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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01. 2024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밀도차

<서울의 봄>(2023) 


<서울의 봄>에 대한 인상 깊은 평 중 하나는 영화를 보며 <남한산성>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도 <서울>은 그런 면이 있었는데, 특히 ‘만고의 역적’이라는 대사가 시종일관 머리를 맴돌았다. 영화의 마지막에, 전두광과 바리케이드를 두고 대치한 이태신이 국방장관의 명으로 장군직에서 보직 해임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라는 반란군 측에서 바라본 이태신은 ‘만고의 역적’일 테다. 이들에게 이태신은 마치 머리를 조아리러 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이어지는 후일담에서 이태신은 고문실에 끌려가 물속에 얼굴이 처박히는 ‘삼궤고구두례’를 당한다. 이러한 묘사는 전두광의 군사 반란이 결국에는 쿠데타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역적’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를 증폭하는 것만 같다. 무엇이 나라를 위한 일인지를 묻는 갈림길에서, 역사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사극과 현대사라는 점에서 일견 나란히 두어보기가 쉽지 않지만, 이런 연상은 다음 같은 대목으로 설명된다. <서울>을 보러 극장에 방문한 젊은 세대에게 영화가 제공하는 것은 ‘어떻게 쿠데타가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들은 (저지에) 실패했는가’라는 물음이라고 말이다. 우선 두 영화는 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과정에서 ‘예측’은 불허되며 결론을 뒤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영화는 ‘실패’를 향해 달려가므로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내야 할 서스펜스라던가 하는 것은 없게 된다. 서스펜스가 영화와 관객 간의 정보 격차라는 점에서 실제 정보가 알려진 이들 영화에서 ‘격차’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사건건 현실에 압도당하면서 실재와의 간극만을 체험할 뿐이며, 관객은 선택의 분기점들에 놓인 ‘만약’의 가정들을 박탈당한다. 


어찌 보면 스포일러를 당한 채로 영화를 감상한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한 감상형태를 떠올리게 된다-과거에는 비평이 하던 일을 나무위키가 대신한다는 것. 관객은 영화를 볼 때 이야기나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세부적인 이미지나 인상들에 천착하고, 이 과정에서 탈락한 정보들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무위키를 읽는 것으로 해결한다. 즉, 이미지를 먼저 받아들이면서 서사를 사후적으로 ‘재가’하는 모양새인데 이는 이미지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인상에 덧붙여지는 서사는 그 첫인상으로 모든 걸 결정한다는 점에서, 나머지 세계를 최초에 수렴시킨다는 비판점이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건 맞지만, 그 방향이 결론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미 어떠한 운명을 안고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운명에 대해 말해보자. 누군가는 운명을 두고서 개인의 선택을 초과해 존재하는 세계에 빗댄다. 그 설명을 따르자면 운명은 ‘선택’과 분기는 개인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세계의 파멸을 마주해가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즉, 우주는 무한히 분기하는 평행우주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엔트로피계의 절망을 따라가는 파국만을 남긴다는 것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게임 속의 아몬처럼, 개인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개인이 끝내는 일은 만들어진 이상 작가의 손을 떠나버린 이야기들에 크나큰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선택을 초과해 존재하는 세계들을 바꿔놓는 게 그런 개인들의 연대라고 볼 때, <서울>은 관객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무기력감을 선사한다. 이는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이기보다, 부정성을 거부당한 역사의 매끈함에 관한다. 


