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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5. 2023

영화보다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것


“의미의 생산을 위한 손쉬운 활용”. 김병규 평론가는 씨네21의 <너와 나> 비평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미지도 숏도 연출도 될 수 없고 단지 늘어놓기만 한 추상들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너와 나>는 한국 독립 영화의 가장 추한 경향이라는 것이다. 김병규의 이 지적은 화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에 따른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화면 속의 사물에는 아무런 함축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현철 감독은 “어떤 사물을 보여줄 때도 상징적 의미보단 거기 얽힌 이야기를 생각한다.”고 밝혔지만 <너와 나>의 정경들은 열린 외부를 가리키기만 할 뿐 그러한 바깥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카메라는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이나 현실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에서 힘을 얻는다는 소리가 되며 이는 곧 영화가 연대나 구원을 바라서가 아니라 바깥을 내부로서 오용한다는 뜻이 된다. 체호프의 총처럼,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 관해 말하며 이런 기억은 명명백백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혹은 배제한다. 


예를 들어 송형국 평론가는 씨네21의 비평에서 “<너와 나>는 이렇게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듯한 미래와 과거를 마주 보게 만든다.”라고 말했는데, “극 중 인물의 미래는 관객이 알고 있는 과거”라는 대목이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이런 설정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의 종착지가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는 점을 암시함에 따라, 오히려 작품이 열어두려 하는 바깥이 무용하거나 부질없는 것으로 오인될 가능성을 낳는다. 과거를 회고하여 개인적인 서사로 만드는 레트로토피아의 시대에 ‘기억’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영화가 미래의 기억을 사유할 때 ‘영화의 형태를 한 뇌’는 무의미한 운동만을 반복한다. 즉, 실질상에 자리해야 할 미래가 열려있지 않고 닫힌 결론을 제시하는 상황에서 ‘바깥’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내부에만 머무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김병규의 말은 그런 점에서 이렇게도 이해될 수 있어 보인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전체는 부분들 사이에서의 그것들의 특정한 조화를, 어떤 조직화를 전제할 것이다. (…) 전체는 그 자신의 바깥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일 것이다.”[1]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서 자유감과 해방감을 얻는 영화의 도덕적인 승화 작업에도 빗대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병규는 다른 글에서 2023년의 한국영화를 다음처럼 술회하기도 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몸짓은 현실과 동떨어진 시대착오적 동작이라기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한국영화가 ‘현재형’의 장면을 의미 있게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에 발생하는 동시대적 증상이라는 의구심이 그것이다.” 글의 말미에서도 지적되듯 한국영화들이 여전히 판데믹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는 서술은 “미래와 과거를 마주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깥을 자유의 형식으로 지정하고야 마는” 참극을 가리킨다. 이때 자유란 일반적으로 의구심의 해소를 뜻한다는 점에서 ‘진실’에 빗대어지곤 하지만 사실은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공백’을 뜻한다. 이는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 1부와 2부, 3부라는 형식으로 일정한 ‘시차’를 양산하고 여기서 ‘착오’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선택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보면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은 <괴물>을 비평하는 일과 정확히 같은 선상에 놓여야만 한다. 


하지만 <괴물>과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확실한 사실 하나는 <너와 나>가 사회적 경험을 개인의 기억으로 축소하는 방식이자, 그런 사회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판데믹과 같은 비대면의 시대에 의도적으로 일치시킨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에서 “영화의 시대에 ‘내면화’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영화의 영사가 외적인 투사처럼 일어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인 것”[2]이라고 말한다. 이를 따르자면 <괴물>은 계속해서 영사를 이어가는 릴레이 형식으로써, 영화가 재현하는 것은 다른 세계와의 대면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이 개인의 기억으로 축소되어 들어가지 않는 한 지점을 이어가는 일에 관한 묘사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영화의 시대’가 낳은 풍경은 [세계]를 영화로 만들어 바깥에 관한 의도적인 배제를 수행하는 것, 그 자신이 영화 기계가 되는 일이다. 이를 따라 그저 단순한 투사에만 그치지 않게 되어버린 영화는 수축과 반복, 접합과 절단 등의 행위에서 운동성이 중요해지는데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이다. 


가령 <오펜하이머>에서는 원자들 사이가 비어있다는 양자역학의 개념이 제시되어 작중 오펜하이머의 현실과 상상 사이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영화 전체로 확장시키고 있다. <괴물>은 그러한 간극을 시대착오의 한 형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고 <너와 나>는 사회적 경험을 개인의 기억으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공백을 비대면의 시대에서 끌어오거나 혹은 이를 위해 영화를 의도적으로 감금한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자신을 의존하지만, 이런 작업은 김병규의 말처럼 비판되기만 할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스마트폰 시대의 영화의 기억에 필요한 것은 ‘보여주지 않겠다’라는 자세”라고 말한다. 영화 Top10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8번째부터는 OR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자 했다는 하스미에게 시네마는 “영화보다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것”이면서 “모르는 사람과 영화를 공유하는 경험”이다. 하스미는 정전을 따라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자기가 되는 경험을 하기보다 영화를 특정 짓지 않음으로써 영화가 전체를 사로잡는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연결성을 옹호한다. 


