떠한 영화를 택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영화들에서 멀어지는 것일 뿐이고, 따라서 홍상수와 라스 폰 트리에는 충분히 양립가능하다. 


취향은 사유와 욕망을 매개하는 상상력, 정확하게는 상상하는 자기에 대응한다. 즉, ‘자기’란 상상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런 상상을 꾸며내는 자신을 가리키며 이를 따라 ‘취향’은 그런 상상을 꾸며내는 장소로서의 대피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취향이 네이션이라면 우리는 공통된 경험과 사건에 대한 인식을 따라 자신을 소속시킬 테다. “말해지지 않는 자신”이라는 문제가 취향의 내부로 대피하는 일이 연결되는 대목이 그렇다. 가능성으로부터의 단절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게 불가하다”는 점에서 기원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지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떠올리게 한다. 가령 데리다는 “공동체에 귀속되려는 욕망은 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비밀의 취향』)임을 말하는데, 이는 상상적 공동체가 상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점을 말해주면서도, 무언가에 대한 선호로 이해되는 ‘취향’은 사실 무언가를 선호할 수 없다는 ‘자기’를 전제한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취향은 항상 바깥이 아닌 내부를 가리키며,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그것은 극장의 ‘바깥’에 나와야만 비로소 결론에서 시작의 지점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표는 무언가에 대한 암시로만 작동한다는 점에서 취향에 대한 비유가 된다. 영화에서 지표성이 결론으로 제시되는 재현 이전의 흔적,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음’과 연결되는 대목을 고려하면 ‘자기를 대하는 문제’가 대피소를 요구하는 일은 명확하다. 뒤로 후진할 공간을 두지 않는다면 항상 결론에만 당착하면서 세계와 분리되는 일에 실패하고야 말 것이다. 이처럼 세계에 소속되는 일은 되려 세계를 마주하기 위해 세계와 멀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거리두기의 어떤 아이러니를 요구한다. 즉 서로와 멀어질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히토 슈타이얼의 말처럼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어나는 미래란 불가능”(<이것이 미래다>)하다면, 서로에 대한 진정한 교류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결론이란 되려 서로에 대한 진정한 교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는 단지 현재를 관리하는 정치의식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영화에서 결론은 자기를 관리하는 하나의 네이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자기이다. 자기를 대체하는 상상력은 언제나 하나여만 한다.


“나는 벽 밖으로 걸어나가 세계를 얻음과 동시에 자신을 잃는다.”(『사물과 비사물』)고 말하는 플루서의 논지를 되풀이하면 결국 영화에서 취향은 세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의식이 세계로 확장될 땐 그 안에 정작 자신이 양립하는 게 불가하다는 점에서, 세계와 자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취향이라는 단어는 세계도 자신도 아닌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그 양쪽 모두에서 대피해야만 온전한 자기가 드러난다. 그러니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을 상상해보자. 오히려 취향은 단순한 배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영화에서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숏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쇼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갈음된 현실에서 무엇보다 요구되는 질문이다. 단순히 짧은 영상이라서 순식간에 보고 넘어갈 수 있다기보다는 무언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이거나, 아니면 시작될 수 없는 수준의 찰나이기에 되려 쇼츠는 ‘자기’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그곳에는 분명 알고리즘이 있고 부재를 통해 현존을 창출한다. 그 점에서 오늘날 영화를 보는 일은 마치 그 자체로 쇼츠화, 또는 ‘이모지화’ 된 것만 같다.  


영화에서 쇼트를 보는 일과 유튜브 쇼츠를 보는 일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실 이들 간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쇼트와 쇼츠는 과거를 바탕으로 이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또한 개인을 계속해서 현재에 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둘은 알고리즘의 산물이라서 이전과 연결되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도착하는 곳은 다르다. 쇼트가 결국 영화의 어떤 결말에 다가선다면 쇼츠는 어떠한 결말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쇼트는 몽타주의 일환이지만 쇼츠는 단순한 알고리즘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마치 그림 그리는 AI가 이미지의 분해와 재조립에서 알고리즘을 구축의 동인으로 삼듯이, 유튜브 쇼츠에는 어떠한 인상들이 자잘하게 있을 뿐 이들을 받아들인 ‘나’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쇼츠를 보며 얻은 인상들은 너무 매끈하게 잘 봉합되어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한다. 이들은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효과적이지만, 반대로 내부가 비어있어서 산소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를 보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영화를 보러 간 자리에서 영화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영화의 자리는 대체 뭘까? 


