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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6. 2023

스트리밍 서비스: 머무르는 방식에 관한 제언들


요아소비는 최근 한국에 열린 콘서트 표가 모두 매진되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지만, 이들이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의 주류와 거리가 멀다는 걸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아니, 별로 없다고 보는 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요네즈 켄시와 요아소비는 기존에도 아는 사람만 아는 가수에 속했고, 그게 단지 서브컬처 팬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2020년대를 전후로 점점 와해되어가는 서브와 주류 사이의 간극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 노래를 물 위에 드러냈다. 예를 들면, 요아소비의 아이돌(アイドル)은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의 오프닝곡으로 주목받았던 경우다. 전후관계를 따지면 이전에도 더 많은 명곡이 있었겠지만 한국이나 글로벌에서는 확실히 이 곡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노래 자체가 듣기 좋다는 기본적인 면이 뒷받침되긴 했어도 결국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춤을 커버업하는 ‘쇼츠’ 챌린지에 힘입은 결과다. 아이돌 컨셉의 이 만화에서 ‘노래와 춤’은 짧은 시간에 임팩트있게 뭔가를 보여주는 ‘쇼츠 챌린지’에 알맞았다. 노래에 맞춰 춤을 커버업하는 영상이 쇼츠 전역을 뒤덮자 이들 플랫폼의 주요 소비층인 10대, 개중에서도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사이의 연령이 호응했다. 무릇 유행이란 게 그러하듯 미디어는 서로를 참조 삼아 커버와 리믹스를 반복했고, 이를 통해 ‘아이돌’은 그 인기를 뿌리에서 가지로 끌어 올렸다. 이른바 상향식 전파에 따른 이 인기는 그 특성에서 자생성이 있었다. 


커버영상을 보고 음악을 찾아 듣는 일이 뿌리 문화로 여겨질 리 만무하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언제나 문화와 국적 등을 초월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서브와 주류 간의 영역이 와해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다. 일단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다 대중에 다가설 수 있게 됨으로써 대중이 듣고 향유하기에 무리가 없는 음악을 선곡했을 공산이 크다. 접근성이 좋아짐으로써 최대한 ‘서브’ 느낌이 나지 않도록 했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이는 다음에 소개할 방식과 반대된다. 애니메이션 삽입곡이 대중에 전파되려면 일단 애니메이션의 수요층에 호소력이 있어야 하며, 이 경우 음악은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즉 기존에 있는 음악을 가져오는 정도가 아니라면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곡은 그 결에서 기성 음악의 작법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약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곡이 무언가 주류 음악과 닮아 보인다면, 그냥 그렇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주류 음악이 서브처럼 변해버렸거나 하는 말밖에 되진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음악에 장르가 있다 한들 후자일 경우는 크지 않으므로, 아무쪼록 전자에 배팅해보는 게 옳을 테다. 자, 이제 물어보자. 애니메이션의 대중화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시청자 공략의 일환일까, 아니면 음악 자체가 또 하나의 미디어믹스가 되게끔 하려는 상품화 전략일까? 이는 각각 시청하는 사람이 주체, 주변부의 바이럴이 주체 정도의 차이로 풀이되겠으나 결정적으로 이 중심에는 ‘스트리밍’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아야 하겠다. 


과거나 지금이나 오타쿠 계열의 작품들이 작중 성우들이 ‘노래하게 하는’ 방식이 있다. 이를 위해 노래를 잘하는 성우를 기용하는 등의 행보가 이루어졌고 이는 공연이나 앨범 같은 파생상품으로 이어졌다. 노래를 소재로 한 작품은 작중 인물=성우가 되는 동일시의 방식으로 상품화됐다. 다른 한편 보다 전문적인 가수나 그룹을 기용함으로써 ‘평소 듣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노래를 만드는 방식이 있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서사와 내용의 초입으로써 오프닝과 엔딩을 하나의 뮤비로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매체의 관심을 끄는 방식이다. 즉 애니메이션을 홍보하는 장치로서 음악은 한편의 광고가 된다. 이런 제작방식은 요아소비의 사례처럼 가수의 음악을 듣기 위해 애니메이션 영상을 챙겨보는 일을 유도할 수 있고, 주객이 전도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경우 삽입곡을 토대로 한 애니메이션 PV가 만들어져 한편의 짧은 외전으로 기능한 “Let you down”이 있다. ‘애니메이션 형태의 뮤직비디오’는 흔하지만 보통은 작중에 나왔거나 미공개된 영상을 가지고서 만든 것과는 달리, 별도의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은 기성 뮤직비디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아소비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요아소비의 곡을 따라 만들어진 애니메이션풍 뮤직비디오는 이 영상에서만 있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에게 음악을 홍보하는 효과가 있었다.  


