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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8. 2023

운동이 있어야만 윤리가 존재한다면


밀고 당김을 떠올리자. 밀고 당기는 일에는 적절한 힘 조절이 요구되는데, 만약 균형이 맞지 않을 시에는 다른 한쪽이 무너지고야 만다. 쉽게 말해 밀고 당김(tension and retension)은 줄다리기와도 같다. 미는 힘이나 당기는 힘 양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이것은 하나의 작용이 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영화에서의 밀당을 떠올린다. 트래블링에 관한 자크 리베트의 유명한 평문에서 그는 ‘밀고 나감’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밀고 나간다’라는 건, 무언가를 목격하려는 시도 자체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목격과 연결되는 하나의 형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카포>의 트래블링 쇼트가 윤리적이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운동과 “무언가를 목격하려는 시도”의 결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자동운동이 어떠한 목격의 용도로 사용될 때, 카메라는 감독의 의지에 등 떠밀리며 여기서 영화는 “운동이 윤리에 선행한다”는 기막힌 모순을 안게 된다. 그리고 운동이 곧 목격이라면, 운동 이전에 발견이란 없기 때문에 그 ‘윤리’는 존재론적으로 ‘없다’고 밖엔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를 자동운동의 매체로 생각할 때 “영화에서 윤리는 그저 정직하게 재현되기만 할 뿐이라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영화는 틀어놓은 티브이처럼 매시간에 맞춰 행동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영화에서 이미지는 어떠한 의지에 대한 반동으로 표출된다. 주체가 행위하지 않으면 영화는 아무런 답을 돌려주지 않으며, 관객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보려 할 때 영화는 그에 즉각 응답한다. 즉 영화에서 밀당은 행위주체의 역할과 행동에 중점을 둔다. 영화에서 자동 전진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아마 이러한 점에 관한다. 만약 영화가 자동으로 전진한다면, 재현의 윤리도 자동으로 딸려오는 것인가? 오히려 재현은 주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보려 할 때 그에 응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네의 경우 리베트의 글에 대해 “못 본 체하는 이미지”를 대안 삼는데, 이는 물론 “영화가 주체를 찔러오는 순간”에 비견될 만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런 지적의 가능성이 어떠한 교환 가능성[1]을 암시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전진이 어쩔 수 없이 ‘스쳐 지나감’을 항변한다면, 이러한 스침에서 벌어지는 교환이 그 자체로 가능성이 될 일은 없을까? 자동전진의 세계에서 윤리는 주체가 의도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이러한 무기력함을 지적한 게 바로 리베트였다. “눈에 비치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자연스럽게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실패감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기본 값이기에, 보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건 삶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어쩔 수 없음에 굴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를 패배와 실패주의에 찌들게 한다. 이 점에서 카벨의 자동전진론은 그 실패의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관점이 나뉘게 된다. 실패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시 요구되는 성장통으로 지칭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실패를 세계의 법칙으로 확장하면서 이미지에 대한 목격담을 ‘성공’시키려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멀티버스 시대에 걸맞은 실패의 한 판본처럼 보인다. 가령 미래를 확정된 것으로 여기는 방식에서 멀티버스의 활용방식이 나뉜다는 걸 떠올려보자. 멀티버스가 확정된 미래를 대하는 방식은 이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로 도망가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멀티’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패러렐과 구분 짓지 않는 이들 작품에서 우리는 평평함이 도주론과 연결되는 대목을 본다. 이들 작품은 마치 평평함을 디지털 시대의 사본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두 세계가 완전히 같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도 둘 사이에 고저차가 없기 때문에 손쉽게 넘어가거나 비교될 수 있으며, 이는 슈타이얼의 말처럼 관찰자의 수직적 시선에 의존한다. 고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같은 시리즈가 ‘밀고-당김’의 이미지를 수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사실 스파이더맨은 밀고 당김의 운동을 상승과 추락이라는 위치 에너지에서 얻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밀고 당김의 과정은 둘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를 논하기 힘들다. 흔히 위치 에너지에서는 상승이 먼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경우엔 우리가 이미지를 내려다보는 일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위치 짓는다는 점에서 <카포>의 비판을 재고하게 된다. 즉, 추락은 수직으로 변환된 자동전진인 셈이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자동전진이라는 말에서 얻는 실패의 감정은 어느 정도 위치에너지와 연결된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세계 지평의 확장을 겪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성장은 반강제적이다. 그 누구도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음에도 모든 이들은 어른이 되고야 만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 그 이미지의 상을 맺으려 하지만 그러한 가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획득될 것이다. 만약 운동이 목격이라 한다면, 이 무한한 추락의 세계에서 주체의 고민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이 무한한 추락의 세계를 엔트로피의 세계로 가정하면 많은 이야기가 도출된다. 궁극적으로는 추락에서의 작은 반등이 대공황을 막을 수는 없는 만큼 관람 속의 어느 발견이 결국에는 마지막 장면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는 사실이 있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있다는 점에 대응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 트래블링 쇼트는 계속해서 흘러야만 하는데, 사실 밀고 당김의 과정은 결코 영원할 수가 없으므로 이 과정에서는 어떠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카포>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다. <카포>는 의도적으로 멈춘 게 아니라 나머지 모두를 구할 수 없어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이것은 재현의 윤리와는 다소 다른 맥락을 지닌다. 쉽게 말해 밀고-나감의 이미지가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거진 폐허에 해당한다. 모든 것이 소진되었고 피로한 육신이 안식을 찾는 자리. 이 폐허의 비극은 여기에 있지만, 영광 또한 이곳에 있다. 


