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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3. 2023

부여잡기로의 비평: 실패는 ‘찢김’을 뜻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해보고 싶다. 그의 말처럼 “막간의 시간”이 “위기라는 새로운 이야기”(p.16)를 만들어낸다면, 책의 말머리에 있는 에필로그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시간을 암시하는 듯 보여서다. 강덕구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친우인 이정상을 말하면서 그를 “백신 접종을 거부한” “용기와 유머”(p.464)의 소유자로 칭한다. 여기서 백신을 문제적 상황에 관한 예방책으로 가정할 때, 백신 접종 거부를 두고서 용기와 유머로 지칭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는 불가능성을 마주하는 코미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백신은 병증에 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신 거부가 불확실성에 대한 긍정인 것은 아니다. 지젝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위기의식이 부재한 막간에 있다면, 이야기하기의 불가능성이 대두하는 시대에서 병증은 ‘열병’이 낳을 수 있는 아카이브에 관한 한 가지 해답일 수도 있다. 시작과 목표를 같은 곳에 두는 아카이브는 기억의 부재를 보상하려는 심리에 의존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자신의 근원 삼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강덕구의 태도는 이러한 막간이 단지 미래 방향이 아니라 과거 방향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힌 것만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 없는 것 또한 막간이라고, 그래서 그에게 사이먼 레이놀즈와 같은 이들이 진단하는 레트로의 문맥은 단지 공백으로만 사유될 뿐이다. 그렇기에 강덕구는 이 아무것도 없음을 두고서 ‘텅 비어있음’을 마주할 용기와 ‘속 빈 강정’을 마주해야 하는 유머에 대해 말한다. 즉 강덕구에게 ‘공백’은 경험을 놓을 자리가 부재한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를 반복 관람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관객은 영화 속 세계에 여러 명의 타자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관객의 관람 경험을 투입할 공간을 잃으며 이는 곧 “기억이라는 장소의 상실”(p.134)로 이어진다. 이처럼 강덕구에게 공백은 영화 매체에서 기록의 일회성과 소멸이 아닌, 줄곧 덮어쓰기 되며 손상될 수밖에 없는 문화적 혼성의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 맺음이 출구를 제거해버린다”(p.242)는 점이다. 여러 번 방문하면서 얽힌 관계들은 되려 영화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없애버리고, 이를 따라 텍스트는 그 자신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방문한 관객들을 아카이브한다. 이곳은 앞뒤가 모두 막혔으므로 닥쳐올 위기도 없지만 반대로 마주할 수 있는 위기도 없다. 다시 말해서 아카이브는 용기를 허락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머이기도 하다. 이를 따라 강덕구는 “영화의 운명은 관객이 영화와의 동일시에 실패해 거주할 장소를 잃는 것”(p.252)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열병을 통해 공백을 파훼할 방법을 찾는다: 만약 관계가 출구를 제거한다면, 거꾸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제도를 논하려면 결국 우리가 제도의 맥락에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듯(pp.120~121) 관계의 바깥은 오히려 우리가 특정한 관계에 있음을 통해서만 말해진다. 그래서 공백에 대해 말하는 건 항상 우리가 그런 공백을 만들어냈다는 책임의 문제를 동반한다.


강덕구는 왕빙과 살인마 잭과 중국인 방에 관해 말하며 책임의 문제를 논한다. “영화 제작의 결과는 장면뿐이다.”(p.400)라고 말하는 강덕구에게 영화는 늘 특정한 장면으로만 작동하며 이때 그 장면은 길을 잃은 채로다. 왜냐하면 “맥락이 작동을 대신”(p.44)하는 시대에 “개인의 성장이 불가해졌다는 것”(p.45)은 마치 “제작의 과정은 블랙박스처럼 자체로만 사유된다”고 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따르자면 성장은 성장의 맥락으로만 이해되는데 마찬가지로 영화가 특정한 장면으로만 이해된다면 여기엔 ‘영화’가 블랙박스로써 빗금 쳐져만 있을 뿐이다. 왕빙의 ‘영화’가 아니라 ‘왕빙’의 영화가 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영화는 왕빙의 맥락으로만 작동하며 왕빙의 재현이나 윤리는 왕빙을 하나의 장면으로만 삼을 뿐 출현의 계기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나는 실패한다. 그리고 무수한 삶을 산다.”(p.274) 그래서 출몰해 오는 것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이들은 거진 패배자나 다름없으며 여기서 그 주체는 여러 다른 맥락 안에서만 혼성으로 등장해오는 리믹스 음악과도 같다. “에코, 노이즈, 딜레이로써 리얼리티를 변형시키는 것”(p.92)이란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는 혼톨로지의 습득과정만을 거칠 뿐이고, 이는 블랙박스의 내용물을 관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대략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혼톨로지가 과거를 퍼올리는 과정에서 가능성을 함께 건져 올린다면,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리면서 위치에너지를 갖는”(p.34)다는 역학은 적어도 우리에게 ‘추락’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남긴다. 