과거 애니메이션 음악이 의미 없는 가사를 반복하거나 작중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줄 뿐인, 그냥 귀엽기만 할 뿐인 후크송 계열로 이루어졌다면 근래의 추세는 오프닝과 엔딩을 하나의 홍보 책자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오프닝과 엔딩은 그 말대로 작품을 여닫는 문으로 기능하면서, 대중에게 작품으로의 유인책이 되어준다. 특히나 이는 과거의 애니메이션 음악이 인터넷 투고 사이트에서 UCC의 형태로만 올라왔던 것과는 달리, 중독성 있는 구절에 화려한 음악으로 무장한 1분 이내의 클립을 생산하는 일에 주력을 둔다. 가령 23년도 10월경에 유튜브에서 유행한 ‘로리신 레퀴엠’은 그 본류가 음지 문화임에도 그냥 그림과 멜로디가 흥겹다는 이유만으로 소비됐다. 건전하지 않은 가사지만, 일본어이기에 이해할 수 없으니 멜로디와 영상만을 흡수하게 됐고 이는 다시금 클립으로 편집됐다. “부드럽고 미묘한 프레임의 애니메이션풍 작화”가 영상을 클릭하게 했다는 평이 주를 이루는 이 뮤직비디오는 한때 “가사를 절대 검색해서는 안 되는 노래”로 떠돌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평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클립하기 좋다는 점이었고, 이는 곧 우리가 ‘편집’에 대해 갖는 인상과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만 도려내기 쉽다는 뜻이다. 이른바 어떠한 강조를 위해 만들어진 뮤비, 이는 과거의 ‘의미 없는 후크송’이 고급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엔 단지 듣는 것만이 가능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은 ‘쇼츠’가 대세니 말이다. 


쇼츠란 무엇인가. 하스미는 이를 두고서 “영화나 드라마 등에선 어떤 발견으로 인해 이야기가 전회를 이루는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쇼츠는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뭐 볼까?’라고 말하는 중에 관측된 시청목록일 수 있다. 어떤 쇼츠를 보고서 작품을 찾아보게 되는 일이 흔하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삶을 바꾸어놓을 만한 순간이 된다면, 쇼츠는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이는 반복에 대한 한 가지 의견을 제공한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보편화가 영상 업계에 가져다준 변화 중 하나가 반복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라. 얼마든지 반복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건데, 이는 산업적인 면에서 말고도 창작자에게도 거대한 변화이다. 반복해서 찾아 듣는 일의 반대말은 반복해서 노출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이들이 즐겨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터넷 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알고 소비하지 않지만 음악은 그것과는 달라서 자신의 개인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반복해서 들을 수 있다. 즉 클립에 사용된 음악은 그 자체로 어떠한 순간에만 그치지만, 확산의 과정에서 이는 전체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마치 개인이 마주한 삶의 한순간이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쇼츠란 항상 본편에의 접근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내포한다. 


“요즘 사람들은 쇼츠에 중독되어 영화와 같은 긴 영상을 보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음악은 단지 들을 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자신을 선택하는 일에서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점점 짧아지는 웹소설 등의 포맷에서조차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항상 시동을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음악은 매 순간에 자신을 생존시키면서 사람들의 삶에 침투한다. 즉 음악은 삶의 한순간이 아니라 전체이다. 음악을 듣는 길이만큼이 곧 쇼츠가 되는 상황에서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을 갖고서 행동한다. 그렇게 보면 뭔가 서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감각은 개인의 삶이 확장됨에 따른 한 가지 감각일 수도 있다. 스트리밍의 시대가 “언제든지 돌아오세요.”라고 말하며 절단과 봉합의 사이를 숨긴다면, 좋은 음악은 어떤 삶과 저런 삶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든다. 혹자는 애니메이션이 내연이 아닌 외부로만 사유되는 일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며, 이런 건 작품 자체로만 승부하는 게 아니므로 비겁하고 상업적인 처사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방식이 꼭 자신의 모든 걸 보여줌으로써만 시작되는 건 아니다. 때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삶을 더 충만하게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라진 비틀즈의 음악으로 시작되는 영화 <예스터데이>처럼 좋은 음악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쇼츠로서 전체로 확장될 운명을 타고난다. 물론, 음악만 남을 수도 있고 말이다. 


