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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6. 2023

밀려난 바깥에서 벌어지는 장소

<이니셰린의 벤시>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영화를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관한 물음이었다. 어느 정도 의도가 드러나는 작품들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제기하는 게 가능할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밴시>는 아일랜드의 내전이라는 배경을 가져가는 것으로 서두를 연다. 이를 통해 ‘바깥’은 구체화되고 내부는 특정된다. 비록 영화는 내전이 벌어지는 본토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지만, 조나단 글레이저의 최근 영화처럼 내전은 디제시스 밖에서 줄곧 소리의 형태로 화면을 침범하고 또 위협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때 영화는 내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다가올 것’을 예견하는 위치에서 특정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죽음을 예견하는 존재인 밴시를 말함과 동시에 이것을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로 설정한다. <밴시>에 등장하는 노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앞으로의 동선을 예견하며, 인물 간에는 단순한 헛소리로 치급되지만 이야기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희곡에 등장하는 도식적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도식적 인물로 취급된다는 말은 기능적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이는 곧 수행에 대한 예측이 얼추 가능하다는 뜻이다.


죽음을 예견하는 신화적 존재인 밴시는 영화의 제목이라는 점에서 영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제목’은 관객으로 하여금 내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제목이 갖는 역할을 고려하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지정된 바깥에 반해 고립된 섬과 그곳에서 예견되는 죽음을 통해 일종의 살인 예고를 날리는 셈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상하게 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일종의 서스펜스로 동작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상이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내부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밴시’는 이니셰린 섬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스펜스는 영화를 꾸려가는 작법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관객이 살아있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즉 <이니셰린의 밴시>는 죽음의 형식을 지정함으로써 주체의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둔다. 이 점에서 <밴시>는 영화를 통해 관객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곳에 관객을 초대하는 한 가지 좌담회의 형식을 재현하는 듯한 면이 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이야기의 주변을 빙빙 도는데 영화 내내 무언가를 줄곧 예언하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지정된 형태로의 결론을 본다. 당사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은 뚜렷한 방향성을 제거함으로써 계속되는 추리에 관객을 가둬놓는다.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는 장소를 떠날 수 없고, 이는 목표를 계속해서 따라가야만 비로소 죽음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 영화는 그러한 죽음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이러한 죽음은 회피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오직 실현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마치 영화는 끝나야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데 결국 모든 영화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건 ‘언제’와 ‘어디서’라는 두 개의 조합이다. 시간과 공간 말이다. 영화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확증하는 가운데, 우리의 주된 목표는 어떠한 순간을 마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어차피 끝나야만 한다는 영화가 아니라 바깥을 의식하게 한다. 누군가가 죽는다 한들 영화가 죽을 테지 내가 죽는 건 아니므로 어쨌거나 우리는 현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언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플롯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플롯은 특정한 순간을 마주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자신을 에워싼 현실에 의해 서서히 침투당하는 일이다. 여기서 플롯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이 사실은 우리가 아닌 그들에 의해 수행될 뿐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삶의 과정을 성취가 아닌 버텨냄의 연속으로 만든다. 즉 예언은 특유의 두루뭉술함으로 영화의 바깥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으며 그렇게 보면 <벤시>의 죽음은 영화가 초장에 보여주었던 내전의 양상과 부딪힌다. 한쪽에서는 바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안쪽을 드러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바깥에 죽음이 있기에 되려 내부에서도 죽음은 시간문제라는 식으로도 이해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영화 매체를 두고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먼저 여기에는 영화의 죽음이 있다. 이때 누군가는 영화 매체를 두고서 영화 이외의 것을 배제하는 방식을 택하는 반면, 누군가는 죽음은 특정한 순간일 뿐 어떠한 자리의 상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꽤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영화를 종말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영화 또한 필멸자의 입장에서 우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 경우 영화는 매체 자신의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의 순간을 교란시키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좌표를 교란시킨다고 한들 매체 자신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매체는 <벤시>의 이니셰린처럼 바깥에 무언가가 벌어지며, 그 안에서 익숙한 친구가 어느 날 자신을 떠나버리는 이상한 장소일 수 있다. 바깥을 배제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예전까지 알아왔던 영화가 자신을 밀어내는 이상한 경험을 하는데 그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에 예술혼을 불태우려 든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를 찾아 헤매는 영화가 있는가 한편 존재의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 죽음이라는 형식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여태까지 잘 지내왔지만, 의미를 찾는 쪽이 이유를 찾는 쪽을 밀어내는 이 모습(이동진)은 마치 후기 영화의 논쟁들이 단지 밀려난 바깥에서 벌어지는 장소일 뿐임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


