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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3. 2023

후일담: 실패의 기능에 관하여

이 글은 투비컨티뉴드에서 반년 동안 연재했던 시리즈의 후일담이다.

https://tobe.aladin.co.kr/s/475





“영화 속에서 우리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주의를 다루고 있다. (…) 영화는 물질성이 아닌 현실의 인상을 가진 이미지로 작업한다. 이 간극은 매우 중요하다.” -톰 거닝-


실패를 장르로 이해하는 일은 마치 봉준호 영화의 삑사리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기도 하다. 거닝이 영화의 지표성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를 만드는 건 현실이지만, 정작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는 모순이 영화 매체에 있다. 이 간극은 흔히 관객과 스크린의 거리두기로 이해되지만 이따금 그게 불가할 때 영화와 현실은 상호침투를 겪는다. 첫 번째로는 영화의 경우가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를 현실의 질료로 착각하면서 현실이 남긴 흔적으로 파악하곤 하는데. 영화는 현실을 학습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픽션에 불과하며 거기에 인간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현실의 경우가 있다. 현실을 사는 관객은 이따금 삶에서 영화를 떠올리곤 하는데 이것은 영화가 현실을 갖고 재구성된 무언가이기 때문이며, 말하자면 영화는 현실의 if 판본으로써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말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1) 현실에는 항상 잔존하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며, 2) 관객의 경험하는 신체가 항상 영화에 우선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탈락된 이미지가 없다면 영화는 자신을 구성할 수 없고, 관객의 경험하는 신체가 없으면 영화는 현실로 횡단해올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영화를 ‘대체 현실’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영화는 현실과 공존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어느 하나의 세계만이 우위를 점하지 않으며, 둘 사이를 건너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점에서 SF는 대체 현실과 닮은 구석이 있는데, 현실과 평행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SF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이 ‘과학’이라고 본다면 이는 반쯤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과학은 ‘설명 가능한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과학소설은 미국에서 1926년 휴고 건즈백이 잡지 판매를 위해 고안한 용어로 알려져있다. 그는 잡지 판매를 위한 홍보수사로 ‘과학에 입각하여 교육적으로 쓰인,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이성의 산물’을 택했다. 그러니까 과학소설에서 과학이 동원된 것에는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내세워지는 하나의 설정이자 장치였고 이는 실제로 성공했다. 흥미로운 건 과학소설이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계기이다. 과학소설에 관한 몇몇 소개들에서 우리는 과학소설이 대체 현실, 또는 대안으로 서술되는 것을 본다. 가령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 과학소설 장르의 페미니즘적 재현과 배치를 떠올려보자. 과학소설 장르가 여성 작가의 활약이 도드라지며, 이를 따라 여성적 주체와 그에 따른 현실 배치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관점에서 과학은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원리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가는 현실이 현상학적으로 발견됨으로써 단지 서술될 뿐인 압제성이 있다면, 여기서 과학은 그러한 현실의 구성적 원리를 보여줌으로써 현상에 대한 가시성을 제공한다. 즉, 과학소설에서 과학의 역할은 그럴듯하게 보이게끔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다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을 내놓는 것이다. 


과학소설이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하는 대목은 그러한 목격담이다. 페미니즘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설명하고자 과학을 빌려 온다. 예를 들면 『멋진 신세계』나 『1984』 같은 소설은 현실 사회를 미래 사회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표면적인 검열을 피해 간다. 만약 이들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표하고자 했다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묘사나 비판에는 몸에 갇혀있다는 점에서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을 수행하지 못하듯, 설명 가능한 현실에 우선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미 소속된 것에 대해 말하는 법은 충분히 이행 가능해서 납득할 만한 정도의 대체 현실을 설정하는 일이다. 대체 현실은 지배적인 현실의 자리에 내려올 수는 없지만, 지배적인 현실을 우회하게 해준다. 바꾸어 말해 대체 현실은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그런 현실에 대해 말하게끔 돕는다. 이를 통해 목격담은 몸에 소속되었을 때 왜곡될 수 있을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여기서 과학은 그에 대한 합리와 이치를 보완한다. 물론 과학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설명하고자 노력할 뿐, 현실의 구성성분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럴듯함’이라는 수사를 붙이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이미 너무나 견고하기 때문이다. 허나 바꾸어 말해 이는 과학소설은 그 견고한 현실 덕분에 기립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실은 유물론적이지만 그렇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페미니즘과 과학소설의 상관관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건 여성에 의해 쓰이고 여성에 의해 읽힌다는 유통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과학소설이 대체 현실을 창출하는 방식에서 실패의 과정을 답습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예를 들어 장르적 공식에서 과학소설이 디스토피아와 자주 연결되는 일을 떠올려보자. 과학소설과 디스토피아의 상관관계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 드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현실이 말이 안 되기에 그런 모순의 자리를 과학적 이성의 위로 바꿔보려는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는 다르게 행동하는 게 과거가 아니라, 과거가 낯설게 행동하는 일이 꼭 우리를 닮아있다고 말하는 게 바로 과학소설의 관점이다. 물론 이조차도 장르적 변형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현존하는 펑크로 분화되기는 하지만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설사 서부극의 과거에서 출발할지언정 이들은 자신을 미래로 소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는 후회스럽지만 미래는 도래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견고한 현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미래를 마주하는 이들에겐 오히려 견고한 현실이 요구되며, 이를 따라 과학소설이 갑갑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과학소설이 하려는 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기보다는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 어떠한 대체적인 현실로서의 미래를 소환하는 일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 미래는 정말로 존재 가능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실패해 작금의 현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학소설은 기본적으로 실패를 전제한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과학소설에 대한 비평적 관점이 사변소설로 분화하는 과정은 ‘대체’라는 말이 현실에 도입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대체라는 말의 영문에서도 확인되듯 장소(Placement)를 재지정(Re-)하는 일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곧바로 향하는 일과도 같다. 지금에야 장르적으로 구분되고 있지만 사실 여기서 중요한 건 공존의 논리이다. 과학소설이 현실주의를 현실에 맞춰 보고자 인과를 파악하려 든다면, 사변소설은 현실을 현실주의에 대입하면서 그중 가장 그럴듯한 게 무엇인지를 묻거나, 혹은 그런 사유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어떤 점에서 사변소설은 객관적 현실로 들어가는 일은 주변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다. 사변소설에서 과학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에 관한 과학적 접근 시도이다. 이는 과학소설과 같은 원리이지만 과학소설이 이미 다른 세계를 무대 삼는 반면 사변소설은 우리가 이미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배경의 시제나 관점에 상관없이 현실은 하나이며, 이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 중 하나가 독자의 현실이기에 마찬가지로 소설의 묘사 또한 정말로 존재하는 현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학소설이 잔존하는 이미지에 중점을 둔다면 사변소설은 경험하는 신체에 중점을 둔다. 그 어떤 경험도 현존하는 신체에 우선할 수 없으며, 이를 따라 과학은 그러한 ‘사이’와 ‘간극’을 설명할 뿐이다.  