이는 같은 공간에 자리하면서도 서로에 관해서는 철저한 타인으로 남고야 마는 영화의 익명성이 관객의 지위와 연결되는 대목을 가리키는 데, 이때 ‘시네마테크’의 ‘보여준다’로서의 역할은 상대방을 ‘보여주지 않는다’라는 대목에 연결되어 우리가 왜 리스트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극장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특정하는 게 아니라 공백을 소유하는 감각에 관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약한 연결’[3]은 “우리의 몸을 미지의 환경에 두었을 때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것이 새로운 검색어, 즉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대면의 시대, 디지털 사회에서 극장이 개인에게 ‘미지의 환경’이 되어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영화보다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너와 나>에 대한 김병규의 지적은 합리적이고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 ‘모르는 사람과 영화를 공유하는 경험’과 사회 전반에서 ‘공백을 소유하는 감각’은 서로 상충하기에 이 둘이 같은 자리에 있을 때는 <너와 나>처럼 굉장히 보기 이상한 풍경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비어있다’라는 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면서, 현재화에 어려움을 겪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나 레프 마노비치가 AI 환경에 관해 말하는 “창의적이지 말라”라는 점을 충실히 수행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AI들의 작업방식이 고립쌍을 연결해 대응쌍과 알고리즘을 활성화하는 일이라면 이 과정에서 왜곡되는 것은 실제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서술해가는 챗 GPT 식의 가짜 현실일 테다. AI 프로그램이 리마스터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백은 전체를 통해서만 사유되며 이는 곧 한국 독립영화의 어떤 경향이 <얼굴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울 안에서 자신을 마주할 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일찍이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와 같은 저서에서 운영체제와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마노비치에게 영화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기보다 미시적 규모에서 작업하기 위한 작업 테이블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비대면의 시대가 만들어낸 것은 인간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여기서 어떻게 서로 연결될 것인가를 질문하는 형식,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짜 기억의 활성화다. 


김소희 평론가는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에 대해 서술하는 자리에서 “미래에서 온 현재”라는 키워드로 ‘폭발 이후의 잔해’를 가리킨 바 있는데, 알랭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공백은 “상황들의 위상 기하학을 파괴한다.”[4]마찬가지로 조현철은 상징적인 의미를 생산하기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서술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여기서 논쟁거리는 미래를 현재화하는 과정이 동시대성을 끌어들이는 과정에 관한 게 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착오성과 낙차가 추락으로 이해되는 일은 종이 한 장 차이와도 같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날개 잃은 천사는 그 얼굴을 파국에 맞대고 있는가? 제기해보고 싶은 한 가지 가능성은 <너와 나>가 사실은 세월호라는 특정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이성이 인간들을 상상의 너머에 대한 두려움에서 구출한다면 논리적인 연결을 잃고 간극과 공백을 소유하고자 하는 한국영화의 몇몇 경향은 두려움 그 자체를 안고 살아가려는 욕동은 아닐까. 


샹바오는 『주변의 상실』[5]에서 양극화된 생활반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미디어나 매체 등을 통해 공유되는 거대 담론이나 서사가 있다면 한편으로는 원자화된 개인이 있다. 사람들은 개인의 취향을 말하며 서로 간에 이를 공유하거나 나눈다. 그런데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으로 나뉘어진 사회는 정작 그 사이를 잇는 중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영화적 움직임이 곧 한국 사회의 원자화된 개인에 대한 움직임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송형국은 <서울의 봄>을 비롯해 ‘역사 유니버스’에 빠진 한국영화들이 ‘실질적인 모델’을 찾지 못한 결과물이라고 말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너와 나>의 정경들을 풀어보면 이들 영화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강한 창작욕을 선보이는 게 된다. 한국 영화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바깥’을 끌어들이는 방식에서 특정한 간극이 있고 이들 공백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서 새로운 시대를 창작하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의식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너와 나>는 자신을 골방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바깥’에 대한 소유욕을 내비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성과 초월』, 김도형. 문성원 역, (서울: 그린비, 2020) pp.64-65.

[2]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정재서 역, (서울: 이산, 2004) pp.60-61.

[3]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안천 역, 서울: 북노마드, 2016) 

[4]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13) p.136.

[5]샹바오, 『주변의 상실』, 김유익. 김명준. 우자한 역, (파주: 글항아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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