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Dec 30. 2023

몸을 초과하는 세계들


있을 것 같지 않은 조합을 볼 때 의아함에 사로잡히곤 한다. 한때 맘스터치에 있었던 차가운 가지 버거라던가,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아보카도 김치라던가 하는 것들. 경우는 다르지만 “학살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대사도 그랬다. <진격의 거인> 연재 후반부에 등장해 작품을 모두 과오로 만들었던 이 대사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이르러 전격 수정을 거칠 정도로 문제적이었다. 복잡함을 풀어내기엔 대사가 너무 함축적이었고, 대사는 의도를 벗어나 외부로 확장되었다. 작품의 주제의식처럼 대사마저 자유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 문제에서 중요한 건 학살을 수행한 당사자가 학살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세계는 잔혹하다”라는 함축적인 대사가 엘렌과 아르민 양쪽 모두에서 학살의 책임을 미루거나 원용하는 사례로 끌어오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체의 변명이나 설명 없이 사실을 미루지 않았다. 


사실을 미루지 않는 태도는 <주술회전>에서도 발견된다. 시부야 사변에서 손가락 10개를 먹은 료멘스쿠나는 마허라를 주복하는 과정에서 시부야의 140m 반경을 학살한다. 이후 스쿠나가 잠들고 깨어난 이타도리는 그 학살의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자책한다. 이 묘사에서도 역시, 엄밀히 따지면 자신이 한 게 아님에도 책임지려는 태도가 발견되는데 특히나 이는 단순히 몸만 공유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과는 또 다른 사례이다. <진격거>도 자기실행적 예언에 사로잡혔다는 설정은 있지만, 그럼에도 학살을 수행하는 일을 자신이 주도했는지를 자문하면 여기서는 책임에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이타도리는 단순히 몸을 빼앗겼을 뿐이며 의식의 교환도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학살의 책임은 거진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타도리가 학살에 책임을 느끼는 일은 엄연하게 그 신체의 기억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는데, 어쩌면 신체란 [세계]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진격거>와 <주술회전>에 등장하는 또 다른 핵심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다. 쵸소우와 이타도리의 전투에서는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형제의 기억이 떠오르고, <진격거>에서는 히스토리아와 접촉한 엘런이 아직 벌어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엘런의 형인 지크가 “너는 부모에게 세뇌당했다”고 말하는 대목과 연결되어, 무언가를 주입당한다는 것-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변화를 겪는 일에 관한 묘사를 지적한다. 기억이든 몸이든 간에 엘런은 무언가를 주입받아 그 신체와 세계관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이는 마치 만화의 초반에 벽을 뚫고 넘어오는 초대형 거인의 모습과도 같아서 인식의 코페르쿠니스적 전환이자,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회복의 지점을 가리킨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일에서 선택의 권리 따윈 없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세계에 복속되어버린 인물들에게서 선택의 권한 따위는 없다.


