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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4. 2023

영화 문화에서 '젊음'의 의미


얼마 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학부 시절 알고 지낸 교수님을 찾아뵀고, 졸업논문을 전달해 드렸다. 사담으로 글을 시작하는 건 이 이야기가 바로 앞으로의 주제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에서 영상문화를 전공했지만 이 교수님과 만난 건 교양수업에서였고, 당연히 그는 나와 표면적인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는 과정에서, 글을 눈여겨본 그가 “처음에는 표절”인줄 알았다고 말하며 블로그를 잘 봤다고 말해주었다. 당시엔 칭찬을 받아서 좋았기보다는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글을 통해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리고 그런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궁금했던 것 같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나는 영화를 더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영화의 안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등을 탐구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신인 평론상에서 받았던 평인 “짜임새와 주제가 없지만 자유롭고 논지가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시네필 커뮤니티에서는 “왜 시네필은 젊은 20대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취지의 토픽이 돌았었다. 마테리알은 이를 두고서 결집과 투쟁으로 이해했고, 씨네21은 새로운 흐름과 ㄹ 세기로의 반향으로 이해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젊은 세대가 인터넷에 익숙하고, 또 그만큼 시공간적 여유가 있어서일 확률이 크지만. 여기서 긴히 성찰을 요하는 건 ‘젊은’이라는 수사로 포지셔닝하는 집단의 존재이다. 영화를 보는 일에서 ‘젊다’는 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교수님께서는 “정성일 세대에서는 문화원이었고, 자신들 세대에서는 비디오였는데, 요즘 세대는 어떤 경로로 영화를 접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은 영화를 접하는 경로에 따라 영화에 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경험을 전제한다. 즉, 이 맥락에서 ‘젊은’이라는 말은 비-극장 경험이 극장 경험에 우선하는 세대로써 극장을 이상하고 기이한 것으로 여기는 한 편의 단락이 담겨있다. 


잘 생각하면 극장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기도 하다. 집이라는 말만큼이나 극장이라는 말은 꽤 협소한 의미를 지녔다. 어쩌면 그래서 극장은 영화를 보는 이들을 특정하거나 대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극장은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여기게끔 하며, 이는 곧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극장을 영화를 ‘전시’하는 기능으로 위치 짓는다. 말하자면 극장은 “영화를 배치한 지리학적이고 좌표화된 공간”으로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극장의 개념을 “영화를 배치함에 동반하는 응시의 감각”으로 정의해본다면 어떨까. 이런 정의는 우리가 시네필 문화를 극장과 연결해 생각할 때 영화를 바라보았던 경험과 그에 따른 감각들을 논할 수 있게 해준다. 어디서 보았든, 혹은 어느 시대에서 보았든 간에 영화를 ‘배치’하는 것에 감정이 후발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영화의 이후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즉, 영화는 ‘극장’이라는 용어를 통해 포스트로 이행하는 것이다.


가령 예전에 나는 한국영화에 대해 “‘젊은’이라는 단어가 한국영화의 ‘제로연대’를 뜻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취지로 발언한 바 있다. 미래를 구상하려면 현재를 구분 짓는 일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젊다’라는 수사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따르자면 ‘젊은’ 시네필이라는 말은 시네필 문화를 영점으로 되돌리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본 사격 전에 시행하는 영점조준처럼, 25m는 100m와 200m 그리고 그 이상을 바라보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풀이된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수사를 지정함으로써 영화 문화의 기준을 계속해서 갱신하려 하고, 이를 통해 문화는 계속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마치 가재처럼 말이다. 허나 반대로 말해 이는 ‘젊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단, 무언가의 반대편에 놓인 것으로 이해함에 따라 자연스레 ‘미래’ 방향의 무언가가 창출되리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즉, 젊은 시네필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의지에 이끌리면서 미래 방향을 짊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젊은’이라는 수사를 ‘늙음’에 대비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프리오리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젊은 시네필’이라는 말에는 배치에 관한 모종의 발상이 숨어있다. ‘젊다’라는 것은 아직 환경과 성질이 유연해서 얼마든지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유동성을 뜻하며, 이는 그 자체로 변화를 뜻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같은 자리에 있을 때는 “왜”라는 물음이 나오게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배치는 우연일 수 있겠지만 같은 곳에 배치가 반복될 경우에는 이곳에 어떠한 역학이 자리하리라고 추론하는 게 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따라 영화 평론상에서 당선자들이 왓챠나 트위터, 동호회와 세미나 등의 모임을 언급하는 걸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들 모임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관심사를 서로 나누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제하더라도, 이들로 하여금 어떠한 ‘소속감’을 지니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특정한 ‘배치’의 경향 안에 놓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동시대성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적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더 나은 표현이 달리 떠오르진 않는다. 비평에서 동시대성이 시대에 대한 참여의식으로 풀이되는 한편, 문화적 맥락에서 동시대성은 이들이 같은 ‘장(Chapter)’에 있다는 감각이나 의식을 뜻한다. 시대(Era)처럼 어떠한 지질적 단위로 구분되기보단 이야기 전개의 단위라는 점에서 옹립되는 이 표현이 비평가의 동시대성을 결정하는 일은, 그들이 하여간에 ‘같은’ 곳을 바라봄을 말해준다. 또한 이렇게 생각하면 ‘젊은’이라는 표현에서 기성세대가 얻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끼워 맞출 수 있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장’을 통해 자기들의 세상을 영점 이전으로 돌려버렸을 것이다. 이후(Post)의 이야기는 젊은 세대에 의해 쓰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방향성이 같더라도 그 안에서 이야기의 주도권은 다를 수 있다고 보았다. 허나 이런 가정에서는 왓챠나 트위터가 ‘젊은’ 세대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점이 오류로 지적되고야 만다.


