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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9. 2023

연결하지만,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


“세계가 어떠한 단절이나 무관용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세계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괴물>에서 우리가 던져보게 될 이 질문은 적어도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영화에 대한 반응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건 교육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였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인데 호리 선생의 태도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교육자로서 최악이다.”라는 의견이 있었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부모의 모습이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닌 ‘어른’의 입장에서 논해졌던 이 의견은 영화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음을 전함과 동시에,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부각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땐 ‘나’를 버리고서 영화에 동화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어른’들에겐 책임의 문제가 더 다가왔던 모양이다. 논하자면 영화가 이들에게서 책임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고 반대로 이들은 영화에서조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는 일시적으로 자기에 이탈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책임을 전달하기엔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다. 이는 영화에 관객을 끌어들여 개인의 영역을 빼앗고, 그렇게 공백이 된 쪽에는 자신이 보여주려는 몇몇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인의 무의식에 침투해 구조를 바꿔놓는다는 의심은 프레임 사이에 광고 등을 끼워 넣는 서브리미널 효과와도 같다. 영화는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으며, 되려 관객이 자신에 몰입할 때를 이용한다. 영화는 이미지와 몽타주를 통해 언령을 내리며, 이러한 투입은 항상 관객의 현실을 초과한다. 이 점에서 현실을 응용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현실을 닮을 수는 없는데, 영화가 관객에게 현실을 전달하는 방식은 어쨌거나 그 사이에 틈새를 이용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영화에서 개인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쇼트의 연속만큼이나 관객 또한 자신을 여러 형태로 순간화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영화에서 어떤 순간을 발견하는 일은 이따금 삶의 한 영역에서 실재를 찢고 들어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소위 바르트가 ‘찌른다’고 말했던 이 이미지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찢김’뿐이다.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때를 이용해 영화가 찔러넣는 이 이미지는 그들이 의식적으로 수집하여 종합했던 것들을 찢어놓는다. 이를 통해 개인은 세계가 불안정한 곳임을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괴물> 같은 부류의 영화에서 아이들이 줄곧 자기만의 세상에 도피하는 건 그 때문이리라.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은 대개 스크린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기 마련이어서 인물도 마찬가지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마주한다는 건 자기를 분해하고 재조립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자칫하면 이전의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이전과는 달리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가 택하는 건 결국 자아와 공간을 일치시키면서 더 좁은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괴물>의 이야기가 어떤 감동을 전한다면 이는 세계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했던 자기를 발견할 때, 즉 이들이 세계에 거리를 두며 환생하기를 꾀할 때 그런 빈틈에 반목하는 자기를 마주할 때다. 환생은 자기를 유지하며 다른 무언가로 된다는 점에 중점이 있는 행위이므로, 세계가 자기를 찢어놓으려 할 때는 자아를 밀집해 그러한 틈새를 견뎌내는 일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들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계를 찢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단절과 무관용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 세계를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세계는 단절과 무관용으로 가득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를 영화로만 남겨두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를 초과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세계의 책임을 개인에 안기기에-이는 우리가 영화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영화에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아를 단결하는 일뿐이다. 외부의 위협에서 자아를 유지하는 일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영화’가 ‘바깥’으로 기능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현실을 더 단단히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영화는 현실에 관한 공공의 적으로 지정됨으로써 관객에게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한다. 이 맥락에서 <괴물>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공공의 적으로 기능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이 영화가 도달하는 건 아이들에 대한 진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을 보여주었을 뿐이라는 한 가지 현상학적 진단일 뿐이었다고. 그렇게 믿는 순간 <괴물>은 진실을 파악하는 일보다는 어른들을 ‘바깥’으로 지정하면서 세계가 책임져야 할 것들,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야기가 된다. 결과적으로 <괴물>은 아이들을 무언가로 발견하기보다는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가 발견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책임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들에겐 영화와 현실 간의 구분점이 없다. <괴물>은 우리를 ‘바깥’으로 발견한다. 우리가 보았던 게 스크린의 안쪽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라고 느낄 때 영화는 우리를 밖으로 밀어낸다. 이 아이들을 영화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영화를 통해 판단을 중지하고자 하는 거리두기의 한 면모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세계가 자신을 바깥으로 밀어낼 때, 우리는 그에게서 영화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게 된다: 아이들로서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영화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환경은 세계에서 이탈하는 법을 도피와 단절에서 찾게끔 했을 테다. 사실 영화를 보는 일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특정 시간을 갑갑하고 오래된 상태로 보낸다는 건 책임이 재구성되거나, 순간화하는 일에 대한 경계이기도 해서다. [세계]는 멈춰 설 때 판단중지를 요구하며, 또한 책임지기를 요구한다. 이 점에서 <괴물>은 줄곧 미끄러지고 있다.  


