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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4. 2023

우연성에 대해 말하지 말 것


<파이트 클럽>의 규칙 중 하나는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말 것.”이다. 파이트 클럽을 말하지 않고서 파이트 클럽에 대해 알아가는 이 여정은 표면을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표정 짓기나 수화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소통하며 여기서 대상은 직접적으로 지칭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겉으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보이게 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규칙을 어기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말하기’의 반댓말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를 통해 ‘말하기’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말하기’가 대상을 직접 낚는다면, ‘말하지 않기’는 존재의 지도를 그리면서 대상의 위치를 파악하는 ‘전장의 안개’와도 같다.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일은 목표를 향한 정밀타격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보면 자신의 위치를 외부에 노출한다는 점에서 역으로 위치를 노출하는 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언가를 확언하는 것은 자신 또한 확언하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정밀성은 곧 구분짓기다. 우리가 영화에서 무언가를 발견할수록 그런 취향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굳건히 해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분짓기라는 개념으로 문화적 향유 계층의 분리를 주장했다. 이는 사람들의 취향이 확고해지는 만큼 그에 반비례해 계급적 분리 즉 정체성의 분화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짓게 해주는 것이면서도 정작 그에 대한 분류는 표면을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언어적이다. 이들은 ‘말하기’를 대신해 침묵하며 이때 침묵은 무언가를 밝히는 게 아니라 밝히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침묵이 하나의 발언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무언가를 의식해서 바라보는 것으로 하나의 취향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기도 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하는 순간 그에 종속되어버리는 관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에 관해 말하기를 꺼리게끔 한다. 그점에서 영화는 자신이 보았다고 여기는 것을 거부하게 하며 이는 곧 우리가 영화에 투입되지 않을 권리인 여행과 방랑의 권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동시에 그에 정면으로 응수하기를 꺼리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표면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미끄러짐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가 이미지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이미지에 대한 미끄러짐이자 이미지라는 수사에 관한 거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미지란 기본적으로 망막과 세계 사이의 맺힘에 따른 것이므로 미끄러질 때 상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미지는 암실과 같은 형식을 통해 빛을 맺어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무언가를 도출해내는 이 구조는 우리가 ‘본다’는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 단순히 세계를 응시하는 것만은 아님을 말해준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위해 미끄러짐을 택하는 매체이며, 이를 위해 세계 다수는 침묵해야만 한다. 정확히 말해 세계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 말하지 않는 상태인 침묵을 택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는 발언대에 서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클럽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규칙에 가깝다. 또한 규칙은 마치 링 위에 서는 것과도 같아서 정해진 룰에 따라 시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상대를 죽인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영화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둘중 하나는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영화는 전쟁과 비슷하다. 태그 갤러거는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서 “전쟁은 군대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적어도 이 말은 “영화에서 규칙은 프론트라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파훼는 부수어질 규칙 위에서만 성립하고, 만약 그곳에 아무런 전제도 없다면 우리는 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망막의 맺힘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생성의 원리를 따른다면, 프론트라인은 그것이 닿는 장소이며 여기서 이미지는 깨어지는 것 즉 ‘미끄러짐’을 요구한다. 프론트라인은 이미지를 깨부수기 위해 존재하지만, 반대로 최전선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전면에 나서 인식을 확장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요구받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카메라의 작동원리처럼 무언가를 가두고 통제하려는 환상이 아니라 무언가에 나서고 파괴하는 것말고는 불가하다는 점에서 늘 침묵하기를 요구받는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은 그에 대해 모두 아는 게 아니라 되려 알지 못하게 된다는 한계만을 낳는다. 그래서 영화는 규칙을 통해 스스로에 제약을 걸고 그 안에서 인식의 한계를 설정한다. 전쟁의 불확실성은 이렇게 우연성을 마주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


