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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1. 2023

무대의 뒤편, 너머의 얼굴

얼굴과 표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는 이를 세계와 조우하는 최전선이라고 표현해보고 싶다. 우리가 수면에 얼굴을 비출 때,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표면에 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계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얼굴이나 표면 따윈 있을 수 없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세계에 나를 ‘던짐’으로써 비로소 얼굴을 갖게 된다. 잔잔한 물결의 세계는 우리를 안을 때 표면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표면에 자신을 던져야만 표면이 드러나듯, 얼굴은 타인을 마주할 때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이런 표현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그 근본에서 얼굴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전’이라 볼 수 있을 이 문제의식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가 ‘이전’을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현재를 기준으로 돌아설 수 있는 형태의 순간을 뜻하는 걸까.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놓친다는 점에서 ‘이후’와의 근본적인 변별력은 없게 된다. ‘이전’에 관해서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언급했던 일이 있다. 무대에 오름으로써 발화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말하기들의 예행연습에 관해 이전과 이후를 떠올렸다. 언어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 게 있다면, 우리는 사고를 세계에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언어를 표면으로 지칭함으로써 이전과 이후를 사유할 수 있다. 


즉 표면은 항상 현행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헌데 그렇다면 이전과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드러냄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오직 현행적인 것만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대로 드러냄 이전에 무언가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드러난 이후에도 줄곧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봄으로써 그러한 미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이 경우, 우리는 드러내고 난 후에는 계속해서 그런 표면을 밀고 나가야만 한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표면을 두고 이전과 이후를 구분 짓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바로 그 이후, 유지의 속성이 얼굴을 구성하는 성질이 되기 때문이다. 지속의 과정으로서 표면을 논하는 일은 이전과 이후를 양단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오직 이전만이 있다. 바로 이 이전이 얼굴 뒤에 숨겨진 ‘나’의 정체다. 얼굴은 ‘나’의 이후가 아니라 이전을 가리키는 표면으로써 이곳에 있다. 얼굴과 표면이 항상 현행인 건 그 탓이다. 얼굴은 ‘나’이기를 바라면서 항상 자기를 대하는 문제를 생각한다. 얼굴은 자신을 이루는 근본적인 뼈대들을 생각하게끔 한다. 이런 점이 매체의 물질적 지지체와 자기지시성의 문제에 빗대어질 수 있는 것 같다. 매체는 자신을 있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항상 생각함으로써 스크린을 하나의 표면으로 대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표면의 문제란 무엇인가. “자신을 있게 하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자 이러한 사유의 행위를 지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사유를 부딪히는 일이자 서로의 삶을 대결하는 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서로 표면을 맞닿게 한다는 뜻에서 무언가 마찰이 일어날 것만 같지만, 이때의 대결은 양단을 견주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현행일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일이다. 즉, <얼굴들>은 무엇이 현행일 것인지를 대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강현의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일을 보며 이런 인용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이들 인용에서는 흔히 얼굴이 세계쪽으로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미래 방향을 긍정하는 시선이 내포되어있다. 그러나 이강현은 오큘로의 인터뷰에서 “의미는 시스템이 던져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스템의 맵이 펼쳐진 풍경”을 언급하는데 이런 언급은 구조에서 포섭되지 않는 의미를 인간에 빗대고 있다. 즉, 여기서 의미란 펼쳐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부류인 잠재인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강현의 다음 언급이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중성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이 부박한 모조품의 세계이지만 (…) 현수는 시스템의 말단의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의미를 배분한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이강현의 <얼굴들>에서 나오는 세 인물 중에서는 택배기사인 현수가 이 역할을 수행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인물들에서 등장하는 현수의 모습이 특수한 형태의 조연으로도 보이기도 하나, 이강현의 언급대로 그는 말단을 연결하며 의미를 배분한다는 점에서 영화 미학의 한 형태가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랑시에르는 공동의 것을 주장하는 과정이 바로 정치이며, 미학의 역할은 이러한 감각적 경험을 재분배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의 맥락으로 이어보자면, 영화에서 현수의 역할은 구조화된 영화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공동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혹은 그런 얼굴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강현이 시스템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는 큰 감동으로 돌아온다. 오진우의 말처럼 이강현의 <파산의 기술>에서 티브이가 텅 빈 얼굴로서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준다고 생각해보자. 이강현에게 티브이는 영화의 축소판이며 또한 표면은 얼굴의 축소판이다. 이강현은 얼굴과 영화를 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라보면서 의미를 시스템의 축소판으로 정의한다. 이강현이 <파산의 기술>과 <얼굴들>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소 차갑거나 기계적인 듯 보이나,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의미의 분주한 이동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물 위의 꽃가루 분자처럼 이들을 규정하는 건 어떠한 규칙이나 대상이 아니며, 시스템과 존재라는 두 개의 쌍뿐이다. 


