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un 16. 2023

포스트가 촉발하는 생존의 논리

0.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세계무역센터에 테러를 감행한다. 미국의 운명을 가른 이날 아침 미국인들은 최초의 본토 침략과 함께 ‘바깥’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됐다.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날아온 이 공습에 관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아주 확실히 알게 됐다. 9.11 테러의 현장에서 미국은 테러를 통해 내부로 구축되었고, 이는 미국이라는 지리적 개념을 미국인에 의한 것으로 확장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의 대처이다. 테러에 대한 사후대처를 논의하면서 조지 부시 행정부는 “잠재적으로 적이 존재할 것으로 예측되는 장소”들을 침공했는데, 이 여정은 모두 선제타격의 논리를 따랐다. 전쟁을 지지하는 쪽이 ‘전장의 안개’를 근거로 우연성에 붙들린 반면, 반대하는 쪽은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에서 출발해야 한다면서 우연성을 배제했다.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싸웠고 이 과정에서 미국인들에겐 ‘바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


미국 정부의 논리는 불확실함으로 이해되는 바깥을 내부로 들여오면서 통제 가능한 범주에 넣자는 것이었다. 반면 현실주의자들에게 현실은 지배할 수 없으며, 이를 따라 현실-기반 공동체는 지배적인 현실에서 출발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흐름이 잘 드러난 것은 게임 <메탈 기어 라이징 리벤전스>이다. 전쟁 비즈니스를 소재 삼은 이 작품에서 빌 암스트롱은 악역이지만 가장 미국적이기에 화제가 됐다. 서부개척시대의 재림을 꿈꾸며 이러한 미국적 가치가 세계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인텔리, 셀럽, 메트로섹슈얼은 쳐부수어야 할 것들에 불과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이 마음이 안 든다면 결투를 통해 승리를 쟁취하라는 것이다. 게임의 이 설정은 출시된 시기인 2013년을 감안했을 때 현실주의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을 들었다. 자기 이외의 것은 모두 통제 불가한 ‘바깥’의 범주에 있으므로 싹 다 때려눕혀 버리자는 이 과격함은 미국 우파들의 모습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정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정의를 본다. 몸은 자신이 통제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깥을 배제하는 한 가지 방법론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바깥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신체의 통제능력과도 결을 같이 한다. 알 카에다의 테러에서 선제타격의 논리가 도출된 건 그런 통제능력의 상실을 우려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게 테러는 예측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고, 불확실성을 없애려면 근육을 움직이고 신경계를 재연결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테러와 전쟁은 예측 불가한 가치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테러가 예측 가능성으로 유지되던 세계의 향상성을 깨트린다면, 여기서 면역계는 교란되며 이를 따라 세균과 전투해야만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면역계는 승리를 위해 아군 세포들의 손상이나 사멸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병균만을 속속들이 골라 타격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 


이는 바깥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내부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안과 밖은 딱 잘라 구분지을 수 없고, 이러한 관점에서 테러는 그 타격에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경계를 흐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즉 테러의 핵심은 면역계의 교란이지 훼손이나 절단에 있는 게 아니다. 테러는 삶의 균형을 해친다는 점에서, 테러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우려하며 다시 이전 같은 일상을 영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속성을 해친다. 이 과정에서 테러는 삶이 균일하지 않다는 점을 통해 바깥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신경계를 재구성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주체는 재편된 신경계로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며 이 과정에서 실물세계는 물리적인 인과나 변화 없이도 실질성을 갖는다.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이 대목에서 힘을 얻는다.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말은,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실질성을 갖는데도 그러한 실질성을 인위로 획득하려는 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테러는 잠재적인 위협의 출몰을 암시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체를 현실에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더는 테러 이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신체가 갖는 회복능력을 일정 수준 이후로 넘겨버리려는 의도가 관찰된다. 신체에도 재생능력은 있지만 특정 한계를 넘어서면 이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통제가능한 범주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주장이 회복가능한 국력과 이전 세계로의 복귀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들에게 현실-기반 공동체는 우연성을 두려워하고 확실함에만 매달리는 겁쟁이들의 쉼터로 이해됐다.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우연성에 붙들리지 말자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고, 이들에게 이전 세계는 우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즉 당장에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현실’일 뿐이었다. 그 점에서 테러는 영화가 지닌 충격경험과 부분적으로 유사한데, 가령 포스트라는 말이 그렇다. 


