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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6. 2023

가상성과 개연성

보리스 그로이스는 “창조적인 작업은 그 결과물의 작업에 들인 시간과 전시의 시간이 비동기화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이 말은 예술에서 배치의 속성을 강조하는데, 예술이 세계에 자신을 내비치는 순간부터 예술은 ‘객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이런 관점은 회화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시점’을 풀이에 들여온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크게 볼 때 신적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의 이행이었고, 이는 곧 ‘평면’에서의 이탈을 의미했다. 신적 시간에서 빠져나옴으로써 사람들은 ‘세계의 시간’를 배경으로 배치했다. 둘 사이에는 동기화의 이탈이 이루어지면서 이제 평면은 어떠한 관점이나 시점을 다채롭게 도입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의 시간’이라 불리는 이 개념의 도입은 인간이 세계에서 이탈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에는 예술도 그렇게 된다. 예술에 대한 매체의 경험을 강조하던 시기는 2000년대 이후 사변적 실재론의 유행을 거친다. 오늘날 매체는 서로 떨어져 있는 주체들을 객체로 지정하면서, 이들 간에 동기화를 이루어내는 미디어의 기능에 관해 다룬다. 


가상현실과 영화의 공통점은 가상과 현실의 동기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가령 가상현실의 경우 ‘가상’의 개념이 이론으로 제시되었던 시기에 구상된 ‘현실’의 변종이었다. 이때 ‘가상’은 현실이 다른 장소에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 즉 둘 사이에 벌어지는 동기화에서의 이탈을 암시했다. 현실은 어디까지나 지금 살아가는 이곳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가상’의 현실을 말하기 위해 “본래부터” 그것이 있었음을 가정해야만 했다. 즉, 본래부터 있었다면 이를 응시하는 과정에서 동기화되었던 대목을 ‘이탈’함으로써 ‘가상’은 분리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플라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이 바라던 이상향을 현실에 구현해내는 작업과 연결되었다. 가상현실은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단지 동기화로 인해 현실에 보여질 수 없었던 걸 드러내는 일을 가리켰다. 그러나 디지털의 개념이 완숙기에 접어드는 2010년대 들어 인터넷이 현실에 밀접해지면서, 가상현실은 이제 더는 형식상의 일치만으로 설명되지 않게 됐다. 스마트폰으로 메신저를 이용하는 일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 듯, 가상현실은 역전앞처럼 의미가 중첩된 단어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이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의 무용함을 뜻하진 않는다. 가상현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해지고 응용되는 다중 중첩 언어가 되었다. 가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중 가상현실은 현대 우주론의 일각에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주장하는 일에도 응용되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 또한 프로그램과 코드로 이루어졌고, 이를 따라 [세계]는 컴퓨터 시스템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상현실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자체이며, 그러므로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어떠한 개념이나 형식보다는 상호침투의 양상에 더 가깝다. 가상현실은 마치 자본주의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현실을 가리는 하나의 ‘체계’로 이해된다. 즉, 이 관점에서 현대 영화는 하나의 가상현실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자신의 매체 기반을 토대로 지배적인 현실을 구성하며, 이를 통해 ‘영화’는 동기화된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 된다.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시공간의 일치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그 형식상의 이점을 갖는다. 프로그램의 코드를 가져와 직조하면, 그곳에서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이다. 


영화는 어떠한 현실을 드러내거나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을 시뮬레이션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위치에 선다. 시뮬레이션된 현실은 그 자신을 코딩과 프로그래밍의 결과물로 설명하면서, 마찬가지로 ‘가상’이란 그러한 작동의 결과 혹은 결론적인 제시로 설명한다. 이 경우, 어떠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원리나 과정은 다를 수 있지만 어쨌거나 프로그램이 본래의 목적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두 세계는 ‘같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생물의 수렴진화처럼 둘 간에는 발전의 이력이나 역사 등이 다르지만 같은 자리에서 동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른바 영화의 동기화란 그들이 세계를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일,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의 결론에 귀결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제공하는 관객의 경험과도 유사하다. 영화에서 흔히 관객은 수용자라는 말에 등치되며 여기서 영화는 관객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이는 소위 개연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럴듯함’의 관점에서 관객과의 리듬을 맞추는 것 즉 ‘동기화’를 뜻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어디에서든 관람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목격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영화는 멈춤과 이탈, 정지와 도주를 반복하면서 동기화의 양상을 벗어난다. 


영화는 자신을 어떠한 이상향-가상으로 내보이면서, 이상을 그리는 하나의 체계로서 자신을 규정한다. 영화론은 이상론과도 같았으며 가상현실로서의 영화는 대체 가능한 현실의 형식, 혹은 가능성을 그려보고자 시도했다. 즉 영화에서 개연성이라는 말은 영화 속 세계를 있을 법하다고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가상현실로서의 영화는 현실 안에서 출몰해오면서 자신이 있음을 먼저 증명한다. 오늘날 영화는 티브이 속에서, 유튜브 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출몰해오며 이런 이미지들은 자신의 진위에 앞서 먼저 결론으로 도달한다. 이를 따라 관객이 택할 수 있는 건 그런 이미지들을 따라가는 일이거나, 또는 동기화를 포기하고 그들을 또 다른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관객은 디지털의 방식으로 아날로그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시뮬레이션의 형태로 현실에 연결된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간에, 영화를 시뮬레이션으로 규정할 때 현실은 영화의 기반 조건이 아니며 둘 사이는 독립적이다. 이렇게 동기화를 포기하고서 영화를 현실에서 분리•독립하는 일은 영화를 포스트 매체 조건에 편입시킨다. 매체 자신의 드러냄은 그런 영화의 세계들을 그런 영화의 일부로 만든다.


