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19. 2023

입체적인 규모의 반복 운동


<괴물>은 어떤 문제일까?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들었던 인상은 비밀을 파고 들어가는 탐사와 획책이 아니라 오히려 비밀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가령 변해빈은 “수상한 존재 사이 어떤 연관성이 극 안에 감돌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괴물>은 사건의 테두리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 입체적인 규모가 느껴진다면 반복 운동 때문이다.”라고 서술한다. 이 말처럼 <괴물>은 어떠한 비밀을 간직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풀어놓는다는 인상이 있고, 이는 1부와 2부에서 각각 보여주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잘 생각하면 1부와 2부는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 모든 일에서는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의 이야기가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고레에다의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부분으로, 서사가 아니라 영화의 형식적인 면에서 아이들의 ‘소외’를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영화의 이런 구성에 관해서는 영리하다고도 볼 법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근거 삼아 ‘악의적’이라고 볼만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상품세계의 운동은 (…) 모든 생산물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외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적은 발터 벤야민이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두고서 무성영화와 소외 간의 관계를 서술했던 대목과 연결되어, 영화에서 ‘침묵’과 ‘이미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나머지 세계를 소외의 이름을 빌려 ‘형상화’한다는 점을 떠올리게끔 한다. 즉, 무성영화는 항상 ‘바깥’과 연결되며 이는 소외와 떼려야 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스펙터클화된 이미지가 허위에 가깝다면 이러한 허위가 반복하는 침묵은 영화가 배제하는 아이들의 세계가 바로 ‘바깥’이라고 말하는 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과 영화가 볼 수 없는 것을 구분 짓는 지점이 바로 이 침묵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침묵하는 아이들, 영화는 바깥으로 통하는 길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고레에다는 이러한 침묵을 깨는 소리를 통해 나름의 복선을 깔아두는데 이는 3부의 이야기와 관련 있다.


1부와 2부에 깔린 불쾌한 소음이 3부의 아름다운 합주임이 밝혀지고 나면 이 음악은 침묵의 세계를 횡단하는 희망의 징후로 탈바꿈한다. 아마도 <브로커>는 이 점에서 여전한 고레에다의 영화로 논해질 수 있을 것이다. 파국의 세계를 횡단하는 음악이 상품세계의 바깥을 암시한다면 영화의 도입부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베이비 박스의 울음소리란 박스 자체가 곧 내부로 열리는 ‘소외’의 한 형식이 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베이비 박스의 문은 안으로 열린다”라는 공식이 전언되어 <괴물>은 아이들의 세계인 3부를 ‘안으로 열리는 내부’로써 사유하고 있다. 이는 겉보기에 바깥이지만 동시에 내부이기도 한 것으로, <브로커>의 베이비 박스가 영화의 서두에 제시되는 것과는 달리 <괴물>의 3부는 최후에 제시된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브로커>가 운반하는 쪽이라면 <괴물>은 이언 보고스트의 말마따나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평평한 존재론의 이차원 평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적 비유는 (…) 평평한 존재론의 이차원 평면 전체에 걸쳐 분산시키는 대신에 그것들을 밀도가 무한한 하나의 점으로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서는 하나의 무대를 가정해보려 한다. 만약 무대가 평평하다면 여기서 시간은 어떤 형태로 등장해오는 것일까? 시간은 흐트러지지 않고서 하나의 거대한 중력으로 내려올 테다. 그런 무게감이 없다면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은, 카메라가 특정한 틀을 갖고서 어딘가를 본다는 영역구획 따윈 존재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영역을 전개하는 일은 항상 무한에 수렴하고, 또 필중한다고 표현하고 싶다. 예를 들어 <브로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베이비 박스는 어떤 대상을 프레이밍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기능적인 면과 닮아있다. 영화는 어쨌거나 특정한 틀을 가지고서 보여질 수밖에 없으며 여기서 ‘내부’란 또 다른 세계로 향한다는 점에서 ‘출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괴물>의 반복되는 형식은 일종의 ‘출구’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한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마치 3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나는 듯 보이지만, 이런 순간은 하한선 없이 줄곧 지속되어 관객을 사로잡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말하자면 그런 순간의 ‘바깥’으로 나서지 못하게끔 관객을 끌어안을 것이다.