여기서는 다시금 극장이라는 가공의 용어를 들여와야 한다. 위에서 우리는 ‘극장’을 배치에 촉발하는 응시의 감각, 혹은 그 구성물로 정의했었다. 그리고 왓챠는 이런 의미에서 극장에 정확히 부합했다. 왓챠의 기능 중 유일무이하고 가장 대표적이었던 건 “모두가 영화에 관해 한마디씩 떠든다”는 것이었다. 논평을 나눈다는 점은 IMDB와 같은 영화 평점 템플릿과 동일했지만, 영화에 관해 한마디를 거드는 형식의 이 구조에서는 “모두가 같은 영화를 보았다”는 감각이 프리오리티로 자리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별점을 보려고 이곳에 모인 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들어와서 평을 쓴다는 점에서 이곳은 ‘젊은’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이 동시대성과 연결되는 방식은 세월호 사건 이후 세대가 사건을 영점화하는 것과 그리 무관하지 않다. 특정 재난을 두고서 그에 대한 부채감을 지적하는 사회 분석에서 우리는 배치를 통한 소속감의 획득이 아니라, 소속감이 배치를 명령하거나 이행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쉽게 말해 왓챠나 트위터는 젊은 비평가를 끌어모으는 힘이 있는 게 아니다. ‘젋다’라는 자의식이 어떠한 소속감을 갖게 하고, 이를 토대로 어딘가로 배치되어버리는 현상이 바로 젊은 시네필이다. 이때 왓챠나 트위터는 바로 그 ‘어딘가’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 ‘어딘가’가 수행하는 역할은 바로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극장’이다. 극장이라는 말이 포스트로의 이행을 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젊은 시네필을 ‘배치’하는 의식이란 극장의 이전이 없거나, 혹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에겐 미래 방향보다 과거 방향이 더 상상하기 어려운 가치이고 이를 따라 ‘젊은’이라는 수사는 ‘어리다’가 아닌, ‘프리오리티’를 뜻한다. 그리고 프리오리티는 무엇을 하든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잔여와 여분이 아니라 미완과 미분화의 성격에 더 가닿는다. 즉, 젊은 시네필에게 주류의 감각은 ‘생존자’이며 왓챠와 트위터는 폐허 위에서 기능하는 커뮤니티다. 


과거가 미래보다 가까울 때 사회적으로는 레트로가 부상한다. 같은 논리에서 이후로 남겨져 버린 시네필 사회는 ‘젊은’이라는 과거를 자신에게 더 가까이 두면서, 이들을 일종의 레트로처럼 여긴다. 언뜻 보면 ‘젊은’이라는 말은 미래를 암시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젊고 늙음은 1과 2 정도의 선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과거는 미래에 선행할 수 없음에 등치될 수밖에 없다. 즉, ‘미래’라는 말은 단순한 방향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젊은’이라는 수사는 그런 방향성을 위해 책정된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 이를 간략하게 축약해서 “젊은 시네필은 미래를 위해 발명되었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젊은 시네필은 관객의 실제 연령대를 가리키는 것이면서, 그와 동시에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펑크와 레트로마니아의 시대를 되풀이한다. 이들에게 미래는 ‘영년(Zero year)’이면서 ‘이후(post)’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미래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미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리를 옮겨 젊은 시네필과 영화에 대한 사랑의 경로, 혹은 유통에 관해 말해보자.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영화를 접하는 경로가 다르다는 말과 같지 않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를 접하는 주류 방식을 따라 ‘젊은’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건 영화에 대한 태도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립된 현상이다. 에티튜드, 또는 경건한 의식 같은 게 영화에 있다면, 젊은 시네필이라는 말은 이미 (자칭)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시네필들이 다음 세대에 붙이기에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극장이라는 표현으로 이후로 이행한다고 볼 때 영화는 선험적이지 않으며, 이를 따라 극장 이전의 시네필 또한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시네필은 어떠한 ‘극장’을 마주함으로써 탄생하며 그러므로 젊은 시네필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마주침의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젊은’이라는 수사는 롤랑 바르트의 수필인 “극장을 나오며”를 연상케 한다. 


