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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1. 2024

레일건으로서의 비평


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필시 대상에 관한 접근 방법 등이 언급되고는 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실제로 맺히는 상도 달라지므로, 자신이 대상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지가 작품을 보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태도를 관철하여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은 일종의 ‘교섭’이나 ‘유화’적인 태도가 된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면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관점을 전파하는 일은 결국 그 사람이 몸을 움직이도록 설득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즉 비평은 상대방을 행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또 행위적이다. 어쩌면 영화를 무빙 이미지로 탐색하는 일에는 그런 생각이 뒷받침되는 것도 같다. 비평의 목적은 자세를 고치지 않고서도 대상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다양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 일일이 공감을 보내기 어려우니까. 무빙 이미지의 가장 큰 특징이 횡단이라면 우리는 그만큼 많은 것들을 스쳐 보내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일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붙잡으려면’ 이에 제동을 걸만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비평의 역할이다. 


비평에서 무언가를 ‘부여잡거나’ ‘끌어안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 탓이다. 많은 것이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초전도체 논란은 ‘미끄러진다’라는 일을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우선 ‘매끄럽다’라는 단어와 ‘미끄러진다’라는 단어 사이에는 그 안에 걸림돌이 없어서 서로 마찰을 빚을 게 없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초전도체가 ‘저항’을 벌이지 않기에 에너지의 효율이 극대화된다고 진술하면서 초전도체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다른 한편 점점 더 원자화되며 서로에 직접적인 접촉을 피해 가려는 이들에게서 ‘마찰’은 상대방을 대면할 때만 벌어지는 특수한 상황처럼 여겨진다. 서로를 마주 보았을 때 일어나는 저항이 삶에서 에너지를 앗아가거나 또는 비효율적인 에너지 운용을 유발한다고 보는 이 관점에서 대화는 잡음이 된다. 그들은 치지직거리고 비리비리한 잡음이 채널 수신에 방해된다고 여기며, 목소리를 선명히 들으려면 채널을 향해 정방향으로 안테나를 조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하늘을 향한 안테나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저 넓은 우주의 과거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얼굴을 맞대면서도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이 늘어날 때 공론장은 천의 얼굴을 한 무언가가 되고야 만다. 모두가 같은 꿈을 꿔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모두 하나의 지구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작은 곳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올려다본다. “저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요.”라고 말하는 일은 유튜브에서 낡은 무성영화를 감상할 때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이런 영화들은 우리의 지금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되려 우리의 오늘에 가깝게 느껴진다. 표면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무성영화들을 두고서 ‘매끄럽다’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고고학자라면 ‘탈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는가?”라고 자문해보고 싶다. 유튜브의 알고리즘들, 히틀러의 목소리로 만들어낸 애니메이션 오프닝 곡 패러디 같은 온갖 잡음들을 뚫고서 우리 앞에 도달한 이 영화들은 우리 세계의 바깥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우리의 과거였지만, 너무 오래되었기에 되려 외부인처럼 느껴진다. 이런 알고리즘에서 영화는 쏘아올린 과거를 가지고서 작업하는 평면, 혹은 현재를 ‘끌어안음’이다.  


우주의 빈공간에 카메라를 둔 채 오랜 시간을 노출시키면 그곳에는 우주의 오랜 역사가 펼쳐진다. 시간은 현재로 지나왔지만, 사진에서는 말 그대로 ‘펼쳐진다.’ 영화도 이와 유사하다. 무빙 이미지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여러 표면을 타고 다니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하늘에 올려다보이는 별자리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인상으로 다가오듯 ‘이미지’란 인간의 표면에서 여러 형태로 인식된다. 따라서 내가 영화 비평에 갖는 생각은 ‘매끄러운 과거를 부여잡는 방식’이다. 무언가를 찾거나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많은 경우 검색 엔진을 통해 인덱싱된 정보를 ‘즉각’에서 발굴해내는 오늘날의 환경에서 ‘정보’란 ‘미끄러짐’을 뜻한다. 인덱싱된 정보들은 여러 태그들로 수식되면서 이를 레일 삼아 이용자의 사고를 발산시킨다. 마치 레일건처럼, 사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탄환을 쏘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가 저항 없는 미래를 마주하기를 원한다. 이때 비평은 매끄러운 평면들을 한 점으로 쏘아 에너지로 만든다는 점에서, 미끄러지는 힘을 뚫고 가는 힘으로 변환한다는 점에서 두 세계 사이에 길을 낸다. 이윽고 상호 간에 유지되던 압력이 깨어짐에 따라 미래는 출구가 된다. 