영화를 틀이 아니라 영역으로 바라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영토의 다른 판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영토화가 건설에 주된 목적이 있다면 영역은 ‘자기’를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자생성에 더 근접한다. <인셉션>에서 묘사되는 무의식의 최하층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영역전개]란 포착이 아니라 생존에 의존하며 이야기의 준거점은 어디까지나 세계가 아닌 자신에 있다. 이들이 자기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택한 캐릭터화의 방법론에서 ‘자기’란, 일종의 모에적인 해석방식을 갖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파도가 치고, 모든 것을 허무는 방식. 말하자면, 우리가 <괴물>에서 목격한 건 대상을 포착해 좁혀들어가는 수색이 아니라 삶의 한 영역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르포의 형식이다. 음악의 BPM이 비트를 쪼개 대상에 좁혀 들어가는 것처럼 ‘잘게 쪼개진 파도’란 관객으로 하여금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문을 닫고 나온다’는 쪽보다는 “남겨진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라는 쪽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브로커>도 좋게 보면 르포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그게 본래 있던 것처럼 서술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적 재현의 방법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령 <브로커>에서 가장 강박증에 사로잡힌 듯 보이는 장면은 회전관람차에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방식이며, 이는 영화 내내 이들을 추격하는 형사에 의해 뒷받침되며 범인을 추격할 뿐이라는 인상, 그런데 여기엔 일련의 사연이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이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진술, 악인에도 사연이 있으며 종국에는 ‘악하다’라는 언어가 제도적인 장치와 맞물려 이들의 현상을 감금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 경우 마치 파티에서 추방된 이후로 시작되는 몇몇 만화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다’는 건 상품성이 없다는 뜻으로 간주되며, ‘감금’은 이것 외의 별다른 해석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괴물>은 오히려 관객이 자신이 목격한 것들에 관해 스스로를 ‘감금’으로 발견하게끔 한다. 관객은 “그동안 오해했던 건 자신이었을 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바깥으로 추방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길: “서사는 인과적 행위성이란 사실 뒤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성에 대한 모든 설명의 선결조건을 구성한다.” 이 지적에서 우리는 영화가 갖는 회귀성-반사성이 특유의 공간감을 만들어낸다는 걸 상기하게 되는데, 마치 압지에 눌러쓰는 듯한 서사의 공간적 중첩이 일련의 행동들에 대한 후속조치가 아니라 선결조건이었음이 재발견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배치’는 영화가 스스로 장치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바깥’으로 재배치되고 있다. 관객은 이야기의 전반적인 형태를 알아갈수록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점들에 사로잡혀, 선결조치의 새로운 출현들에 기겁하고 스스로 판단을 중지하기를 선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누구게?”라는 물음이 악인에 관한 것처럼 오인되어 왔던 일은 이미 그 자체로 “악인의 서사를 탐색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출구를 찾고자 했던 관객의 마음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최후에 가서야 자신을 악인으로 이해함으로써 영화를 구성하던 캐릭터들에게서 자생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횡단보도는 어딘가를 가로지르지만 반대로 멈춰 서면서, 두 구역 사이를 잇는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기도 하다(도로 위에 점선 형태로 기입되는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특히나 우치다 타츠루가 『거리의 현대사상』에서 말하길: “인간의 인류학적 정의는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 본성에서 파생된다.” 우치다의 말은 기본적으로 ‘죽음’에서 ‘삶’을 떠올리는 일을 가리키지만, 무엇보다 이 말의 본의는 기억을 되감기 하는 능력에 관한다. 우치다에 따르면 동물은 자신의 동료가 ‘죽었다’는 상태를 인식하지만 거기서 시간을 되돌리거나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체에서 기억을 발굴해내며 이는 곧 고인의 ‘생전’을 추억함으로써 이와 이별한다는 ‘장례’의 풍습이 발달하는 원인이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과거를 끊어내야만 비로소 삶을 지속할 수 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를 동물성으로 파악하는 일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물이 누구인지를 찾기보다는 인간들의 세계는 항상 괴물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우선 영화를 동물성으로 파악하는 일은, 영화를 자연에 가깝게 바라보면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이다. 영화에서 이미지가 형상에 우선한다고 가정할 때 영화는 ‘죽었다’라는 상태로밖에 서로를 대할 수 없는 동물이다. 영화와 죽음은 현상학적으로 많은 것이 닮아있고 쇼트와 시퀀스는 그저 시간의 나열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런 시간들에서 과거를 찾아내고 현재에 연결하고, 이를 추도함으로써 이런 시간들에 기회를 줄 수 있다. 베르그손에게 지각은 잠재되었던 기억을 이미지로 현상화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소위 몽타주라 부르는 형상의 개념으로 연결된다. 지각은 현재가 과거를 바깥으로 사유함으로써 그런 바깥에 자신이 끌려들어 가는 삼투압 현상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화에서 느끼는 틈새와 간극은 동물들에 이별을 고하고 존재하지 않던 기억들을 불러 모으는 어떠한 기능들에 관한 묘사에 가깝다. 몽타주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인터페이스와 네트 간에 ‘접속’이라 부르는 일을 두고서 지각의 과정에 빗댄다.


이 몽타주란 것은 소위 기표와 기의가 한 자리에 있는 기호에 가까운데, 에이젠슈테인이 한자에서 그림과 의미를 분리해 바라보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이 적어도 그림과 언어 둘 중 하나로만 평가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여기에는 있다. 그림과 언어가 서로를 껴안을 때 여기에는 형상이 대두하며, 이는 곧 우리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의미를 도출해내기보단 무대 자체를 하나의 도래하는 장소로 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요컨대 변해빈의 지적에서 명료해지는 것은 영화가 반복 서술을 통해 노리는 것이 바로 표면과 심층의 불일치라는 점이다. 아피찻퐁의 <메모리아>처럼 반복되어 오는 이 이미지 서술은 끝내 하나의 간극을 만들어내어, 영화에 풀리지 않은 ‘바깥’이 있다는 점을 전한다. 그리고 이 바깥은 ‘이미 온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에서 줄곧 부각되는 동시대를 끌고 옴으로써 틈새를 삶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결국 <괴물>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화를 하나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를 인터페이스로 표현하는 일인 것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이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릴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