신체와 세계의 공통점은 우리가 몸담은 곳이면서, 태어날 때부터 원래 그런 곳이라는 점이다. 신체와 세계는 헬스와 같은 수단을 통해 후천적으로 가꾸는 것은 어느 정도 허용되나, 그 근본을 바꾸기까지는 쉽지 않다. 가령 인체의 타고난 골격이나 유전병의 성질까지 바꾸는 일은 불가하며 건강검진에서 당뇨병의 우려가 있다고 하면, 평생 들여다보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진 것들에 관해서는, 골격이나 유전자까지 바꾸는 일은 불가하며 차라리 세계를 버리고 이주하는 쪽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주술회전>의 이타도리 또한 만화의 초반부터 스쿠나의 손가락을 삼켜 주술계의 공공연한 사형 대상으로 낙인찍히고야 말며, 이 모든 일이 악역의 설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운명을 자책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선택권이 없는 일들에서 핍진성이 생겨난다고 보는 일은 그런 학살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작가로서는 ‘원래 그렇다’고 해버리는 편이 더 쉽다. 설정들에 일일이 태클을 거는 일은 어느 정도 정합성이 있기만 하면 나머진 빠르게 무시해버리는 편이 좋다. 그렇지만 이들에게서 책임을 져야 할 대목은 다소 초점이 어긋나 보이는 게 사실이다. 별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마치, 지구가 하나니까 환경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일의 만화적 판본처럼 보인다. 적어도 인류가 행성이주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어쨌거나 이곳에 살아야 하므로, ‘대안’이라거나 ‘바깥’ 따위는 애초에 선택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점 말이다. 그래서 이들 캐릭터의 선택은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에서는, 애초에 그게 선택의 대상이 될 수조차 없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에게서 학살을 정당화하지 않는 태도는 진작에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알아버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분명 세계를 바꾸어 가자고 말하는 희망찬 무언가가 있었던 것만 같다. 모 만화의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그런 꿈은 21세기가 들어섬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며 느낀 것들은 몸은 생활의 기반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함께하는 무언가라는 점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쌓이는 것은 연륜뿐만 아니라 자신이 더는 바꿀 수 없게 되어버린 삶의 기반들, 과거의 몇몇 과오와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얼굴들뿐이다. “학살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그렇게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된 일들에 관한 것이었을 테다. <진격거>는 자신의 목숨을 끝내는 일을 통해 한 세계를 종결한다는 점에서 대학살극을 출발시킨다. 그 점으로 보면 이 학살극은 가장자리에 내몰린 일을 마주하기보다 세계가 되어버린 신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진격거>는 스스로가 잃어버린 세기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그 방법으로 자기살해를 택한다.  


얼마든지 정신과 신체를 구분 지어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그런 만큼이나 신체는 삶의 동반자고, 세계도 그렇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세계는 그 무엇보다 견고한 존재 기반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마음이 단단해질수록 과거는 바꿀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사실이 이타도리가 느낀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존재의 단단함은 이들이 몸담은 세계의 그릇과 얽혀있다는 것, 이는 이들이 그 무엇도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이 사실은 허락된 만큼의 자유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미래가 무궁무진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미래는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그 누구도 관절의 범위를 벗어나 운동할 수 없다는 것-그러니까 ‘맞서 싸운다’라는 태도는 무언가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는 한계적 상황에 귀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이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자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기에 책임을 진다고 나서는 것일 뿐이다.  


미래를 향해 포부를 밝히기보다 찬란했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더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흔히들 대두하는 현상이다. 혹자는 레트로토피아를 그런 점에서 설명했고, 학살과 책임 사이의 관계도 사실 그런 점에서 이해되는 듯한 면이 있다. 도덕적인 청렴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면, 이때도 책임은 숭고하고 찬란한 것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결과만 같다면 과정 따윈 별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도망칠 곳이 없어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그 표현방식이 같음에도 <귀멸의 칼날> 같은 식으로 이해되지는 않는 듯하다.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라고 말했던 탄지로의 말이 젊은 세대에 울림을 주었던 건 본래 의도했던 바와 정반대로,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이 내몰려버린 [세계]에 그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있는 힘껏 달리기를 행하는 것처럼,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일은 무한정 펼쳐진 세계를 최대한 압축해서 받아들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 말이다. 


무언가를 끌어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이해라든가 화해하든가 하는 이미지보다는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무언가를 끌어안으면서 “괜찮아”라고 말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는 여기에 맞서 싸우는 일보다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더 쉽다. 멀티버스와 평행우주에 관한 생각들도 결국에는 자신이 속한 세상을 바꾸기보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이 더 쉽다는 점을 전제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몸을 가꾸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버리고 다른 그릇으로 넘어가 버리는 일이 더 쉽다. 세계는 항상 자신의 몸을 초과해있기에 몸을 벗어나는 일은 세계를 책임지는 일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세계를 끌어안고 죽는 일이야말로, 세계 신체가 되어 실수 없이 침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자신의 몸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끌어안는 것과 책임을 지는 일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책임을 진다는 것은 세계를 끌어안는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보다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