*


1화 빌런이란 말 그대로 작품을 1화만 내는 일을 뜻한다. 주로 웹만화나 웹소설 쪽에서 통용되는 이 속어는 흥미로운 도입부로 관심을 끌고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작가를 가리킨다. 도입부를 보니 재밌어서 더 보고 싶은데 다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이 상황은 적어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계속해서 이야기가 보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인간관계로 치면 ‘구미가 당긴다’ 정도의 느낌인데, 소개팅에 나갔을 때 일단은 상대방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진다는 걸 떠올려보자. 많은 이들이 첫 10분 대화에서 상대방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고들 한다. 10분 안에 결판을 내지 못하면 상대방은 마음이 떠나버리고야 만다. 마찬가지로 작품의 도입부는 여기에 시간을 들일만 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무언가 재밌을 것 같은 작품을 만났는데 이야기가 더는 진행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후속편이 보고 싶을 것이다. 1화 빌런은 그 첫 만남을 좋게 끌고 가면서 사람들을 매혹하지만, 그러한 감정의 절정에서 자신을 중단해버린다.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 그 이상은 보여주지 않는다.”라거나,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끊는 것이고, 두 번째는.”이라는 느낌으로 일부러 맥을 끊어버린다. 즉, 우수한 작품임에도 ‘빌런’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러한 태도가 다소 짓궂게 느껴져서다. 


음식이 맛있는데 맛만 보고 끝나버린다면 다음번에 가게를 찾을 확률은 높아진다. 아직 만족하지 못했기에 한번은 더 와야만 한다. 1화 빌런의 경우, 애초에 이야기를 끌고 갈 생각이 없기에 그런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일화들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 어떤 작품이든 1화는 독자를 마주하는 창구가 되어준다는 점,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1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동행하고 싶게 해야 하며, 그래서 보통은 초기 3개 회차 정도는 힘을 주는 편이다. 특히 이런 추세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바로 단일 회차에 힘을 주는 일이다: 웹툰도 그렇지만 최근 방송 애니메이션의 제작 추세는 1화를 길게 가져가는 것이다. 어떤 경향이라고까지 하기엔 모호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1화를 길게 가져가도 괜찮은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최애의 아이>의 경우 원작의 핵심이 되는 반전을 가져가기 위해 1화를 길게 가져갔다. 거진 1시간여에 달하는 이 분량은 과거라면 ‘극장판’과 같은 특별편으로 구성되었겠지만, 몰아보기를 위시한 스트리밍 문화는 몰입감을 고려할 수 있는 패로 넣었다. 과거엔 제작환경이나 관람환경 등에서 20여 분이 최적의 구성이었다면, 근래엔 선제작이 가능한 환경과 몰아보기가 흔해진 풍경 등에서 장편이 지지된다. 말하자면 한 개 회차에서 1시간여 구성이 적절한 포맷으로 자리 잡은 건 이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구성 사례가 기존에 아예 없던 건 아니다.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쳐 타임> 같은 경우 매 시즌 마지막에 있는 ‘마무리 에피소드’를 기존 2개화 분량으로 방영한 바 있다. 에피소드 넘버링에서 두 편으로 명명되는 이 한편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여 더 풍부하고 심도 있는 전개를 선보였다. 이는 작품의 중요한 부분에서 분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특별 편성이 이루어졌던 사례가 그리 특별한 건 아님을 보여준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보급으로 관람환경이 개인화되었다는 점이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다양한 기기로 여러 순간에 걸쳐 관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편화된 경험을 전달한다. 어떤 면에서는 거대하고 통합된 경험을 제공해주지 않으므로 몰입감과는 거리가 있을 듯하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영화의 경우 극장에서의 이탈이 영화에의 몰입을 해칠 것이라는 의견이 강세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균일한 경험을 보장하는 영화관은 오늘날 프렌차이즈 식당의 기능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즉, ‘패스트푸드’가 처음으로 출범했던 때처럼 극장의 기능은 어디에서 영화를 보든 사람들이 같은 ‘이미지’를 경험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람 경험의 개인화는 경험이 빈곤해지는 만큼이나 극장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점을 간과하면 이 이야기는 ‘요즘 사람은 긴 영상을 잘 못본다’에만 초점이 맞춰질 공산이 크다. 


