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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1. 2024

장르와 에티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무 속에서 유지되는 것은 존재, 잠재적 상태의 존재이다. (…) 그에게서는 무가 세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세계는 남아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오카다 마리의 <마보로시>는 ‘환상’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어 원제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번역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이 해외에 유통되었을 때의 제목과 동일한데, 그런 점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몇몇 지점이 있다. 첫 번째는 동양과 서양 간의 가치관 차이이다. 세세하게 나열할 생각은 없지만 영화를 두고서 ‘환상’이라는 단어로 축약해버린 일은 영화를 소개하는 일에서 이것이 같은 선상에서 다뤄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비교적 명료한 ‘소년과 왜가리Boys and the heron’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원판에 비해서는 보다 직설적이다. 주인공인 소년과 인도자인 왜가리를 지명하는 이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을 내세우는 서양식 신화에 보다 가깝다. 반면 원문의 뉘앙스는 모티브가 된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사건에 질문을 던지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인물보다는 개념이나 세계에 더 집중하는 뉘앙스다. 삶의 방식 자체를 제안하기보다는,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를 자문하게끔 하는 이런 형식에서 우리는 인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라기보단 “세계의 눈으로 바라보아진 인물”을 묻게 된다. 


서양에서는 세계라는 말을 플라톤적 관점에서 묘사되는, 진리에 대한 정의와 재현의 문제로 이해한다. 반면 동양에서는 보는 이의 마음과 수행에 중점을 두며, 서양에서 ‘내쳐진’ 것을 ‘존재함’으로 여긴다면, 동양에서는 세계와 자기 사이를 비어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비어있는 게 주변이라면, 동양에서 비어있는 것은 마음이다. 이 흥미로운 관점차는 어쩌면 영화들을 사유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보인다. 가령 주변의 상실을 존재라고 말하는 관점에서는 ‘나’와 ‘세계’ 사이를 설명할 수단이 없어지므로 자리에 대한 의식이 발달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연결되기 위해 해내야 할 과정들 모두가 자리에 대한 의식을 형성하며, 이때 우리가 목격하는 건 ‘행진’이다. 또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우선 비워놔야 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전시와 수집의 의식이 발달하게 된다. 인상들을 수집해서 전시하는 일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서 자신의 맥락으로 변위되므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입장, 혹은 관문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위의 영화들에 적용하면 말하는 법이 다르더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같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영화는 영화의 물성을 두고서 이야기 안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명민함이 있다. 두 영화에서 ‘세계가 끝난다’라는 말은, 영화가 끝난다라는 말처럼 시간적으로 필연인 무언가이면서 동시에 관객을 풀려나게 하는 쪽의 ‘입장’을 갖는다. 가령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경우 <환상>은 개개인의 트라우마를 끝내는 방식에서 ‘언젠가는 끝나야 할 것’으로의 영화로 이해된다. 트라우마와 충격 이후의 삶을 그린 이 영화에서, 어둠 너머로 환한 불빛이 다가오는 일은 터널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본다’란 ‘걷는다’라는 입장에 대입되어, 영화를 보는 순간 결정된 풀려남의 순간은 회복에 대한 결론에서부터 의견을 출발시킨다. 이를 따라 관객은 영화를 남겨두는 쪽이 되고, 영화와 인간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이 ‘언젠가는 끝난다’라는 점에서 트라우마는 영화가 끌어안아야 할 것이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개인과의 일상에서 먼저 사망하는 쪽이 됨으로써 세계를 끌어안고 사라지는 ‘대속’의 기능을 갖는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라는 이 논제에서 우리는 운명에 대한 자기 예지와 실현, ‘자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목격한다.


실패라는 말을 패배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패라는 말이 대상이나 존재의 연속성을 두고서 이를 변형하는 일이 좌절되었음을 가리킨다면, ‘패배’는 자기를 유지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패가 되기의 실패라면, 영화는 “세계는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일을 묘사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끝내기까지를 이미 전제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자기를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음을 전제한다. 오히려 영화는 세계를 끌어안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대상을 바깥으로 밀어낼 뿐이다. 영화는 세계의 모든 원죄를 끌어안기보다 살아남은 쪽에 의문을 남기며, 우리는 이를 대속이라 부른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주체는 자신이 더는 영화에 동화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이를 통탄한다. 그와 동시에 주체는 자신이 어떻게, 왜, 어째서 살아남았는지를 고민하면서 세계의 바깥에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 영화에서 실패란, 영화 속에 사는 일에 대한 실패이지 현실에 대한 게 아니다. 영화에서 대속은 전적으로 “끝내기’에 속하며 이는 ‘생존’을 ‘살아남기’보다는 ‘죽기의 실패’로 이해하게끔 한다. 