바르트는 이 글에서 극장을 나오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신체와 정신 간의 허물어짐, 또는 거리두기의 현상에 대해 서술하는데. 핵심은 영화가 관객을 몰입시킨다면 극장을 나오는 순간은 그런 몰입이 와해됨에 따라 정신과 신체의 경계가 재배치된다는 점에 있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영토의 재구획이 벌어짐에 따라 주체는 다시금 ‘젊어’진다. 이 글에서 바르트가 극장을 나오는 순간을 ‘사유’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으로 규정했듯이, ‘젊은’ 시네필이라는 수사는 사유의 저변이 확대되기를 기대하며 붙여진 것일 수 있다. 또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영평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평론상에서는 젊은 시네필이 당선되는 일이 잦은데, 이런 선출이 의도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젊은’ 시네필을 선출함으로써 그들을 시네필 문화에 ‘배치’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경향이 발명되기를 고대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평론상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것이기보다는 새로운 물결에 대한 한 가지 기대감을 수행하는 것에 가깝다.


*


항상 무언가를 수집하는 형태로 글을 쓰곤 한다. 쓰레기를 하나둘 주워모아 하나의 작품을 건설하는 현대미술처럼, 가까이할 때 무상하지만 멀리서 볼 땐 그럴듯한 앙상블이 이루어지는 걸 좋아한다. 스스로의 글을 두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설명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일본식의 혼네와 다테마에가 아니라, 인식하는 것과 지배적인 현실이 같은 층위에서 공존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스스로를 “어른”으로 말할 때 어른의 기준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이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외부에서 관측되는 ‘나’는 어른이며 이를 따라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은 이상하게 여겨진다. 시네필 문화에도 그런 일이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몇몇 이들에게 “시네필이세요?”라고 물으면, 자신은 시네필이 아니라고 답하곤 한다. 시네필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을 제하더라도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겸손의 표식인 듯 보이지만, 시대착오성의 일종이다. 


시대착오성은 사전에서 “그 시대에 걸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것” 정도로 풀이된다. 이를 따르자면 자신을 어른이 아니라고 소개하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어른이라 부르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행색”을 하고 있다는 점일 테다. 마찬가지로 나는 시네필이라는 말을 두고서 벌어지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마음에서 귀인한다고 생각한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시네필들은 각자가 시네필이라는 말에 보고 들은 게 있고, 그에 못 미친다고 느끼기에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괴리의 원인은 우리가 사전적으로 배운 시네필의 정의와 지배적인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원 세대의 시네필들이 시네필에 대해 말한 것을 보고 들으며 자라왔는데, 여기서는 극장과 이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핵심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원리주의를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모임 문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즉, 자신을 시네필이 아니라고 소개하는 일에는 “배운 것과는 달라서”가 주된 동인으로 작동한다. 시대가 변했는데 시네필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과거의 교육과정 그대로이기에, 여기서 시대착오가 발생한다. 운동권 문화와 결합해 이루어졌던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운동권이 사라진 현실에서, 극장에 대한 탈중심화가 이루어진 현실에서 “자신을 시네필로 지칭하지 않는” 이상한 시네필을 양산한다. 실제로 씨네 21이 2020년에 기획기사로 쓴 “밀레니엄 시네필” 특집에서는 젊은 세대 영화광의 다수가 시네필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테리얼의 함연선 편집인이나 씨네21의 송경원이나 김병규 또한 시네필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일을 의아하게 여긴다고 말했던 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어른이라는 말과 유사점이 있다고 느낀다. 첫 번째, 시네필은 특정한 인물이나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두 번째, 시네필은 “실제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어른이라는 말을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진다고 느끼는 사람은 몇 없다. 시쳇말로 하면 “사는 건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이상이 있지만 정작 그런 이상대로만 살 수는 없고, 이를 따라 어른은 항상 이상적인 무언가로만 남는다. 즉, 어른은 하나의 지향이나 방향일 뿐 실제로 수행되는 가치나 지위는 아닌 듯 보인다. 마찬가지로 시네필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이상이 담겼고, 그만큼 실제 현실과의 괴리감이 있다. 단어의 실제 어원과 그것이 한국의 영화 문화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아는 일은 되려 시네필이라는 말에 본격적으로 이입할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은 교과서에서 봤던 단어가 자신의 현실이 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럴 수 없는 일이라고 느낀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이런 일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질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원하게 된다. 