파편화된 화면과 빈곤한 사운드, 분절된 러닝타임 등이 작품에 온전히 빠져드는 일을 방해한다고 보는 의견이 있지만, 애정이나 이해도까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작품에 대한 개인화는 어떤 면에서 작품을 소유하는 감각에 대한 향상일 수 있다. VOD나 블루레이를 구매하는 일이 작품에 대한 소유의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이러한 소유욕은 기본적으로 ‘나만의 경험’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 의존한다. 극장에 방문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게 이미지에 대한 동일 판본에의 욕구, 이를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증명받거나 혹은 ‘균일한’ 판본에 대한 감상욕이라는 점을 재고해보자. 스트리밍 문화는 자신이 본 것이 정설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답이란 게 없다고 말한다. 이는 즉 ‘거대 담론’이란 게 불가해진 세상의 한 풍경이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경험이 ‘분산’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분산되어 있기에 겉으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엔 자기만의 풍경을 품고 살아간다. 스트리밍 환경에서 점점 길어지는 1화의 양상은 말을 끊지 않고 이어간다는 점에서 몰입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경험이 ‘분산’된 상황에서 이를 최대한 이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도 있다. 영화가 사람들을 2시간 동안 가두어 놓는 일이 감옥처럼 느껴진다면, 영화란 경험을 가두어두기 위한 감옥이기도 하다는 점 말이다. 


영화는 그 태생에서 극장을 전제하므로 지리적인 특정성과 분리할 수 없다. 이 경우 로컬이라는 말은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현장에서만 생겨나는 의식 혹은 경험을 가리킨다. 바꾸어 말해 영화에서 경험이라는 말은 어떠한 간극으로만 표출되며 이는 곧 영화가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감금과 속박을 지향한다고 보았을 때 우리는 여기에 대안을 찾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영화는 영화적 경험에 대한 하나의 감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적 경험을 위해서만 마련되었다는 이 의견은 영화가 추구하는 지점이 연속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자아는 이전 기억과 현존을 연결하는 능력인데 바꾸어 말해 이는 기억에의 속박이기도 하다. 즉 자아는 어떤 면에서 자신에 관한 감금이기도 하며 이 점에서 분절과 단절은 자기애로 귀결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삶에서 빼내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주었던 것이다. 1화를 길게 가져가는 현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그런 측면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몰입감이라는 말은 영화와는 다소 다른 결을 지닌다. 이는 허구와 상상이라는 점이 아니라 기억에 얼마나 속박되는지의 문제다. 들뢰즈는 기억을 두고서 존재하지 않은 과거가 현재를 만났을 때에 빗대는데, 우리가 영화에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미래의 유령이라는 걸 떠올려보라. 여기에 항상 존재하는 건 오직 나뿐이다.  


100여년 전의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 우리를 그에 사로잡는다. 언젠가 미디어의 변화를 두고서 기억하는 방법의 변화로 연결지었던 담론들은 1화 빌런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딜 가도 감옥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마치 어떻게든 나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애의 귀결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에 감금되었다는 이 역설이 균일하지 않은 자기에로 귀결되는 대목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 대한 애호는 세상과의 일시적인 분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지만 이들 애니메이션에 대한 몰입은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즉, 영화가 개인을 어떤 세계에 있게 한다면 애니메이션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환상을 잠시나마 제공한다. 그런 측면에선 애니메이션 업계의 1화가 연장되는 일은 우리가 겪는 위기의식과 겹쳐 보이는 면이 있다. 영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도피를 종용할 때 애니메이션은 최대한 취향을 전하는 일에 주력한다. 애니메이션은 영화보다 개인을 취향에 사로잡으며 여기엔 혼자 남겨지는 방식, 나의 좋은 면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면을 추구하는 환상이 있다. 즉 영화가 아무리 해도 세상에 남겨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애니메이션의 1화가 길어지는 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몰입감이 높다는 건, 한편으로 고립이라는 점에서 머무르는 방식에 관한 두 가지 제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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