대속을 두고서 주체와 세계의 교환으로 이해하는 일은, 그러한 대속 이후의 세계가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소위 말하는 리부트란 세계의 해체에 주체를 의탁한다는 점에서 자기의 속성을 간과하거나 배제한다. 세계가 자기를 넘어설 때 실패가 갖는 생존의 기능은 사라지고야 만다. 리부트는 연속성에 단절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삶을 단계화하고, 이는 실패의 정의를 패배로 새로 쓰는 일이다. 리부트가 갖는 단절의 기능은 자기를 끊어내어 재연결한다는 점에서 새로 쓰기로 이해되지만 반대로 과거를 저버린다는 점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대속을 두고서 교환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러한 사건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영화는 주체를 풀려나게 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주체를 생존하게 할 때 비로소 의미 있다. 즉, 영화란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은 그러한 점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삶을 ‘가짜현실’로서의 환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세계의 법칙을 구성하는 환상을 스스로 끊어내는 환상살을 보여준다.  


환상은 주체를 강하게 사로잡지만, 그러한 강도는 스스로에게서 부여된 것이기에 반대로 주체가 사태를 이어갈 수 있다는 일을 증명한다. 환상으로서의 영화는 깨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또 무너지기 위해서만 생존한다. 그러니까 영화를 환상으로 이해하는 일은 그게 이미 현실에서는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알 때 생겨나는 하나의 특수한 현상에 가깝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동시에 영화를 끝낸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자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는 점에서 ‘환상’의 기능을 현실에서 이관하는 일이기도 하다. 환상으로서의 영화란 주체의 죄를 사면하는 게 아닌, 실패를 떠나보내는 하나의 의례다. 대상을 응시하는 순간부터 환상은 청산작업을 거치며, 이런 환상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실패를 대하는 주체의 기능적 태도이다. 이른바, 환상으로서의 영화란 전적으로 이미 끝나버린 것들에 관해 말한다. 혹은, 끝내고 싶은 것들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고레에다가 전자라면 오카다는 후자에 속한다. 두 영화는 환상이 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환상을 통해서만 자기를 대할 수 있노라고 믿는다. 


환상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지만, 그게 영화에 있을 때 세계를 대신하는 것은 환상이 아닌 우리다. 육체에 생존해있는 이상 육체의 고통이 세계의 고통으로 전이되는 상황처럼, 때때로 영화는 확장된 신체의 대피소처럼 기능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탑이 모든 시간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묘사되는 일은 환상이 세계를 평면화하는 방식만큼이나 영화가 기억을 서술하는 방식을 연상케 한다. 이들 영화에서 탑은 어느 날 갑자기 꽂혀 들어온 것이라는 점에서 푼크툼의 일종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탑은, 세계에 찔러 들어온 이미지는 다시금 이를 마주함으로써 세계를 풀려나게 한다는 관찰자의 감각으로 이해된다. <바람이 분다>가 전자라면 <그대들>에서 하야오의 입장은 아마도 후자였을 것이다. 탑이 무너진 자리를 무엇으로 두든 간에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떠난 자리를 채우는 일은 남겨진 자로서 관객의 역할에 해당한다. 그러한 점에서는 주어진 세계로 작업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오카다는 ‘환상’에서 신체를 초과할 수 없는 몇몇 세계들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이머의 신체는 주어진 세계 안에서 창출되지만 반대로 자기는 모든 작업에 선험적이다. 허욱의 말을 따라 영화에서 관찰자가 아닌 행위자의 입장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환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블루 아카이브]의 시나리오 총괄은 게임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수미상관은 긍정이고, 긍정은 에티카다.” 이 말은 최종장의 주요 전개에서 프레나파테스와 시로코-테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학생들을 부탁한다”라는 유언이 비교적 종교적인 맥락으로 이해되려 할 때 양주영(총괄)은 “종교적인 것이 아닌 다른 맥락으로 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이 이야기가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서 사유되기를 원했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을 유저와 함께 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대속으로 이를 이해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희생은 어떠한 장르를 따라 강제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에티카’는 세계를 환상으로 덧씌우는 과정과 이를 통해 대해지는 자기를 서술한다. 이러한 점이 게임의 레벨 디자인이 가진 강제성과 영화가 내보이는 응시의 강제를 겹쳐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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