전쟁과 영화는 지형도를 그린다는 점에 그 유사점이 있다. 수잔 벅모스는 전쟁에서 “적을 지정하는 것은 집단의 출현을 예견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영화의 이미지가 맺히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프론트라인을 암시한다. 특히나 ‘적’은 고정되기만 하면 쉽게 파훼되므로 계속해서 자리를 옮기며. 이는 우리가 영화의 자리를 줄곧 다르게 지정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벤야민은 “영원한 전쟁의 뒤에는 제의적 전쟁이 있다”고 말하면서 패배는 빼앗긴 자에게 영원한 전쟁을 안겨주기에 가혹한 것이라고 첨언한다. 그 말인즉 전쟁에서 패배란 제의에 지배당하는 것, 기술의 파국적 세계에 감금당하는 일을 뜻하는데 이것이 벤야민의 매체론과 이어지는 대목을 생각하기란 쉽다. 기술에 의해 자행되는 꿈의 세계의 펼침에서 벗어나는 법은 충격 경험을 통한 깨어남이며 이는 전쟁의 시선이 맞닿는 곳을 없애는 것, 즉 극장을 폭파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벤야민의 이 말은 극장을 없애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게 아니라 극장에 대해 말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극장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 일을 통해 우리는 그와 같은 영원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장은 우리가 사고하게 될 전장을 설정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장의 안개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 전쟁의 안개는 “전황은 늘 불투명해서 직접 현장에 나가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사용된다. 즉 이 말은 우연성을 강조하면서 그런 우연을 마주하는 일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혼돈을 가리킨다. 우연성은 곧 예측불가능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전장은 혼돈이라고 보는 이 관점은 익숙한 공간과 전장에서도 작은 우연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온라인상에서 전장의 안개는 우리에게 익숙한 게임 등에서 장소를 정찰해 주어진 지도 전체를 조망하고, 이를 통해 한번 다녀갔던 장소의 지리를 익혀두는 행위를 뜻한다. 전장의 안개는 화면 상에 주어진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용자의 인식을 구획하고, 이에 정찰의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무언가가 출몰해올 수 있는 무대를 의식하게끔 한다. 이른바 지형을 미리 정찰한다는 건, 배경상의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히 무대 위의 연출이나 인물을 통해서만 어떠한 마주침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전장의 안개는 개연성이 담보된 만남을 가리킨다. 전장의 안개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전략을 구상하고 이를 담보로 할 수 있게끔 한다. 바둑이나 체스의 전략이 판이라는 하나의 형식을 통해 마련되듯이 전장의 안개는 예측이 수행되도록 돕는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도 전략이 수행되도록 돕는 게임의 규칙이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현실과의 유사성, 특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매체이지만 무엇보다 여기에서는 전략이 정상적으로 수행되도록 하는 판이 중요하다. 게임은 규칙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며 여기서 규칙은 플레이어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영화도 규칙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며, 여기서 규칙은 관객에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단순히 영상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가능성에 관한 수행과도 같다. 영화를 본다는 건 일종의 전략 시뮬레이션과도 같아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가능성이 벌어질지와 같은 일을 고려하면서 우연성을 맞닥뜨려야만 한다. 즉 우연성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하나는 배제되어야 할 불확실 요소로서이며 다른 하나는 질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다. 


전자의 경우 우연성은 우리가 예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적화 작업이다. 우연성을 배제하는 일은 예측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전쟁의 수행능력을 높인다. 이 경우 관객은 영화를 보는 일에서 자기 취향을 더 많이 찾으며 이를 통해 한번 방문했던 영화에 대한 이해도는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배제된 우연성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함과 동시에 그러한 위치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배경상의 연출과 인물을 제거하고 나면 무대에 서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지만, 이는 곧 자신이 모든 것을 마주하면서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에서 이미지를 마주하려는 자가 늘 프론트라인에 설 수밖에 없는 것, 즉 전쟁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 되려 전쟁을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연성을 배제하면 표면적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접촉의 기회는 늘어난다. 반면 우연성에 참가하는 일은 무대의 밖으로 빠져나가며 몸을 숨기는 일인데, 이를 통해 주체는 세계에서 은폐해 표면 아래로 통행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전쟁 극장의 반대편에 파이트클럽을 놓아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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