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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9. 2023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세계를 위해


언어는 많은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 말이 두루뭉술하게 들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든 면을 열어두길 바란다. 묵비권이라는 개념이 있듯이 침묵이나 공백, 여백과 빈틈, 간극 등은 되려 우리가 포섭하지 못한 것을 내포한다. 그렇게 보면 언어란 언어(화)가 실패한 세계를 담지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가령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에서 “한 언어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서 격리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내부로 던져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대상에 관해 특정한 언어를 갖고서 접근하는 일은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두고자 함이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가 실패한 자리란 [세계]의 바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따금 우리가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적확하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그런 바깥에 있어서일 테다. 가령 고레에다의 <괴물> 같은 경우를 떠올려보자. 제목에서 제시되는 ‘괴물’은 관객을 의도적으로 내부로 밀어 넣으면서 3부의 반전을 말미 삼아 [세계]로의 진입을 거부한다. 영화는 [세계]에서 밀려남에 따른 충격을 자성의 도구로 사용한다. 


발터 벤야민은 “언어는 그 언어에 조응하는 정신적 존재방식을 전달한다. (…) 이 정신적 존재방식은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언어는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수 없으며 하나의 [세계]로 기능한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마치 <듄>의 언령처럼 표현하는 것과 지시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일과도 같다(외국인에게도 언령이 동일한 효과를 갖는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표현과 지시를 일치시키는 작업은 카메라의 응시가 수행하는 것, ‘감독’의 책무가 아니던가? 감독에게 영화를 찍는다는 건 세계를 가두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포착이나 재현은 하나의 언어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항상 어떠한 [세계]에 갇혀있으며 이를 통해 영화는 고립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담지한다. 카메라가 아무리 생동 넘치는 풍경을 재현하더라도 얄팍하게 나뉜 시네마 프레임 밖으로 눈을 돌리면 그곳엔 시궁창 같은 현실이 자리할 수도 있다. 카메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끌어안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남은 걸 지키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침묵은 많은 경우 공백으로 이해되곤 하나, 서로를 끌어안을 때야 안과 밖을 모두 부여잡을 수 있다. 상대방이 도망쳐서든 아니면 상대방과 도망치는 것이든 간에 연결될 수 없는 것들에 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언어와 단어 간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단어는 언어가 아니라면 고립되어 있고, 그런데 언어가 한 세계를 가리킨다면 단어란 그런 세계 안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언어’와 [세계]는 내부에 실패가 있기보다는 그런 실패를 안고 살아가는 현실에 관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언어는 무언가를 적확하게 가리키지 못하는, 또는 마주할 수 없는 현실에 관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들 단어를 끌어안는다. 말하자면 침묵이나 공백은 그런 실패를 회피하거나 하기보다는 줄곧 살아가야 하는 일을 묘사한다. 카메라가 오히려 무언가를 포착하는 일이 세계를 닫아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포착’이라는 말이 포획(Capture)이라는 단어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지킨다’라는 말에 관한 관점을 다양하게 분열시킨다. 


<진격의 거인>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시조 거인이 된 에렌이 “나는 자유다”라고 말하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하늘을 배경 삼아 활공해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에렌이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 선택한 일이 오히려 운명에 포획당하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언어가 지닌 의미적 맥락을 양분한다: 어떠한 세계를 묘사하는 일은 이를 기리고 보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런 세계에 갇혀 자신을 유폐하여 추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맥락이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항상 어떠한 간극이나 착오를 발생시키며 둘 중 무엇을 따를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이에 관해서는 <드라이브 마이 카>나 <유레카> 같은 문맥을 언급해두면서, 최종적으로는 김병규의 <날씨의 아이> 비평을 참조해보고 싶다. 일단 전자의 두 개 영화는 폐허를 양동작전 삼아 진행된다는 점에서 [세계]를 점점 파국으로 몰아넣는 듯하지만, 결국 안에 머무르기를 택한다는 점에서 안전하다. 이는 각각 실어증이라는 키워드로 표현되어, ‘침묵’을 깨트리는 일에 열중한다.