「출구는 이쪽입니다: 대피소로서의 영화관」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많은 경우 평면화되고야 마는 디지털 자료들이 어떻게 인간을 대피시키는 통로가 되어줄 수 있는지였다. ‘대피’는 공간의 속성이므로 그 안에 머물거나 거주할만한 장소성이 없다면 평면은 그저 방해물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입체’가 장소의 속성이라고 보는 이 입장에서 비평의 역할은 이야기를 만들고 가꾸는 일이다. 영화가 대피소가 될 수 있다면 여기에는 항상 관객과 영화 사이에 ‘착오’라고 불릴 법한 간극이 있어야만 한다. 가령 알프레드 히치콕이 눈동자와 욕조의 배수구를 병치했을 때 생겨난 건, 영화는 모르지만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미래, 즉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미래”였다. 관객만이 알고 있는 이 비밀스러운 쇼트는 도래할 미래에 대한 감각을 ‘예지’라기보다 ‘파국’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관객에 의해 예측된 이 미래는, 향후 영화의 전개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보다 자신이 예측한 것을 마주하며 넘어서야 하는 도전자의 지위를 부여하며, 이를 따라 ‘착오’란 그 강제성에서 추락의 위치성을 갖지만 한편으로는 추락에서 ‘가속’을 발굴해내는 능력을 획득한다. 


추락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낙하로, 마땅한 착지 없이 낙하의 감각만을 갖는 일을 우리는 ‘파국’이라 부른다. 이때 낙하는 바닥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면을 가정하지 않지만, 되려 이러한 낙하를 극복하고자 미래로 가속하는 과정에서 평면으로 작업한다고 볼 수 있다. 무성영화는 빨리감기에서 생동력을 얻는데, 이들이 매끄럽게 보이는 일에서 대두하는 가속의 감각은 이들 영화가 그 자체로 과거에서 우리 현실에 초과해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들은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기에 되려 우리의 현재로 뚫고 들어오는 ‘출구전략’을 택할 수 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영화가 평면으로 작업되기에 마찬가지로 영화에 담긴 생각에서 평면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사로잡히지 않을 매끄러움을 다루는 것이 된다. 극장에 방문해 어떠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던 것이 창이라면, 그들이 우리에게 방문해오거나 침투해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심어준 건 마이크로소프트 이후의 창이다. 윈도우 탐색기는 모든 과거에 동시다발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이 모든 과정에서 ‘매끄러움’을 획득했고 그런 점에서 항상 표면으로 작업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미끄러진다’라는 표현을 두고서 게임 속 무기에 강화가 실패해서 파쇄되어버리는 일이나, 혹은 매수한 주식이 원하는 수치에서 갑작스레 낙하해버리는 일을 가리키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끄러진다’라는 말은 원하는 목표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대상을 부여잡지 못한 채 추락하고야 마는 상황, 주로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이라는 단어는 20세기가 꿈꾸었던 미래가 좌절된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지만 우주를 깊게 들여다보면 이들 점 하나하나가 모두 은하라는 점이 밝혀질 때 비평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르크스가 세계의 불합리함을 논증해낸 태도가 사회주의였듯이, 모든 평면 사이에는 그들이 끌어안은 저마다의 고민들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저항이 없다’라는 뜻을 지닌 ‘미끄러진다’라는 말은 효율성이라기보다 고립을, 소통이라기보다는 상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면에서 ‘심도’는 ‘착오’로, ‘간극’은 ‘거리두기’로 이해되며 예컨대 모든 인간이 서로와 미끄러지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과거 안에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불편하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 세계가 끝없는 추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 우주는 점점 멀어지고만 있어서 이대로 가다간 아예 서로를 볼 수 없는 곳까지 밀려나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상에 어떠한 태그를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인덱싱 작업을 거치는 일은 오히려 서로에 대한 매끄러움을 부여잡기로 변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파일 탐색기의 인덱싱 능력은 파일로 하여금 위치 짓기에 저항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반대로 파일은 이를 통해 인식과 간극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작업대에 오른 영화들에서 평행함은 미래로의 분기점이기보다 여러 편집 상태가 하나로 얽힌 중첩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타임라인이 무한정 제공되는 편집 프로그램에서 평면은 영화를 편집하는 일을 두고서 ‘그 어떤 영화적 이미지도 발견할 수 없다’고 조언하기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소유하기”라는 미래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마치 <김군>의 작업방식처럼,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는 하나’를 위해 미끄러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속은 미래를 향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에너지원 삼는 일종의 레일건이다. 다시 말해서 비평의 역할은 가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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