강덕구가 중국인 방에 대해 했던 지적사항인 “패배자 주체”(p.428)는 “영화 관람의 실패 요건인 언어화의 실패를 달성한 관객 주체”(p.427)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패배 선언인 것만은 아니다. 강덕구에게 실패는 무수히 많은 삶을 살기 위해, 혹은 길을 잃은 채 미궁으로 들어가자는 짐 오르크 기능의 일환으로 사유된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자”는 이 초점 이탈의 사유는 세계를 인지하는 게 주체라는 점에서 세계의 초점 이탈이기도 함을 주장하는데, 이렇게 어긋난 시간의 이음매(p.92)에서는 “나의 성장이 불가해진 시대”가 출몰한다(p.46). 이때 우리는 다시금 글의 초장으로 돌아가 ‘막간의 시간’에 대해 언급해두어야만 한다. “막간은 막간이 아니다. 막간은 사실상 막간을 작동시키는 제도적 실천을 의미한다.”(p.116) 영화라는 블랙박스가 특정한 결론 없이 자체로만 사유된다는 점에서 막간이라면, 강덕구에게 실패는 ‘찢김’을 뜻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파열은 십자인대나 성장판처럼 무빙 이미지의 기능과 성장에 치명타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파열된 시간은 “비선형적 세계질서가 이미지로 변형되는 과정”(p.187)이라는 점에서 이미지를 회복의 서사에 놓는다. 선형적 시간은 이미지로 변형되기 위해 일단 한번 찢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 방법론에서 우리는 그러한 찢김이 위치 에너지의 일종이라는 사실, 즉 ‘추락’으로써의 실패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대안이 없는 세계”를 말하던 마크 피셔에 열광하던 강덕구의 태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라는 유형지에서 다시 ‘정말’이라는 도약”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지정학적 맥락을 옮겨다니고 안팎이 엇갈리는 시간으로 말려들어 가는 힙스터리즘”(p.51)으로 이어진다.  


“비극을 코미디로 만드는 것은 비난이나 조롱이 아니라, 비극적 현실을 바라보는 ‘시공간’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다.”(p.144) 이처럼 비극은 어느 정도 공백화됨으로써 기억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코미디는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르기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익숙하기에 맥락에 탑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덕구는 용기와 유머 사이를 오가는 방황이 바로 비평의 의무라고 말한다(p.105).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위치 에너지의 맥락에서 강덕구의 ‘실패’는 성공에서 기원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강덕구에 따르면 카메라에서 재현의 윤리가 부절적한 지적인 것은 카메라가 항상 특정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에 ‘성공’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성공에는 기계적인 원리에 따른 과정이 담보되어있을 뿐. 어떠한 의도나 과정을 투입하고 선보이는 것에 실패한 것은 아니므로 카메라는 항상 성공적으로 우리 앞에 도착한다. 이는 강덕구가 왕빙의 영화를 두고서 아프리카 BJ의 영상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 것에서도 발견되는 대목인데, 특히 지속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강덕구는 다음처럼 말한다. “지속은 리얼의 무대화를 위한 인위적인 무대 장치다.”(p.335) 이처럼 지속은 리얼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요구되는 선제조건에 불과하며 그 말인즉 지속이 멈출 때 발생한다는 ‘공백’이 단순히 경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경험=지속으로 바라보면서 “단 한 순간도 카메라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기억의 논리를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기억은 아니다. 영화의 자리가 시간의 지속 안에 퇴색되는 과정은 영화에 관한 기억을 조각내버렸으며 이에 따라 오직 ‘반복’만이 유일한 대안이 된다. 위에서 말했던 출구 없음의 문제가 기억의 문제로 오인되는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자리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막간’을 기억과 동일시했고 이제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탐구는 곧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에 등치되었다. 그러나 강덕구는 그러한 현실을 파열시켜 미궁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본다. 강덕구가 “어제를 파열시켜 현재에 흘려보낸다” (p.248)고 설명하는 <타부>에서 그게 잘 드러나는데 가령 클로즈업 쇼트의 역할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이 그렇다. “클로즈업으로 신체는 분리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잘린 신체를 기준으로 나를 구성한다.”(p.250) 강덕구에게 이 찢김은 실패 아닌 성장과 회복을 암시하며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와 맺은 관계”는 지속 안에서 사라졌던 출구를 다시금 드러내면서 관객에게 ‘막간’의 맥락을 제거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시간이다. 그러니 “거주할 장소를 잃는 것이 영화의 자연스러운 운명”(p.252)이라고 보는 강덕구의 말은 집 없음이나 방향상실의 감각이기 전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보았던 하이데거 테제의 변형에 가깝다. 영화 관람이 언어화의 실패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면 관객은 존재화에 실패한 무언가로 보아야겠지만, 강덕구는 바로 그렇게 실패한 상태를 두고서 ‘자연스럽다’고 보며 이는 또한 ‘무수한 삶’을 살기 위해 선제적으로 요구되는 ‘지속’의 상태에 가깝다. 또한 그렇게 보아야만 <천일야화>의 무수한 삶에 관한 강덕구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다.