판데믹이 이제 막 끝난 시점에서 흥미로운 건, 판데믹과 포스트 시네마를 엮는 작업이 관객의 자리를 생각해보는 작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판데믹이 끝난 자리에서 판데믹 시기를 생각하는 일은 관객에게 있어 ‘바깥’으로의 재배치를 보여주니 말이다. 가령 판데믹이 조명한 폐허라는 단어는 재배치라는 단어는 이주와는 달리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본다는 점에 무게를 둔다. 이주와 재배치 모두 의식의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재배치의 사례는 눈을 깜빡이거나 잠을 자는 일처럼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자신일 수 있는지를 논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같지만 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을 한다. 인간관계도 사는 곳도 인종이나 성별도 전혀 달라진 게 없지만 무언가 자기가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물질적인 토대는 같지만 이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실질적인 단절로 기능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기존의 구성이나 형식에서 현재의 자기를 과거의 기억에 연결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회복에 이른다. 


요컨대 잠을 작은 죽음에 빗대는 몇몇 견해를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의식의 재배치는 차이와 반복의 맥락에서 과거를 발명하는 ‘바깥’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단절의 서사에 관심이 있었다. 시작된 것이 중단되는 일이 아니라 중단된 이미 주어지고 정해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일은 다수의 이야기가 자신을 여는 방식이다. 이른바 이야기가 ‘시작된다’라는 식의 구성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이미 존재했지만 단지 의식이 끊겨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관객 주체의 손쉬운 자리가 되곤 했다. 몇몇 게임이 시작지점을 인물이 일어나는 이벤트로 구성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제서야 일어났구나!” 플레이어가 등장인물에 이입하는 방식은 “당신은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말하며 자기들이 말하는 과거를 플레이 시점에 연결하는 것이다. 몇몇 작법에서는 이를 기억상실증으로 손쉽게 풀어가기도 하지만 영화의 경우라면 그게 불가하다. 왜냐하면 관객은 항상 현실에 단단히 연결돼있고 이는 곧 우리가 동시대라 말하는 지배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의 심리가 잠시나마 지배적 현실에서 ‘단절’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일탈의 맥락이라고나 할까. 초기영화에서도 그랬듯이 영화는 비교적 느리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바깥과 단절되어 완전히 독립적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빠름’의 개념이었다. 맥클루언의 고전적인 방식처럼 현실이 ‘쿨’했다면 영화는 ‘핫’했기에 관객은 무언가 시작된다는 인식을 갖고자 극장에 방문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은 극장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왜냐하면 극장이 없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지배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단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판데믹이라는 상황에 대한 고찰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디지털 시네마, 또는 포스트 시네마에 관한 사유는 여전히 영화를 현실의 평면에 놓지만 인식의 끈을 놓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극장은 여전히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고 전통은 과거에서 줄곧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판데믹이 등장했다. 여기서 극장은 우리가 쓸 수 없는 카드였다. 영화를 구성하는 기술적 기반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이 빠져나가자 영화는 그 자신의 지배적 현실을 상실했다. 