그 점에서 카메라의 기계적인 시선은 사이버네틱스의 맥락에서 인간이라는 소우주에 적용될 수 있는 듯 보인다. 뒤피는 “비결정적인 미래에서 이룰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니”[2]라고 말하며 사이버네틱스의 자기반영성을 비극의 감각으로 전회한다그 말대로 비극의 감각그 실패가 패배주의와 연결되지 않는 것은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폐쇄감각이 결국에는 자기반영과 같은 원리이기 때문이다간단히 말하자면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결국 추락과 연결되는 만큼 존재가 머무르는 곳은 가장 고민이 깊은 지점이다그리고 존재가 추락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고민의 무게 탓이며자동전진에서는 최전선이 이런 위치에 있다빗대자면 무언가를 목격하려고 시도하는 주체가 목격담에 앞서 존재할 때 그는 자체로 윤리가 된다목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목격됨으로써 곧 시도되는 것이다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운동의 과정이 아니라 궤적을 말해야만 한다


모든 실패는 잔존의 감각을 남긴다. 그리고 궤적은 주체의 뒤편에 잔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실패에 선행하는 존재를 보여준다. 즉, 궤적은 실패에 선험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끄럽게 나아가는 트래블링 쇼트가 아니라 끊김이 일어나며 세계의 균열을 벌리는 글리치를 연상해야 할지도 모른다. 글리치는 세계의 물리법칙과 존재의 원리가 어긋날 때 벌어지는 현상이고, 그래서 글리치는 존재가 세계에 존속하기를 실패했음을 보여준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달리 말해 이는 세계와 줄곧 어긋남으로써 어떠한 목격담을 재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잭 더 리퍼와 같은 연쇄살인마처럼 어떠한 ‘목격담’은 존재를 형성하기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를 실패로 몰아넣곤 한다. 하지만 이 실패는 지난 궤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진정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멀티버스를 횡단하지만 그 모든 우주에서 맞닥뜨리는 건 실패의 감정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할 때, 우리는 나머지 모든 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부정함에 사로잡힌다. 즉 우리는 단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든 이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었는지를 스스로에 물어야 한다. 모든 멀티버스에 존재할 수 없는 만큼이나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어른’은 존재론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건에서 사회적 현상을 발견하는 일은 사건의 윤리보다 이들이 도출될 수밖에 없었던, 그 궤적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실패의 감정을 느낄 게 아니라, 밀고 당김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 무엇이 발견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건은 방치의 결과가 아니라 운동 자체가 목격과 연결된 하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운동이 있어야만 윤리가 존재한다면, 목격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나머지 모든 것에 관한 실패일 것이다. 



[1]박동수, “영화와 게임의 스침: 영화적 체험과 게임적 체험의 교환 가능성”, 크리틱칼, 2020.07.13. 

http://www.critic-al.org/?p=5927

[2]장피에르 뒤피,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배문정 역, (서울: 지식공작소, 2023)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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