3. 


게임 [블루 아카이브]의 에덴조약 편은 테러와 함께 시작한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유하던 중에 갑자기 날아든 미사일이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테러범들의 목적은 테러를 통해 과거에 있었던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는 일이며, 이를 토대로 자신들의 잠재적인 미래를 바꿔보려는 것이다. 즉 테러를 통해 일상에 균열을 내고, 이를 토대로 과거와 미래를 바꿔보려 한다. 헌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테러의 기능은 우리가 아는 충격경험에 유비된다. 가령 영화적 순간이 영화의 전체 관람 경험을 바꾸어 두는 일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지적에 의해 공론화된 바 있다. 하스미는 오즈의 화병에서 오즈 영화의 2층으로 전개를 확장하며, 이를 토대로 한 편의 영화만이 아니라 오즈 영화 전체로 담론을 확장한다. 이를 통해 오즈 영화의 2층은 이전과 이후 모두에서 해당 담론을 획득하는데, 어떤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테러가 추구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테러는 현실주의자들이 처한 현실에 변화를 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지배적인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면, 지배적인 현실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것만이 논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테러는 그러한 점에서 고착화된 현실에 도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발견이나 침입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코로나 판데믹을 계기로 우리가 영화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포스트 시네마에서 포스트라는 말이 일종의 테러와도 같다는 점이다. 코로나 판데믹의 대표적인 수사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대비 이전에 닥쳐온 현실을 가리키면서 영화를 우리 삶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판데믹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나 과거와 미래 모두에 전무후무했다는 점에서 유일성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현실주의자들의 의견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미 닥쳐온 걸 바꿀 수 없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출발시켜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어떠한 현상이 발견되는 것만큼이나 특정한 순간이 닥쳐오는 것도 강력한 현실주의의 기반이 되며, 그러한 점에서 테러는 양쪽 모두에서의 영화적 순간이다. 


4.


포스트라는 말은 테러로 이해하는 일은 포스트를 특정한 단절의 계기로 삼자는 말과도 같다. 그렇게 바라보아야만 포스트 시네마에 관한 현실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포스트는 어떠한 변화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당장에 처해있는 환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 포스트를 되기의 과정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를 다가올 위협으로 여기면서 영화가 촉발할 우연함의 가치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물론 포스트 시네마에 어떠한 우연성을 부여하는 일은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발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 어떤 방향성도 없다면 이는 가장 불확실한 것에 대한 고민만을 떠안게 될 뿐이다. 그 점에서 판데믹은 영화를 구성하는 현실적인 환경들에 대한 논의를 가능케 했다. 영화를 구성하는 장치들에서 극장이 완전히 배제됨에 따라 영화에서 스크린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로 이동했다. 이제 영화는 별다른 논의 없이도 극장이라는 물질적 현실을 배제해야만 했다. 


우연한 기회로 촉발된 테러가 모든 걸 바꿔놨다. 포스트 시네마에 대한 그 어떤 논의보다 현실의 지위는 우월했다.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보다 현실이 바꿔놓은 시도들이 더 많았다. 영화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물음은 이제 영화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뒤바뀐다. 이렇게 주변부로 이동한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극장의 바깥으로 밀려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영화의 존재론적 기반을 재정의하는 과정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영화가 영화적 장치의 산물이었다면, 이제 영화는 장치에 대한 개념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검증하면서 테러가 촉발한 생존자의 위치에 선다. 이제 영화는 관객 주체를 위해 이들을 폐허의 주변부로 탈출시키며, 그러한 점에서 영화 관람은 생존의 감각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영화는 수용자를 몰입시키는 게 아니라 주변부로 파생시키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관객을 양산한다. 왜냐하면 관객은 관찰자이며 이를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5. 


