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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01. 2023

인식은 이야기 바깥

<괴물>(2023)

장면 하나에서 출발해보고 싶다. 영화의 3부에서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가 정글짐 형태의 탑에 올라서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인물을 따라 올라가면 구조물의 최상부가 마치 새장처럼 보인다. 새장에 갇힌 두 사람이 있고, 이 너머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레 이들의 관계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이 장면을 언급해두려는 건 이 영화가 3개의 시선으로 분절되었기 때문이다. 3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같은 장소나 시간을 방문하곤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중복되지 않는 것들이 몇몇 있다. 1부에서 사오리(안도 사쿠라)가 교장(타나카 유코)이 마트에서 아이의 발을 거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 계속되는 주차 실패의 과정 등은 “아이에 의해 발을 걸리고,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시선처럼 보인다. 또한 2부에서는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의 연인이 묘사되며 교무실 내부의 동료 교사를 보여주는데, 호리가 이들에게서 듣는 말은 모두 일방적이다. 그리고 3부는 실질적으로 1부와 2부에 대한 리버스 쇼트처럼 기능하며, 이들에 대한 하나의 반응로로 기능한다. 이때 이들이 모두 한곳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사용된 반복의 예로는 대표적으로 걸스바의 화재씬이 있다. 각 부가 시작할 때마다 영화는 걸스바의 화재 장면으로 돌아오며, 이는 곧 이야기의 진행에서 관계를 내부에 묶어두기 위함이다. 바꾸어 말해, 이렇게 반복되는 순간에 포섭되지 않는 몇몇 장면들은 ‘위생학적’으로 영화 내의 담론과 분리되어 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전혀 동떨어진 생각이지만 3부의 정글짐 장면은 유운성이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언급한 ‘히로시마 첨탑’과 어느 정도 겹친다. 역사적인 맥락은 없지만, 반대로 이 장면이 영화의 ‘바깥’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 논의를 인용해두려 한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영화의 제목에 관해서다. ‘괴물’이라는 제목은 1부의 맥락에서 “누가 괴물인가?”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 하지만 3부에 이르러서는 미나토와 요리가 서로 간에 하는 ‘괴물’ 놀이가 묘사됨에 따라, 이 단어는 “괴물은 ‘무엇’인가?”라는 문장으로 바뀐다. 이에 관해서는 영화의 각본가 사카모토 류지의 의견을 따라보자. “사실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 안에서 묘사하는 악인이 프레임 바깥에서는 좋은 사람이고, 선인이라 생각한 사람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나.”[1] 내 의견은 이 영화에서 ‘첨탑’이 바로 그러한 바깥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동선이 서로 겹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세계를 보여주는 3부에서는 그렇지 않은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정글짐은 그중 하나이며 특히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볼 때, 이 장면의 함의는 뜻깊다. 2부의 마지막 장면이 산사태에 파묻힌 전차를 두들기는 것으로 끝나고, 3부의 마지막이 전차를 두고서 환생에 관해 논하던 아이들이 막혀있던 선로 너머로 떠나는 것임을 염두에 두면 이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메운 햇빛은 아이들의 사망을 간접적으로 은유한다. 다리를 건너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삼도천과 다리의 모티브를 연상케 하며, 어쩌면 환생하려면 일단은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열린 결말을 맞이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장면에서 ‘열려있는 것’은 결말이자 하늘인 것, 그런 이야기의 ‘바깥’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늘이 풀숲과 동굴의 미스터리함에 상반된다면, 화면의 절반 이상이 하늘로 뒤덮인 이 장면은 ‘자유롭지 못하다’라는 인상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괴물의 외피’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는 즉, 환생하려면 괴물의 외피를 벗어나야만 하며 그들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여긴다는 게 된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하늘로부터 보호받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갇혀있는 것일까? 이 문제의식은 적어도 영화가 아이들 자체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의 시선에 오롯이 던져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내부와는 거리가 있다. 영화가 ‘돼지의 뇌를 한 인간’, ‘인간의 뇌를 한 돼지’를 주제로 이러한 부정교합 자체를 괴물의 형식으로 지정하는 한편 하늘을 향해 열린 쇼트는 외부를 받아들인다는 느낌으로, 영화의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가 지정하는 형식이 시선의 역전에 따른 고저 차와 위치 에너지의 충격량을 자아낸다면, 3부는 그런 충격이 어떠한 반전을 위해 소모된다기보다 두 아이를 보호해준다는 인상이 강하다. 즉, 비밀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자유를 포기한 이 형식은 그 태생에서 외부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따라 3부는 의도적으로 지워냈던 흔적이 돌아옴에 따라 이야기가 급전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는 의도적인 왜곡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봄으로써 같은 공간이라도 여러 흔적이 머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위에서 말했듯 소방차에 대한 여러 장면은 1부에서 아이들과 부딪혔던 사오리의 모습을 3부에서 인터넷 라이브 방송의 역쇼트로 보여주는 대목이나, 1부에서 호리 선생에 대한 ‘걸스바’ 소문이 2부에서 아이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뿐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즉, 이 영화에서 특정 장소와 시간으로 돌아오는 일은 뒤늦게 진실에 도달한다기보다는 시선이 머문 자리로 돌아감으로써 영화 장치가 갖는 비가역성에 대해 말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영화가 외부자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따라가며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따져 묻는 1부와 2부가 특정 사건에 대한 형식적인 제스쳐를 취한다면, 3부는 이들 당사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는 그들 자신을 소개하기보다 1부와 2부에서 생략된 부분들을 보완하는 방식, 즉 부재의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사실상 3부는 어떠한 진상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 영화의 한 가지 전언에만 불과하며 이로써는 괴물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결국 한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논해온 ‘소방차’ 장면은 영화가 계속해서 같은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말함과 동시에 바로 그 순간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시작된 이후로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괴물]이라는 제목이 갖는 진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작의 순간을 지정하면서 이런 순간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두 아이의 관계는 특정 선을 넘지 못하며, 막힌 구역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담은 마지막 쇼트는 그런 점에서 다소 긍정할 만한 면이 있다. 만약 ‘죽음’이 이야기의 끝에 해당한다면 이를 두고서 ‘결론’이라거나 ‘결말’이라거나 하는 식의 논의가 가능하니 말이다. 즉, 영화가 계속해서 같은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죽음’은 그런 반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죽음은 이들이 말하는 ‘환생’의 선행조건으로만 이해될 게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지만 같은 순간이 아닌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환생’은 돌아와야 하는 ‘바깥’이 아니라 출구전략으로서의 방향설계에 더 가깝다.  