혹자는 영화를 보는 일을 마치 유튜브 쇼츠를 보는 것 마냥 여긴다. 영화를 썸네일로 분류하면서 무엇이 자신의 취향에 어울릴지를 따져 묻는 일은 마치 영화를 윈도우 쇼핑하는 것과도 같다. 썸네일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영화의 ‘포스터’나 외견은 자신을 치장하는 도구가 된다. 즉 쇼츠 문화의 유행은 단편적인 인상을 단순한 순간에만 그치지 않고서, 외견에 두를만한 정도의 인상으로 확대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알고리즘의 유행은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과거의 연장선으로 풀이함으로써 영화와의 만남을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 의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알고리즘의 유행은 영화가 자신의 일부인 듯 여겨지게 했고, 이로 인해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을 대하는 문제처럼 여겨지게 됐다. 즉, 영화가 자기를 대하는 문제로 번역됨에 따라 ‘만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등장하는 게 바로 영화 없이 영화를 마주하는, 부재의 경험이다. 이들은 영화를 마치 MBTI처럼 자신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이때의 자신이란 영화가 실질적으로 나가야 할 장소인 ‘결론’을 대체하곤 한다. 


딱 하나만 더 보고 자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튜브 쇼츠에서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중간에 빠져나오는 일만 가능할 뿐.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를 보지 않아야만 영화를 자신을 설명하는 일로써 사용할 수 있다. 영화를 보았다는 말은 어떠한 결론을 마주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기에, 그러한 ‘끝’을 마주한 이들에게서 세계는 더는 연장될 수 없다. 즉 이들은 자신에게서 끝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취향이라는 말이 알고리즘으로 대체되는 이유가 ‘끝장’을 보고 싶지 않다는 심리와 연결되는 대목을 설명한다. 영화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영화가 끝나면 극장을 나서야만 한다. 왜냐하면 텅 빈 화면과 객석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것이 빠져나간 뒤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극장에 남은 관객이 유일한 희망이기에 영화에 어떠한 희망을 거는 이들은 오히려 영화를 보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다. 결론을 마주하는 일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기쁨에 우선하므로, 이야기 이전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영화는 오히려 단순한 인상으로만 남을 때 더 가치 있다. 추락의 속도는 충돌의 순간보다 더 빠르니 말이다. 


 과거의 봉합 이론이 정신분석학적인 치유의 맥락에서 기능했듯이 알고리즘은 ‘조우’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넣는다는 점에서 개인에게 면역력을 안겨다 준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썸네일을 직접 클릭한다는 점에서 선택의 권한을 주는 듯 보인다. 이 점에서 유튜브 쇼츠는 취향에 관한 인상들처럼 보이게 되고, 이런 인상들이 ‘나도 모르는 자신’을 구성한다고 여기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하지만 유튜브 쇼츠와 이를 전달하는 알고리즘이 결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마치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영화가 삶의 배경이 될 때, 즉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쇼트로만 존재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간들이 전체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인상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마찬가지로 취향으로만 자신을 구성하는 일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취향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말하기 위한 것일 뿐, 취향에 의해 말해지는 일 같은 게 있어서는 안 된다. 영화에서 쇼트가 영화 전체를 바꿔놓을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던 사례는 알고리즘에 부재하는 상상력으로 인해 거부된다. 


상상력은 벽이다. 즉, 상상력은 세계에서 우리를 밀어낸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세계 안에서 꿈꿀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나’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이 자신을 대체할 때 정작 꿈을 꾸는 일은 ‘나’가 아니라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만 온전히 활용될 뿐이다. 이는 세계 자체가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쇼트에서 세계를 발견했던 일을 잊게 한다. 쇼트가 더는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면, 세계 또한 우리에게 어떠한 인상을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만약 영화에서 ‘쇼트’라는 말이 쇼츠라는 말에 등치된면 영화는 관객 따윈 없어도 그만인 이미지 부산물이다.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인상들을 가지고서만 작업하는 영화의 지표성은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하려 하기보다 무언가에 의해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알고리즘 사회의 한 단편을 염두에 둔다. 그냥 관객 따윈 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고유하고 무결한 것으로 남는 영화 말이다. 잘 생각하면, 알고리즘은 관객이 개입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욱 무결한 무언가다. 이른바 순수 영화, 그런데 관객 없는 영화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들여다보지 않아도 성립하는 영화란 외부적 관찰 상태 없이 내부를 존속시키지 못하는 슈뢰딩거의 상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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