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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05. 2023

세상이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때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세상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문장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이 표현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혼자서만 끙끙대며 해결하려 든다’고 지적하는 것이지만, 생각해보건대 정반대로도 바꾸어 볼 수 있다. “개인적인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세상에서 생겨난다”고 말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마주하는 고민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나를 바꾸며 세상에 순응하는 일, 나를 순응하며 세상을 바꾸는 일. 전자의 경우가 적응이나 패배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면, 후자는 이해와 개척 등의 맥락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만약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라면 우리는 그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바꾸어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인 상황에서는 “악한 행동을 하여 죄인이 된다”는 공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라면, 이미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떠나버린 이 문제는 “세상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 개인적인 것=나라는 문제의식이 성립함에 따라 “나만 없으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빠지고야 만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도 해결되지 않을 때다. 일단 ‘나’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없을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나 관계 등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지만, 이념이나 사상처럼 더 큰 체계 안에서는 ‘나’ 하나쯤이야 없어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경우가 바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로, 우리가 끌어안을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면 세계는 사적인 것과 결합하면서 대문자로의 [세계]가 된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살아가는 세계에 속해있지 못하다고 여길 때, 그러한 세계가 외부로 떨어져 나온다는 점을 뜻한다. 


이제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추상화된 무언가가 된다. 이제 세계는 우리가 영향을 끼치며 일궈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개인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우리가 고전 RPG 게임에서 맵의 가장자리에 가로막히듯 [세계]는 우리의 한계 지평이자, 개인을 이루는 껍데기가 된다. 그런데 ‘나’를 고려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해서도, 세계에 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경계가 없을 때 이 둘은 별도로 구분되지 않으니 말이다. 가령 우리는 얼굴을 통해 세상을 만나지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만을 생각한다. 우리는 얼굴에 대해 상상해보지만 지금 어떤 표정일지는 알 수 없다. 즉 나와 세상 사이는 상상하기 힘들거나, 혹은 단순한 지점이나 매듭으로만 사유될 뿐 그 자체로 사유되지는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세상 안의 나를 딱 잘라 구분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는 일은 속내를 숨기거나 하는 일로 이해되었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을 분리하려는 운동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 존재처럼, 사람들은 정체성을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구분점을 만들어두곤 하는데, 필명이나 닉네임 등의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필명과 닉네임은 외부와 소통하는 지점이 되어주면서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면들을 전시하게 해주었고, 사람들은 세상을 밖으로 밀어내며 ‘자기’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계]란 이름의 문제이다. 세상이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때는 이를 일컬어 [세계]라는 표현을 쓴다. 대문자로서의 세계는 대문자로서의 ‘나’와도 같아서 항상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을 내면에 받아들인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항상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한다. 


반대로 내면이 항상 감당할 수만은 없기에, 우리는 외부만을 내세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소위 말해왔던 ‘페르소나’ 담론의 연장선이지만 이런 문제에서 [세계]를 도출하는 일의 가능성은 비교적 제기된 바 없다. 이 심리학적 주장의 요지는 인간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으로, 이중인격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려는 건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을 최전방으로 여긴다는 것, 이를 통해 ‘나=세계’가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가면의 문제는 곧 [세계]가 되어, ‘바깥’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해 가장되는 무언가에 불과하다. 바깥에 대항해 자신을 숨기는 게 아니라 ‘자기’라는 개념은 곧 바깥을 밀어냄으로써만 형성되므로, 세계가 사적인 무언가가 된다는 건 세계에 대한 사적 소유가 아니라 방구석에 틀어박히는 쪽에 더 가깝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세계] 사이에는 그런 ‘문제’가 있다. 자기를 곧바로 문제에 대입함으로써 세계의 고민을 자신으로 껴안고, 이를 통해 자기를 제거하는 일이 곧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는 일.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란 자신이 곧 세계가 됨으로써 홀로 상처가 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세계]란 상처가 되는 방식이자 그것을 껴안는 방법이다. 따라서 다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안겨준 세상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다양하게 행동한다. 세계를 찢어 밖으로 가려는 사람도 있고,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체질로 자신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이들을 예측할 수 없는 부류로 분류하면서 악인으로 분류한다. 


