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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1. 2023

누가 죄인인가 vs 누구도 유죄로 만들지 말라


「악(당), 약동하는 모티프들」에서 윤아랑은 악인을 발생하는 장치dispostif의 기능에 대해 말한다. 에이드리언 마틴을 변용하자면 여기엔 “악, 악당, 부정적인 것”이라는 삼각점이 있다.[1] 칸트와 헤겔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부정성의 역할을 상세히 살피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의미의 체계와 구조라는 점에선 이들 체계의 기능에 대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악과 부정적인 것은 서로 분리된다. 부정적인 일을 하는 이가 꼭 악인 것만은 아니다. <다크 나이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악’은 그야말로 사회체계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필요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악당이 꼭 ‘악’하게 행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악당이란 서사적 측면에서 반동인물로 이해되며, 이를 따라 생각하면 <울펜슈타인> 시리즈의 주인공 같은 부류는 ‘악당’이지만 ‘악’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혹은 악당이 꼭 무언가를 부정하는 존재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할만하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한스는 나치 체계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인물로서, 그들의 악을 평범한 것으로 인정해버릴 때 악인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악이 평범하다고 볼 수 있을 가치라면, 악인은 범주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건대 이런 논의는 ‘죄’로 바꾸어 보아도 무리가 없는 듯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인은 법률 체계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며, 이는 곧 악인과 죄인을 마땅히 구분 짓지 않는 이유가 된다. 즉 ‘악하다’고 볼법한 행위는 대개 위법행위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악을 악 자체로 보기보다 개념과 주체, 대상이라는 세 가지 분류로 다룰 때, 우리는 악을 전회이기보다 체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즉 악을 두고서 무언가를 촉발하거나 매개하는 반응로로 사유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죄를 하나의 체계로 이해한다는 건, 악인이 이들 체계에 대한 매듭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악인에게서 죄를 발견하는 일은, 죄에서 악인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악인이 죄를 끌어올리는 매듭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작물에서의 ‘죄인’과 ‘악인’을 두고서 각각 ‘죄의 체계’와 ‘악의 체계’를 집산하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 가령 뮤지컬 <영웅>의 주요 스코어 중 하나인 “누가 죄인인가”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일을 따라가며 “자신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가 나열하는 근거는 반대로 일제가 말하는 구형 사유이기도 하며, 이는 ‘죄’와 ‘악’에 대한 쌍방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누가 죄인인가”는 안중근 의사를 죄인으로 판결하는 일제에 던지는 물음이자, 자신의 행동이 ‘죄’라고 여겨질 때 ‘악’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간을 죽인 건 범죄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여기고 있을까. 인간은 악하기에 죄를 짓는 것인가. 법정에 선 안중근 의사는 ‘자신은 죄인이지만 악인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한 죄를 받지만, 그 대상이 인간의 법과 도덕률을 어긋난 이토였으므로 죄인을 판결한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흐름은 죄와 악의 개념적 분리이다. 죄가 명문화된 법률에 대한 위반사항을 가리킨다면 악은 관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죄가 절대적이라면 악은 이를 횡단한다. 횡단하는 만큼 안팎으로 위상이 다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중력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중력은 뮤지컬이 묘사하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하나의 무대로 만들면서 선과 악의 정의를 일시적으로 중첩한다. 일본의 재판정이기에 안중근이 악인인 게 아니라, 어떠한 ‘입장’에서는 이것이 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볼 때 이 장면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의사(義士)의 행동을 의사(意思)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죄를 다루는 태도는 악과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인물을 판단하는 일은 상당히 모호해진다. 또한 죄는 악의 체계를 내포하고 악은 죄의 체계를 내포한다고 보았을 때 이 둘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쉬워진다. 이하 죄인과 악인으로 축약할 수 있는 이들 체계는 우리가 창작물의 죄와 악을 구분하는 일에서 한 가지 준거점이 되어준다. 가령 <원신>의 폰타인 지역의 서사는 “누구도 유죄로 만들지말라”는 주제의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보는 일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 누구도 존재하게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는 폰타인에 내려진 예언과 연결되어 한 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서사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저 태어났기에 죄가 될 뿐이라면 이런 세상에서 악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죄가 아닐 테다. 악행을 저지르기도 전에 죄가 있다는 말은 흔히 “신생아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 어디로 가는가?”라는 식의 명제로 던져지고는 했지만 이런 판단의 문제점은 죄를 선험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악에 대한 기준이 죄를 초과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악인은 선과 악을 판단하기 이전의 문제로서 무엇을 ‘죄’라고 볼지와는 별 상관없다. 