이는 단순히 현실과의 단절을 겪던 예전 상황과는 달리 처음부터 영화에는 극장 따위 없었다고 말하면서, 되려 극장을 영화에 대한 한 가지 선택권으로만 보게 했다. 그러니까 판데믹은 우리에게 과거를 잊게 해주었으며 이를 따라 기존에 포스트라는 말로 구분 짓던 방향성은 도리어 우리가 반복하기 위해 다시금 착안되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반복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포스트가 차이였다면, 그게 더는 차이로 기능하지 않는 현실에서는 과연 무엇이 ‘반복’일까. 이 경우 반복이라는 말은 제시되어 온 자신을 기성질서 안에 편입하면서 과거를 낯선 것으로 바라본다.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가 더 낯설어지면서 과거는 우리에게 포스트에 다름없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라는 말이 종말론의 경향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과거에 포스트가 엔트로피의 감소에 중점을 뒀다면 기억상실은 그러한 감소나 증가를 단지 좌표계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이 기억상실의 시대는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을 새로 발명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즉 여전히 몸에 소속되어있으면서도 몸을 벗어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아니, 사실은 바라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고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일은 영화와 동시대성의 관계를 묻는 것과도 같다. 단지 영화만이 동시대를 비추는 거울인 것만이 아니며 되려 동시대야말로 영화를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다. 영화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만큼이나 동시대가 영화를 품고 있다고 본다면, 현실이 영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때 영화가 동시대를 품고 있다는 가정 또한 가능하다. 이를 위해 오진우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판데믹의 얼굴을 지적한 대목을 인용해보려 한다. 오진우는 <드라이브>가 판데믹이라는 시대상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를 얼굴에 빗댄다. 이는 이강현의 <얼굴들>이 “존재들이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에 대한 영화”이자 “존재와 위치”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드라이브>가 판데믹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드라이브>는 판데믹이라는 지리적 연표를 끌어옴으로써 자신을 동시대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내림은 되려 그 존재가 시스템 안에 존속하려 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몸에 대한 회귀적 요청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동시대라는 하나의 거울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드라이브>는 그런 거울을 마주함으로써 영화 같은 현실인 판데믹을 끝내 영화적 현실에 비쳐 보인다. 영화적 현실은 영화 같은 현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영화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이 사라진다면 ~적이라는 표현은 단지 채워지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까 판데믹을 영화적 현실에 비추어 본다는 건 무엇을 자신의 지배적인 인상으로 삼을 것인지를 따져 물으면서 이를 토대로 방향을 잡는 일이다. 김병규가 홍상수의 근작 <물안에서>를 두고 판데믹 시기를 지적한 것도 그렇다. 김병규가 동시대 영화의 특성으로 지적한 “제도 바깥의 영화 촬영장, 워크숍과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임의적 공간”은 <드라이브>에서도 그렇듯 동시대 영화의 어떤 경향으로 사유된다. 하마구치와 홍상수의 영화 계보 안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영화 만들기의 경향성에서 우리는 판데믹이라는 예외 사태가 제도의 바깥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닐지를 생각해보는 게 가능하다. 


우리가 “‘영화’라는 사물에 부여된 익숙한 규칙을 조정하고 그 규칙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정한 토대에서 작동하던 것인지”를 깨달았던 게 바로 판데믹이었고 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몸’이 사실은 팔을 움직이고 숨을 내지르기 위해 들었던 과정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경험과도 같다. 이들 영화는 익숙한 것을 다시 돌려봄으로써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신기하고 낯선 경험인지를 되새긴다. 간단히 말해 이는 동시대성이라는 말이 동기화로 이해될 가능성, 즉 눈에 비치는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는 얼마든지 불일치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는 판데믹과 같은 상황에서의 속도 차를 통해 드러나며, 아피찻퐁이 줄곧 되묻듯이 영화에서 빠름과 느림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일 뿐 무언가에 ‘관해’ 상대적이지 아니한다. 이쯤에서 폐허라는 말을 꺼내본다면, 우리는 폐허가 우리의 오래된 과거인지 아니면 먼 미래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동시대 영화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게 어떠한 ‘실천’ 즉 우리가 행동해야 할 긴급함을 지정한다고 여기곤 하나, 동시대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설사 그게 촬영 당시에는 동시대였다 한들) 그러한 ‘일상’을 지정 가능한 형식으로 만들어두는 일이다. 


마치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려면 ‘나’라고 되물을 줄 알아야 하듯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현실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또한 우리 자신은 그러한 영화적인 것에 투입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워크숍은 실천이라는 점에서의 워크라기보다는 그런 일들을 판매하는 자본주의 환경에 포섭되어 있을 것이다. 이른바 워크/숍은 일을 더 즐겁게 하기 위한 세일즈쇼이며 마찬가지로 동시대 영화가 워크숍에 빗대어진다면, 이는 우리의 동시대가 더욱 즐거운 무빙 이미지 속이 되기 위함인 게 아닐까. 이것이 단순한 흥미, 혹은 비평적 시선이 깔린 작업물에만 그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판데믹을 어떠한 재난이나 사건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객 일반의 환경적 재배치로 사유함으로써 매체 일반을 재고하는 게 가능하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영화’가 끝나는 시간을 향해 가는 걸음이다.”(김병규) 우리가 여태까지 알던 걸 떠나보내거나 혹은 포스트 프로덕션이 끝난 후의 마지막 피날레를 벌이거나 하는 식의 이중성은 우리가 배치된 현실과 상실에서 깨어나는 영화로 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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