이른바 책임을 지는 문제는 영화와 현실 간의 구분점을 없애버린다. 바꾸어 말하자면 <괴물>은 자신을 계속해서 구분하려 들지만 우리는 매순간 같은 장면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런 책임과 연결되는 일을 거부당한다. 의외로 이런 점에서 <괴물>은 전작 <브로커>와의 연결점이 돋보인다. 고레에다가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가 책임을 지는 이야기라면 근래 고레에다에게선 “우리가 왜 책임을 질 수 없는가”라는 중지의 형식이 더 부각된다. 전작에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괴물>에서 미나토가 “왜 태어났을까”라고 묻는 일에 관한, 일종의 선제타격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만약 <브로커>가 가족의 형태를 질문하는 게 아니라 미리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이들 스스로를 하나의 영화적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가족적인 순간을 판단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매끄럽다’거나 ‘연속된다’라는 말은 이런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판단중지는 이러한 매끄러움에서 벗어날 용기와 책임을 요구하는 행위다. 


고레에다는 형식상에서 판단을 유보하지만 반대로 그런 매끄러움이 대상에 대한 판단을 보다 명료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레에다는 그런 책임이 떠도는 풍경들을 서술해보려 했던 것 같다. 고레에다의 영화에는 많은 경우 책임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등장한다. ‘어른’으로서의 고민에 응답하는 것으로써 쇼트를 구성하는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현실은, 그 책임의 무게만큼이나 항상 관객의 현실을 넘어서 있다. 영화는 현실의 어떤 순간을 찢고 들어오며, 이를 따라 ‘나’를 버리고서 영화에 동화되는 일은 거부된다. 이는 특히나 고레에다의 영화가 보여주려는 게 아이들이라는 점에서 그러한데, 일반적으로 ‘아이’를 책임지는 입장에서의 어른이란 자기보다 우위에 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현실을 따라 재구성되기를 거부했고, 고레에다가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다고 말하는 일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책임을 진다는 건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자,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아이들은 대개 가능성을 품은 존재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고, 이는 우리가 그들을 재구성하려 들지 않기 위한 한 가지 전제조건이 된다. 아마도 우린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을 돌볼 누군가를 기다려왔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영화는 책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사실은 고레에다 영화의 존재원리이자 어른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고레에다는 영화가 스스로 책임을 짊어질 수 없으며, 성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고레에다에게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객관적 현실에서 이탈하는 게 아니며 어쩌면 환생을 위한 하나의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화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보았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 영화로의 이동이 아니라 영화에서 현실을 재구축하는 일에 중점을 두게 된다. 즉, 현실이 재구축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태어난 것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영화란 환생의 일종이다. 결과적으로 이 맥락에서 고레에다의 영화는 두 개의 원리를 갖는다. 


첫 번째는 “영화는 현실이 단절과 무관용으로 가득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며, 두 번째는 <괴물>의 아이들이 말하듯 “현실의 이미지를 갖고서 작업한 영화와 영화의 이미지를 갖고서 작업하는 현실들”에 관한 물음이다. 첫 번째 사례에 속한 고레에다의 영화는 <환상의 빛>이나 <디스턴스> 같은 부류이다.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으로 시작했던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고립계의 일원으로서의 포착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포착한다고 믿는 일은 다큐멘터리의 기초적인 방법론이니 말이다. 하지만 피사체를 고립하는 일은 그 절단에서 우리가 나머지를 책임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마주한다. 이런 포착은 대상을 분리해 결단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나머지 모두를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므로, 세계를 연결하지만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는 소멸의 관점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괴물>의 1부와 2부를 버려서는 3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에서 우리는 1부와 2부를 거쳐 3부라는 진실에 도달했다고 여기게 된다. 이런 포착을 두고서 단절과 무관용을 의도한 것으로 보는 일은 3부를 일종의 환생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환생이란 결국, 연속성을 염두에 둔다 한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존재라고만은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마치 미나토의 어머니가 미나토를 두고서 ‘이상하다’고 여기는 순간이 있듯이 우리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몇몇 순간들은 우리가 책임지지 못해서 영화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영화가 포섭하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끌어안는 형태다. 즉 <괴물>은 현실을 끌어안는 게 아니라 현실을 초과해있는(넘어선) 영화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미래의 한 형태에 가깝다. 오히려 이 영화에는 현실에 있을 것만 같은 어른들을 갖고서 작업한 ‘바깥’과 어른의 책임들로 구성된 아이들이 등장한다. <괴물>의 아이들은 마치 어른의 책임에 끌려 만들어진 존재인 것만 같다. 예컨대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서술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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