과학소설은 현실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미래가 실패해 현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실패는 비천하지만, 비천함은 실패의 전유물은 아니며 성공도 실패의 한 종류라는 점에서 비천하다. 성공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며, “성공 이후의 삶이 끝나지 않는 건 그 모체가 되는 실패도 이후의 삶을 허락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비천한 삶을 유지하는 일보다 차라리 한 번의 비천함을 겪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실패와 성공 모두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러한 실패와 성공을 하나의 지점으로 발견하는 일이다. 만약 이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실패와 성공이 어느 시점에 다가올지를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현상을 관측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성공이라는 말을 실패의 반대항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린다. 실패와 성공은 단순히 방향성의 차이가 아니라 수행의 가치에 더 가깝다. 실패와 성공 모두에서 중요한 건 이들 사이에서 현상을 몸으로 경험하는 신체의 존립이다. 예를 들어, 세상이 꿈꾸는 자의 것이라면 여기서 핵심은 꿈을 꾸는 행위가 아니라 그러한 꿈을 세계로 가져오는 신체에 있다. 꿈은 신체에 우선할 수 없고, 이는 현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과학/사변 소설에서 현상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모두 세계를 묘사하기 이전에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의 문제이다.

 

최종적으로 이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소설”을 다루고 있다는 말로써 풀이될 수 있어 보인다. 영화가 현실의 잔존하는 이미지를 갖고 작업하듯 과학소설도 과학을 통해 풀려나는 힘을 갖고서 작업한다. 과학이 세계에 잔류하는 공식과 원리를 ‘발견’하고 ‘발명’해서 이를 세계에 본격적으로 드러낸다면, 과학소설은 정말로 과학을 다루기보다는 그렇게 파묻힌 현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연구한다. 현실의 인상을 갖는 것들로 작업하는 일은 ‘가짜’를 다루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인상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를 재고하게끔 한다. 가령 자아에 관한 사유 중 하나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들”이란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라는 걸 떠올려보자. 세계 없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이러한 자아는 경험하는 신체가 그릇으로 있을 때만 비로소 담길 수 있다.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는 현실에 대한 영화의 우위를 논하는 일과도 같으며 과학소설은 그 관계가 역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하던 세계를 발굴해내는 일에 목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 사이에 드러나는 걸 수면에 올리는 일에 가깝다. 버틀러의 말처럼, 그러한 맥락에서의 과학은 세계의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점에서 보편자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설사 주체가 하나의 효과에 불과할지언정, 그러한 촉발은 고유성을 갖고서 관찰되는 모든 세계에서 하나로 관측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인상은 현상이기 전에 이미지인 셈이다. 


그래서 실패는 상관주의의 맥락에서,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위치에 있다. 장르가 어떠한 공식의 모음집으로 풀이되면서 말하지 않고서도 주변 세계를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우리가 그 세계가 정말로 있을 법하다고 믿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나’는 어떠한 현실이 아니라 그런 현실들 사이에서 유지되는 믿음의 한 형식임을 보여준다. 물론 현실은 우리의 존재기반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신체를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믿게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주체가 현실에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 드러나 있음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류의 믿음은 아니다. 영화가 현실의 인상들을 갖고서 작업했다는 점에서 현실의 어떤 판본으로 가정되듯, 경험세계의 인상물인 신체는 자신을 세계에 투입할 만한 거리를 요구한다. 이렇게 벌려진 거리가 스크린과 영화의 관계, 혹은 과학소설이 우리가 몸담은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현실에 대해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들 세계가 실현되지 않거나, 혹은 역으로 도래하는 것을 걱정할 이유란 없다. 실패와 성공은 단절과 접속의 기계적 신호 체계에서만 존재하므로, 이런 장치의 기능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체 현실에 관한 묘사가 아무리 고도화된다 한들, 이들 세계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상관적일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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