<드라이브>의 후반부에는 설원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우린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에게는 왠지 모르게 <러브레터>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추상은 아무쪼록 아내의 죽음과 히로시마를 배경 삼는다는 점에서도 ‘장례식’이라는 테마에 조응한다. 가령 쓰레기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다는 발전소는 오즈 야스지로의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묘사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굴뚝’의 은유를 연상시킨다. 고인의 삶, 기억과 이별하는 방법이 바로 장례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이들 장면은 마치 언어를 와해시켜 기억이 응집할 수 있는 지점을 제거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들 영화의 굴뚝은 한 세계가 끝나는 일을 지적하지만 그 방식은 세계가 파괴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고, 붙잡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세계]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이들 영화의 언어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는 좀 다르다. 김병규는 <날씨>를 두고서 “버려진 아이와 괴물이 된 아이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의 빈틈을 응시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이 빈틈은 두 아이, 호다카와 히나가 [세계]의 법칙을 거부해서 발생한 이변이다. [세계]의 법칙에 소속되었던 히나가 점차 언어-이름을 잃고서 사라지는 장면은 몸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기능을 상실한 육신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곧 자신이 [세계]가 되는 방식에서 히나의 투명한 몸이 어떠한 ‘바깥’으로 이를 두고서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일은 ‘제도권 생물학을 벗어난 존재’로서 그녀를 직시한다. 여기서 핵심은 ‘거부(Denial)’당한다는 점으로, 존 로페는 부인(Denial)을 두고서 “단순한 행위가 아니고, 두 부수적인 순간들, 중지(suspension)와 이상화(idealization)를 포함한다.”고 적는다. 나머지 모두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면서, [세계]를 바깥으로 되돌리며 내부에 남겨진 자기를 이상화하는 이 순간은 괴물성에 남은 인간성만을 획득하면서 이질적인 면들은 모두 바깥에 남겨두는 것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연에서 [세계]의 안쪽을 파고 들어가는 영화의 결말은 둘을 위해 나머지 모두를 버렸다기보다 [세계]가 보여주었던 것들에 관해 침묵하기를 택한, 여백의 기운을 남긴다. 


이 점에서 <괴물>의 3부가 갖는 맥락은 “괴물은 누구게?”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그런 과정에서 전달되는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닌 질문 자체가 어떠한 실패 자체를 내포함인 것 같다: 영토화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거기엔 원주민이 있으니까. <괴물>의 장르가 마치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평가는 포착과 포획 사이에 놓인 입장에서 대상에 관한 판단을 중지시킨다. 우리가 대상에서 본질과 타의를 분리해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 언어화는 중단되고 이름은 고유명으로 남는다. 그 점에서 <괴물>의 마지막 장면은 더는 이어질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는 작품 고유의 영역을 형성한다. 누군가는 이를 감옥으로 부를지도 모르지만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서식할 수 있다는 말은 달리 보았을 때 멸종위기종이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괴물>에 대해 해야 할 말은 그저 침묵하는 일인 건 아닐까. 한 세계를 살아가는 일에서 우리 스스로는 [세계]가 부여잡은 것들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 무언에 의해 살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괴물>에 관해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감정은 ‘바깥’이나 ‘폐허’, ‘세계’와 ‘이후’와 같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를 어떠한 틀로 구획하는 일이 대상을 결정론적 세계 옮아 넣는다면 여기서 틀을 해체하는 일은 오히려 언어를 해체해서 [세계]를 침묵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동물을 풀어줄 때 그게 정말로 동물을 위한 일인지를 자문하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 울타리 안에서 보장받는 안위와 모든 걸 자신의 의지로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자유’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동물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부인된다. 동물은 자신이 어떤 [세계]에 소속되었다는 점을 모르기에 어떠한 언어들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중단하거나 침묵하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다. 이른바 언어를 잃어버린 세계가 갖는 무한성은 죽음의 부재로서 주체를 존속시키고, 또 불안에 떨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언어를 상상하는 일은 한 삶꼴을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썼고, 알랭 바디우는 “주체는 언어가 실패하고 이념이 중단되는 지점에서 (…) 공백이, 원래 불러내지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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