디지털 시대에 관한 과도기적 진단은 아직 아날로그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작동방식은 디지털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가령 전기차의 경우 내부 동력원과 엔진은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앞바퀴와 뒷바퀴의 연결이나 자동차의 고유 기능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이다. 자동차는 여전히 기어를 넣고, 전조등이 있으며, 미러등이 달려있다. 이들 중 몇몇은 버튼식 기어와 관찰카메라로 대체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적 방식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영화에서 극장은 굳이 극장에서 볼 이유가 없지만, 영화관이 아니라면 영화를 본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식의 요인을 많이 참조한다. 자동차에서 기어가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아날로그적 형식은 디지털의 가상성이 흩어지지 않게끔 해준다. 물론 디지털은 딱히 아날로그가 아니더라도 디지털로서만 세계에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방식으로 만나는 디지털이라는 대목이 중요하다. 어떠한 방식을 사용한다는 건 그런 방식에 맞춰 다른 것을 깎아내거나 열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즉 가상현실로서의 영화는 가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을 택한 것일 뿐, 있는 그대로의 가상현실을 시뮬레이션 하지 못할 이유란 없다. 


가상이라는 말이 시뮬레이션을 대치하진 않는다. 가상은 그곳이 실제 현실임을 인지하는 한에서만 시뮬레이션으로 기능한다. 이는 가상에 대한 현실의 우위를 재고하는 게 아니라 아날로그적 육체를 지닌 인간과 디지털적 육체를 지닌 영화 간에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육체에서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수용하는 하나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디지털적 육체를 지닌 영화들은 디지털을 아날로그를 수용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사용한다. 이 둘 간에는 분명 형식과 과정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거나 받아들이는 결과 값이 같다면, 원칙적으로는 동등하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이나 모니터와 티브이를 통해 보는 일은 극장에서 모니터를 상상하거나 모니터에서 극장을 상정하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 상호침투한다. 가상과 현실이 서로 자유로이 넘나드는 과정에서 가상과 현실의 우위는 단지 접속의 순서를 의미할 뿐, 결론을 동일하게 제시하며 이를 따라 여기서 고찰되어야 할 건 그 여정에 있다. 가령 가상 현실로서의 영화가 어느 한 쪽과의 동기화를 잃을 때, 영화 또한 각자의 현실에서 이탈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 일반의 현실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현실성을 갖는다. 가상현실은 관객의 경험하는 신체에 의해 관철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세계에서 시간은 형식틀의 동기화에 봉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술에 반대하는 그의 논리에서 동기화는 채플린이 보여준 것과 같은 식의 포드주의였다. 오늘날 시간은 절단되고, 접합되거나 배치되면서 인간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동기화는 분열된 정신을 인간의 외피 하나만으로 끌고 가는 분열증의 형태였다. 여기서는 인간이 없을 때 분열된 시간들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주체’가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되므로 항상 주체는 사유의 중심에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주체의 개념은 무엇인가? 양방향 통신, 전이중통신, 혹은 시뮬레이션 우주와 평행우주와 같은 개념들에서는 접속의 지점이 곧 주체다. 어느 방향에서든 접근할 수 있지만 이후의 경험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정의 최초 지점이다. 그리고 게임을 행위성의 예술로 규정하는 C. 티 응우옌의 논증을 받아들인다면, 행위의 과정이 주체를 형성하는 방식은 접속의 지점은 단순한 점이 아니라 신체 그리기의 문제로 이해된다. 신체에서 손발가락 촉각의 최대 수용기로 기능하는 것처럼, 디지털은 접속의 지점을 그림에 있어 존재를 세계에 뿌리내리게끔 해준다. 


중요한 건 행위하는 게 주체이지 주체가 행위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푸코에게 감시와 처벌이 구조 안에서 성립하듯 주체는 어떠한 구조와 긴밀히 연루돼있다. 그렇지만 이 구조는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방식이 아니라 영화를 본다는 인식의 과정인 디스포지티브를 지칭한다. 이 구조는 존재를 ‘배치’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접속지점으로 기능하고, 이는 존재를 세계에 뿌리내리는 배치의 기능을 언급한다. 이후 주체는 무엇이든 또는 어디로든 뻗어 나가며 다른 세계로 연결되지만 행위가 늘 어떤 것들의 사이, ‘동기화되지 않는 지점’들을 가로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지점들은 거진 노드에 가깝다. 쉽게 말해 본다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세계의 드러냄을 가리킨다. 그리고 보는 자가 주체임을 가정할 때, 본다는 행위는 가상과 현실 양쪽 모두에서 주체의 입장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단지 최초의 접속지점만이 있을 뿐이고 여타 다른 세계들은 모두 평등하다. 따라서 가상현실로서의 영화는 가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지만, 관객에 의해 즉각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신을 개연으로 세우는 능동성을 담지한다. 가상현실은 시뮬레이션의 일종으로서 어느 하나만을 주류로 내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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