“껴안는 이중구속”(p.260)과 “부여잡기”(p.263)는 주체가 자기 완결성을 지닐 때 시도하는 게 불가능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스스로를 껴안는 것은 불가능해서다. 이 대목에서 강덕구의 의견은 홍상수와 같은 형식의 문제에서 벗어나는데, 왜냐하면 ‘찢김’이 출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방향상실과 불일치는 단지 지속이기만 할 뿐 더는 차이와 반복으로만은 고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강덕구에게 영화와 비평은 그러한 찢김의 상태를 끌고 가는 일에 가까우며 무언가 정직하거나 올곧거나 하는 식의 발언은 ‘합리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이는 특히 강덕구가 “비평은 약속을 지키는 것에 실패함에 따라 발생한 비천함을 내부로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문화적 비천함”(p.109)에서 바깥 세계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서 나오는 대사 중에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게 있다. 자기모순을 직시하면서 계속해서 어떠한 지속을 향하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강덕구가 이동진과 정성일을 ‘기능’으로 소환하는 일을 본다. “많은 이들이 이동진을 깐다. 그렇지만 이동진이 펼쳐놓은 자장 안에서 우리는 이동진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pp.118-119) “실패를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보기”(p.113)를 말하는 강덕구에게 영화 비평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의 활로를 모색한다. “사랑은 폐쇄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기에”(p.258) 항상 파열을 동반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비평은 완고한 세계와 자기완결성에 의도적인 파열을 내는 것이며 그것은 실패의 일종이다. 이동진이 펼쳐놓은 비평의 자장 안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찢김을 경험함으로써 이를 출구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영화 비평은 항상 어긋나고 균열 있는 게 될 수밖에 없다. 강덕구에게 붕괴는 사랑을 뜻하고, 이 자화상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균열이기도 하다(p.178).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p.236) 이는 “붕 뜬 좋은 예술만이 아닌 가라앉은 나쁜 예술”(p.108)을 바닥에서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으며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분자적 불확실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들어 올려 위치 에너지를 확보하는 일은 언뜻 보았을 때 찢김처럼 보이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불확실성을 두고서 용기와 유머를 가리켰던 강덕구에게 비평은 그러한 맥락에서의 백신 접종처럼 보인다: 비평은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로 인해 불확실성/찢김이 발생한다면 되려 비평은 쓰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강덕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하고 근사한 기능은 이야기를 기이하게 전달하는 것”(p.25)이다. 여기서 기이함이란 피셔의 맥락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으로 지칭되는 파열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혼성 모방인 ‘프랑케슈타인’적 주체를 가리킨다. 강덕구는 비평을 두고서 미궁과도 같은 것이라 말하고 또 영화가 미궁이라는 점에서 영화 비평은 미궁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언뜻 보았을 때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나 여기서도 우리는 혼톨로지가 선사하는 시간의 어긋난 이음매를 마주한다. “세계의 잡음은 오히려 개방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하나로 집중된다”(p.97) 소위 문턱을 제거한다고 표현하는 이러한 혼성에서 음악은 부분과 전체 모두로 받아들여지면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리는 위치 에너지의 쇄신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때 들뢰즈식의 차이와 반복은 부서지는 해변의 파도가 아니라 어떠한 지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과정’안에 우리를 놓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손안에서 파열을 부여잡기만 할 따름이다(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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