흥미로운 건 단순히 영화만이 바깥에 밀려난 게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점이고, 영화도 여전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주변부로 밀려난 건 단지 우리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간의 다중 집합 모임이 금지됨에 따라 ‘중심’은 불가해졌고 이는 중심부의 삭제로 이어졌다. 이제 세상엔 주변만이 남았고, 이를 따라 위의 수사는 주변간의 연결이 가능함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영화에서 우리가 결정적인 장면을 발견하고 나서 이전과 이후의 영화관람이 다르게 다가오는 걸 연상케 한다. 판데믹의 수사가 비가역성을 강조했듯이, 영화와 테러의 공통점은 어떠한 순간이 전후의 영역을 점유해버린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는 이제 완전한 관객의 자리로 밀려나면서 사건의 전후 영역에 접근이 불가해진다. 다시 말해서 당사자는 중심부로의 접근이 불가하며 이는 마치 미사일이 떨어진 폐허의 중심부가 금지구역이 되는 것과도 같다. 


폐허의 충격경험: 알다시피 벤야민은 영화를 두고서 도시의 충격경험 중 하나로 분류한 바 있다. 그는 쇼트의 분해와 재조립이 낳는 이미지의 시각적 충돌에 관해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과는 달리 이미지의 분해와 재조립을 반복하면서 현실을 계속해서 갱신하며, 이 과정에서 현실은 계속해서 고유한 것으로 현장에 남겨진다. 즉 영화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테러와도 같으며 영화를 본다는 건 작금의 현실을 단독으로 남긴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영화와 테러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 누구도 영화를 보기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충격 경험은 영화를 보기 전과 후를 나누면서 “인생 영화를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은 정말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벌어지는 각성은 우리가 알던 현실에 관한 게 아니지 않을까? 영화가 현실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이전까지의 현실은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니다. 


6.


테러는 현실을 최전선으로 밀어내며, 마찬가지로 영화의 충격 경험은 비가역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는 테러처럼 바깥과 몸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자기만의 관람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곤 한다. 그러나 이따금 영화는 그런 예측에서 벗어나며 이때 관객은 큰 충격을 받는다. 구성되어가는 신체가 예측에서 이탈하고 나면 그 신체는 더는 자신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계가 허물어진 신체는 평소라면 면역계에 가로막힐 것들이 투입되면서 신경계의 재연결을 겪는다. 이렇게 주체는 전과 다른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테러 이후의 세상이 생존자를 양산한다면, 마찬가지로 어떠한 영화 이후의 관객도 그런 의미에서의 생존자다. 그리고 이 생존자들에게 세계는 이제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온전한 의미에서의 바깥이 되고야 만다. 결국 이 사이에 생겨나는 단절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에 대응하는 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현행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잠재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관해서는 ‘현행적인 것’이 대응한다는 소리다. 다른 한편 에리카 발솜은 “객관적 현실로부터의 이탈은 주관적 현실로 파생되기 위함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 말인즉 현실이 객관적으로 파악될 때 이는 중심부의 가치를 갖지 주변부로 파생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두 사람의 말은 우리가 지배적 현실이라 부르는 현행적인 것에 관해 몸의 역할을 되새긴다. 우리는 흔히 신체를 두고서 항상 통제 가능한 내부로 사유하곤 하지만, 몸의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낯설게 느낄 때가 있으며 바로 이것이 테러 이후의 삶, 그 생존의 감각이다. 테러의 다른 말은 동기화의 차단이고 이는 즉 영화의 기능 중 하나가 현실세계와의 분리임을 뜻한다. 


0.


영화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감각을 차단해 현실의 통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는 마취의 일종이며 인간의 눈을 가린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화는 현실과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계를 구획하는 게 아니라 경계가 될 만한 물질적 기반을 기억하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영화의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 끊김과 연결, 단절과 접속의 반복이로 이해되는 영화적 순간이다. 스크린의 활동 무대를 바깥으로 돌리는 일은 그 자신의 신체와 단절되지 않고서도 신경계와 재연결되는 하나의 영화적 순간이었다. 이를 토대로 포스트 시네마는 ‘포스트’라는 단어와는 달리 어떠한 끊김을 재현해내지 않는다. 오히려 포스트라는 말은 무언가에 대한 목격담이 관객 주체를 만들어두는 일을 가리킨다. 포스트라는 표현은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이 발굴되어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생존의 논리에 더 가깝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성에 대해 말하지 말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