폰타인의 이야기에서 악인과 죄인은 서로 구분된다. 소녀 샘물 살인 사건으로 악인을 보여주는 1막과 2막에서 메로피드 요새를 통해 죄인을 보여주는 3막과 4막은 큰 줄기에서 ‘존재’에 관한 상반된 시선으로 제시된다. 이는 “악은 죄를 초과할 수 없다. 악인은 죄에 한해 독립적이다.”라는 점으로, 존재함이 곧 폰타인의 원죄로 작동하는 이들 세계의 불합리를 잘 드러낸다. 풀어 말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고, 범죄자란 존재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악인은 죄의 체계를 존속시키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이를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악인이 없다면 죄는 작동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죄인이 없다면 악이라는 말도 그 기능을 잃는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두고서 ‘있다’고 지적할 때는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면 죄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존재를 인정받는 게 아닐까? 폰타인은 원죄를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이상한 결론, 이를 따라 무엇이 죄인지를 지적하는 일에서는 ‘존재함에는 마땅한 구분점이 없다’는 도식이 도출된다. 이 도식에서 폰타인은 죄와 악을 어우르는 하나의 체계로서 제시된다. 


악이 죄를 초과할 수 없다면 인간의 악함은 결국 태어남 이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인간의 악은 늘 세계 이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존재함이 곧 죄이고, 태어났기 때문에 악이 생겨난다면 악은 인간만의 고유함으로써 제시될 가치가 충분하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 악을 행함으로써 되려 자신이 세계의 일원이라고 여길 공산이 크다. 달리 말해서 이는 죄보다 악이야말로 인식의 범주에 든다는 점을 뜻한다. 존재 자체가 죄인 상황에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일의 불가능성에 속죄의 불가함이 올라타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 악은 인간이 살아가며 서로를 바라보는 일에 깊이 기댄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 죄는 인간의 범주 바깥으로서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된다. 태어남이 곧 악의 체계가 되어버린 이 상황은 그 종국에서 자기를 소멸하는 쪽이 될 수밖에 없는데, 폰타인의 이야기에서는 이것이 푸리나와 포칼로스라는 분리를 통해, 죄인을 위해 악인이 희생함으로써 존재를 풀려나게 하는 쪽으로 묘사된다. 다른 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던 포칼로스는 폰타인 사람들이 존속하는 체계를 위해 악인을 자처했던 것이다.


다른 사례도 점검해보고 싶다. <진격의 거인>의 만화에서 제시되었던 “학살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악인에 대한 미화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진 바 있다. 이러한 제시에서 ‘고마워’는 어긋난 도덕성에 대해 내려지는 말로 이해됐다. 에렌 예거가 벌인 학살극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이 간접적으로 입게 된 수혜를 긍정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대목은 에르디아라는 죄의 체계를 존속하는 일로써 에렌의 행동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가 이를 위해 에르디아인의 죄를 짊어졌다는 점에서 그를 대속의 행위자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학살자’라는 말은 그를 악으로 호도하여 에르디아 체계의 존속을 꾀한다는 점에서 다소 부정적이었다. 이후 애니메이션화가 진행되며 수정된 판본에서는 이러한 대사를 삭제하고, “우리들”과 “지옥에 함께 가자”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에렌을 에르디아 체계에 편입했다. 이는 즉 에르디아 체계의 대표자로 만들면서 자기들의 죄를 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에렌을 통해 ‘바깥’ 세계를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원죄에서의 ‘해방’이라는 주제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점에서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진격의 거인>의 판본은 다시금 악인을 생각해보게 한다.


폰타인 전체를 위해 또 다른 자기에 500여 년간의 연기를 맡긴 포칼로스는 악인이었을까? 비록 자기에 맡긴 역할이라 해도 결국에는 판단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첫 번째로는 개인을 희생해 모두를 구한다는 당위가 있지만 두 번째로는 개인에 모든 걸 맡긴다는 위행이 있다. 즉 개인이 실패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세계는 개인에 묶여있다. 이는 폰타인이라는 죄의 체계를 푸리나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그녀를 악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존재한다. 푸리나를 통해 티바트 세계를 악으로 규정하고, 이 과정에서 원죄에서의 해방을 꾸리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무대를 더 큰 곳으로 옮긴다. 개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한다는 말은 또 하나의 개인이기도 한 자신이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된다는 점에서, 바깥과 내부를 교환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참작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이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의 이후, 세계의 바깥 등을 매듭지으면서 그 자신의 사망과 함께 안팎을 허무는 방식이다. 즉, 여기서 악인은 이와 같은 횡단을 위해 마련된다는 점에서 비교적 옹호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듀나. 박혜진. 전승민. 김용언. 강덕구. 전자영. 최현지. 이융희. 윤아랑, 『악인의 서사』, (서울: 돌고래, 2023)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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