악인의 정의는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 전에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사람, 즉 ‘자기’이기 위해 바깥으로 밀려나야 하는 부류이다. 말하자면 악인을 분류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매개되어 ‘자기’와 대결한다. 그렇다면 악인을 분류하는 일에서는 둘 중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할까? ‘자기’가 먼저인지 아니면 바깥이 먼저인지를 구분 짓기란 어렵다. ‘자기’를 규정하는 과정이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면, 이 과정에서 나쁜 건 오히려 사람들을 밀어내는 자신일 테다. 또한 ‘바깥’을 규정하는 일이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면, 이 과정에서 ‘바깥’을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버리는 자신은 그가 악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자기’를 구성하고자 최전선에 서는 이들에게서 ‘바깥’은 어떠한 판단이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세계와의 경계일 뿐이다. 따라서 악인을 규정하는 일에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악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것을 하나의 ‘문제’이자 ‘이물질’로 취급하면서 자신의 [세계]에 섞일 수 없도록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다. 악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감시가 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악인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기가 성립하려면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아니기에 악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악’은 자신이 아닌 것들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본능적 불결함에 가깝다. 오히려 자신이기 위해 악을 규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악이란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최전방에 서 있게끔 한다. 


즉 악인은 세계 안의 자신이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할 만한 조건을 제공한다. 이런 면에서 악인은 우리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악인을 판단하는 기준에서 ‘자기’는 어디까지가 허용기준에 있는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개인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만약 취향이라는 말이 개인의 선호도를 기준으로 자기를 투영하는 무언가라면, ‘자기’란 결코 자기가 지켜내야 할 것들에 관한 것은 아닌 셈이다. 악인을 기준으로 볼 때 ‘자기’란 우리가 불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것들, 불평불만이 많지만 어쨌거나 견뎌내야만 하는 것들에 관한다. 이는 우리가 좀 전에 “자신이 곧 세계가 됨으로써 홀로 상처가 되는 방식”을 언급했던 것의 연장선에서 ‘악인’은 오히려 배려의 형식일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혼자만 상처받으면서 [세계]를 꾸리는 일은 필연으로 ‘바깥’을 악인의 무대로 지정하고야 만다. 이 안에서 ‘악’이란 우리가 주로 바라만 보는 쪽이 되어, 상처가 아닌 쪽으로 이해되므로 되려 ‘상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기능한다. 우리가 악인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죄가 되는 일은 ‘살아가다’라는 지속의 형식을 견딜 수 없게 하므로, 여기서 ‘삶’이란 완성형의 문제는 되려 견딜만한 게 된다. 고통을 지속하는 일보다는 단번에 견디고 끝내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지정하는 일은 파훼를 용이하게 하면서도 변화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변화의 여지가 없다면 여기서 상처는 더 커지지 않겠지만 반대로 상처가 치유될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는 일은 마치 폭탄을 끌어안은 것처럼, 아무런 발전의 여지없이 홀로 죽어가는 일을 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지속이 아닌 완결형이라는 점에서 [세계]에 벽을 둘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인에 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악인에는 서사를 주지 말라”고 누군가는 불평한다. 이 말은 악인에 몰입해 현실에서도 그런 악인이 등장할 것에 대한 우려였다. 하지만 우리가 악인을 이해하려 들지 않거나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바라볼 때, 이런 점은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자기’를 완결에 두지 않기에 가능하다. 아무런 변화의 여지도 두지 않을 때,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혼자가 된다. 이른바 혼자가 된다는 건 [세계]가 그만큼 단일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에 대한 고립을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기반 삼기에 문제다. 무기력함을 양분 삼는 일이 악인에 대한 탐색의 최전선에 설 때 우리는 영영 결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단단함을 대결하는 일은 충돌이 아니라 서로를 껴안는 게 되어야만 한다. 악인을 동정하거나 이해하는 일이 선악을 판단하는 문제라면, 서로에 육체가 있고 형체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그러한 판단을 위해 수반된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세상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적어도 [세계]일 것이다. 인식의 지평이 내부로 열린다면 문제의식은 등을 맞대어 바깥을 마주하는 식으로만 교환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악인을 두고서 자기를 떠올리지 않을 때 비로소 악인은 하나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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