영화를 ‘본다’는 것과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다르다. 단순히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는 일과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같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영화광들에게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언급을 꺼리게끔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온전하게 발언할 수 있는 대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시대착오성이 등장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화 이미지가 자신의 현실에 존재하는 영화 이미지에 가닿지 못할 때 그곳엔 시대착오성이 대두한다. 사람들은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해 서술하는 일을 두고 비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비평의 가장 큰 역할이 되려 실패에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평은 이상을 충족하지 못한다. 결국 비평은 온존함에 관한 무언가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건 현실에 온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실패’를 염두에 둔다. 


요약하자면 시네필이라는 말은 실패의 맥락에서 시대착오성이 있다. 그리고 어른이라는 말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자라지는 못했다고 보는 게 시네필이고, 여기에는 자신에 대해 책임지기 어렵다는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있다. 정확하게는 ‘이상주의자’여서 실패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현실주의자’여서 실패를 끌어안는 것에 가깝다. 책임에 대해 깊이 통감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말하거나 영화에 대한 논평을 하는 일은 더욱 신중해지고 또 어려워진다. 단순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일 뿐임에도 그게 과연 영화에 관한 적절한 진술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은 시험대에 선다. 어쩌면 우리가 비평이라 부르는 것들의 다수가 실제 현실과의 괴리가 있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평은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확인이 들 때가 아니라, 본 것과 본 것이 서로 다르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면에 대해 쓴다. 


벤야민에게 시대착오성은 도피처의 일종이다. 벤야민에게 현대성이 폭발로 이해되는 한편, 시대착오성은 그런 폭발에서 잠시 이탈했다가 다시 본대에 합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내 의견은 시네필에게 극장이라는 공간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대피소로서의 극장은 자신이 아는 현실이 실제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런 현실에서 잠시 후퇴해 이 둘을 동기화하거나 혹은 잠시 쉬어갈 만한 여유를 제공한다. 그런 이유로 극장에 방문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라 부를 법하다. 잠시나마 현실에서 어긋남으로써 자신의 현실에 대해 서술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은 우리가 영화 비평에 기대하는 역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비평은 영화에 관해 쓰지만 정작 영화에 대한 이상적인 서술은 될 수 없다. 그저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가까워지려는 이들의 노력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래서 비평은 항상 동시대성을 추구하지만 모두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시대착오적이다.


그 점에서 젊은 비평가라는 표현은 시대착오성의 예시에 부합한다. 가령 우리가 ‘젊다’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얻는 건 실제 나이와 인식상의 나이에 관한 괴리감을 지적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젊다’라는 말이 늙음의 반대항인지 아니면 이상향에 대한 서술인지 구분해야 한다. 전자를 먼저 말해보자. 자신이 여전히 젊다고 느끼는 것에 반해,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젊음’에 관한 단순한 상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면 우리가 자신을 두고서 ‘걸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을 때 젊음은 항상 자신의 과거를 가리키는 일로만 작동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젊은 시네필이라는 표현은 시네필이었던 지난날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렇게 진행되는 과거 시점에서 화자인 자신은 시네필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혹은 그러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입장이 된다. 자신의 실제 나이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시네필 문화를 젊음과 연결하는 순간, ‘젊음’은 지난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한풀이에 가까워진다. 


즉, ‘젊음’이라는 말은 ‘극장’이라는 표현과의 유사점이 있다. 시네필에게 극장이 대피소라면 ‘젊음’은 어떤 이들에게 대피소다. 그렇다면 젊은 시네필에게 ‘젊음’이라는 말은 극장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작동할 것이다. 젊은 시네필은 영화를 보며 어떤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바라던 어른이 되었는지를 자문한다. 현실이 이상적이지만은 않다고 다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기에 현실에 영화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영화가 없다면, 현실이 아닌 공간인 극장에 방문함으로써 그러한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헌데 이 이상은, 자신이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자신의 젊은 날에 관한다. 그러니 만약 젊은 시네필이 젊은 비평가로 진화한다면 이때의 비평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에 관한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나이와 실제 나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듯, ‘겉’과 ‘속’은 그 시대인식에서 착오를 일으킨다. 굳이 ‘젊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시네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시네필이었던 자신을 떠올리고야 만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던 영화들에서 너무 멀어져 버린 나머지, 자신을 시네필로 부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시네필 문화에 소속되었으면서도 자신을 시네필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몇몇 이들처럼 ‘어른’은 “더는 될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젊음’이라는 말과 공명한다. 즉, 시네필은 시간을 빗겨나간 자신의 모습에 관한 인식이고, 시대착오성은 자신이 사는 곳과 살아가는 곳이 서로 다름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비평이 “나는 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라는 인식이라면 비평가의 역할은 ‘여기’를 말하는 것,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현실은 이상적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기에 가능한 일이 정말로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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