영화로서 <서울>의 매력이 ‘재미’에 있다면, 이야기로서 <서울>의 매력은 바깥의 상실에 있다. <남한산성>의 무대가 고립된 성벽에 국한되듯이 <서울>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사로잡혀있고, 여기서 출성은 거부된다. 수도방위사령부를 비롯한 여러 군부대의 영역이 교차하는 이 영화에서 주요하게 묘사하는 ‘출성’은 전방에 있는 부대를 뒤로 빼느냐는 일갈에서 시작해, 육군본부를 포기하고 도주해버리는 육군 수뇌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최전선에 서서 부대를 지휘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육본이 본부를 버리고 퇴각했을 때, 여기에는 그들이 거주해야 할 ‘역사’와 무대를 포기해버렸다는 망연자실한 현실만이 남는다. 영화의 각색이 들어간 것은 이 대목으로, 반란군이 육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들에서 우리는 자리를 지키는 것들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창작물을 통한 역사는 하나의 변곡점과 여러 선택의 지점들을 남기게 된다. ‘하나’라고 일컬은 건 대개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으로 하나를 꼽는 경향이 있어서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의 매끈함’은 그 자체로 도덕과 윤리 면에서 고결함을 요구하는데, ‘도덕은 트래킹 숏의 문제다’라고 말해졌던 <카포>의 사례를 언급해보고 싶다. 뤽 물레가 재현의 윤리를 지적하는 자리에서 카메라 촬영의 ‘매끈함’은 미끄러짐으로 탈바꿈하여 이들이 정말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에 등장하는 몇몇 쇼트들에서 유대인 수용소의 철조망은 어딘지 모르게 <서울>의 대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태신이 전두광에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하는 과정에서 철조망을 넘어가는 모습을 카메라는 여러 구도로 보여준다. 이때 쇼트는 마치 이태신의 성품처럼 재현의 논리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전두광과 이태신을 빗대자면 전자는 뜨거운 쪽에 후자를 차가운 쪽에 둘 수 있다. 전두광이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실행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면, 이태신은 일선에서 서는 지휘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자신의 죽음에 거리낌이 없다. <서울>은 감독의 전작인 <아수라>처럼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인물들을 갖고서 작업하지만, 이들이 서로 끝까지 간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이태신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포기하지 않으며, 이러한 결의는 이것이 ‘역사’이기 전에 한편의 영화라는 점을 연상케 한다. 역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미 모든 일에 결론이 나 있는 상황에서 관객은 전두광의 행적들을 살펴보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역사를 초과해 영화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 이태신은 전두광과 대립하는 캐릭터로서, 작품을 일방적이고 무의미한 재현극으로 만들지 않게 된다. 


가령 <서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개봉했던 김지운의 <거미집>을 떠올려보자. 영화는 ‘플랑세캉스’를 주된 소재로 언급하는데, 영화의 주인공인 감독은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결정적’ 장면을 찍을 때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 장면이란 플랑세캉스, 한 개의 숏과 시퀀스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연결성이 주가 되는 촬영 기법이다. 이때 감독은 이를 수행하려면 카메라가 계속해서 미끄러져야 한다고 말하며 배우가 위기에 빠지든 말든 ‘카메라를 멈춰서는 안 된다’라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를 통해 <거미집>이 보여주는 건 재현에 관한 강박이 아니라 영화는 항상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단 일 초라도 관객의 현실 밖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최전선의 감각이다. 영화가 관철하는 신념만큼이나 <서울>에서도 인물들의 행동은 저마다의 관점에서 관철되며, 또 밀고 나가진다. 


<거미집>은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일에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카메라는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필름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같은 논리에서 <서울>은 요약해서 기록된 역사적 사건의 타임라인에서 생략된 것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예측이 불허된다는 영화상의 매끄러움이 강조되는 대목은 이곳으로, 영화는 카메라를 전면으로 밀어내며 스크린을 계속해서 채워넣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역사는 전복되지 않는다. ‘역사’란 정말로 존재했던 사실이라 카메라가 이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어떠한 재현의 논리에 사로잡히고야 말며, 이미 패배나 승리를 가정하는 일은 무색해진다. 이미 패배가 결론지어진 상황에서 카메라는 이들이 어떻게 반란에 성공했는지가 아니라 실패가 흩뿌려지는 과정들을 논한다. 즉, 영화는 실패의 감정들을 갖고서 작업한다. 


실제 역사가 그렇기에 영화도 실패에 사로잡힌다면, 자연스레 실제 역사에서 겪었던 굴욕과 실패의 경험 또한 스크린에 옮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서울>에서는 촬영기법으로 플랑세캉스가 등장하지 않지만, 특정한 순간들이 한 시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이들 역사를 숏과 시퀀스 자체가 일치하는 플랑세캉스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밀도차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들이 표면에 떠오른다면, ‘실패’ 또한 그런 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전면화된 실패의 과정은 오히려 그 아래의 무거운 것들이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에 빛난다. <서울>은 전두광의 군사 반란을 ‘사후’적으로 재가하기보다는 이태신과 같은 인물을 무게중심 삼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두광의 필요조건으로서의 이태신을 말하며, ‘전방’은 어떠한 침략들을 막기 위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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