괴물의 외피를 벗어난다는 것. 영화가 전하는 환생의 모티브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는 점 보다 일종의 탈출에 가깝다. 3부의 시점으로 나머지를 이해하면 이 아이들은 계속해서 부모나 학교 등에 줄곧 붙들려오는 것이고 이는 곧 순간을 바꿀 수 없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만이, 비로소 출구전략이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분명 ‘환생’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던지지만, 그러나 이는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환생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면서, 여전히 자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환생은 그 주제상에서 위생학적인 면이 강한데, 환생은 자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돌파구로 어떠한 형식 바깥으로 나가기를 선택한다. 이른바 환생은 자기를 결정하는 요인 중 가장 순수한 것을 오염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반복적으로 따라가는 몇몇 쇼트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현실이다. 가령 이 영화를 악인의 서사로 따라가며 누가 정말로 나쁜 사람인지를 따져 묻는 일은, 앞서 말한 영화의 비가역성에 대한 논의와 이어지며 파악되지 않는 진실에 대해 인간과 돼지 사이의 상호전환이 불가능할 뿐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1부에서 관객이 교직원에 가진 선입견은 3부의 동정적인 연주씬에서 보상받지 못하며, 교장이 가진 문제는 문제의 교장이라는 인식 안에 파묻혀버릴 뿐이다. [괴물]이라는 제목은 그런 점에서 앞선 장면이 묘사하는 새장이 인식의 한계 틀로 기능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누구든지 재판에 오를 수 있지만, 여기서 바깥은 새장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사유된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여기서는 선과 악을 판가름하는 일보다 “보편자를 무대에 올리는 형식”으로서의 순간, 또는 영화가 갖는 비가역적인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1]유선아,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씨네21, 웹사이트, 2023.11.30.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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