그래서 현수는 시스템 안에서 ‘의미’로서 규정되며, 이 영화는 의미의 무작위적 부딪힘이 된다. 다시 표면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스크린과 표면의 관계는 영화적 세계의 끝자락에서 관객과의 분리를 가리켰다. 여기에는 투명한 창이 있고, 영화적 세계는 이를 두고 현실과 분리돼있어서 상호 간에는 일방통행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프레임이라는 형태로 보면 영화는 단순한 화면 송출 기계인 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이미지의 활화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규정하는 마노비치의 견해를 따라, 여기에 두 개의 운동을 두어보자. 활인화와 부동화가 그것이다. 이 둘은 우리가 흔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부류의 활동과 정지를 표현한다. 움직인다와 멈춘다, 캐릭터의 과장된 움직임이 이들 운동에서 비롯되며 이들 시스템 안에서 캐릭터는 ‘의미’로서 드러난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프레임화된 이미지를 두고서 활인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때의 활인화는 영화에서 정지된 화면, 또는 그에 비견될 만한 타블로이드 쇼트에 빗대어지고는 한다. 이 지각의 늘어짐이 애니메이션의 유동성과 결합하고 나면, ‘캐릭터’란 의미를 지속하는 존재로서 부딪힘의 핵심 중추가 된다. 가령 애니메이션 심슨 시리즈의 표준 오프닝 크레딧에서는 멀티플레인 기법이 적용되어 카메라가 표면을 파헤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2D 이미지를 3D 환경 안에 배치하고 이를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오브제의 크기를 넘나드는 이 기법에서 카메라는 그러한 이미지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즉, 이때의 카메라는 그 자신이 캐릭터로서 의미를 관철하여 지속하는 존재가 되어준다. 여기서 카메라는 구로사와가 풀숲을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하나로 모으고 있지 않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촬영에서는 카메라가 앞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미지 간에 부딪힘이 생겨나고 있다. 즉 이 지속에서는 부동하려는 움직임(카메라)이 드러나려는 움직임(이미지)과 부딪히면서 의미의 재분배가 이뤄지고 있다. 카메라의 현행적 움직임은 정주함이 아니라 전진에서 힘을 얻으며, 여러 차례의 절단이 이루어짐에 따라 의미는 파편화한다. 또한 의미가 파편화함으로써 존재는 되려 자신에게서 더 많은 ‘이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역설적으로 의미가 파편화해야만 부딪힐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점은 영화에서 트래블링 쇼트가 갖는 도덕성 논란이 사실은 자기 발견의 과정에 관한 한 가지 오해라는 점을 보여준다. 원자핵의 분열처럼 의미는 한자리에 모일 때 한 점의 폭발이 될 뿐, 타인을 마주하는 얼굴이 의미를 파편화하는 듯 보여도 역설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가리킨다면, 이게 그에 대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비단 이강현의 영화만이 아니라도 영화에서 얼굴들이 갖는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얼굴은 축소되지 않지만 반대로 표면은 얼굴의 축소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 우리는 몇몇 영화가 무언가 거대한 것의 일부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이때 그런 영화들은 우리가 어떠한 세계에 소속되어, 무언가와 부딪히면서 더 큰 의미를 파급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때의 얼굴은 세계를 전면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런 세계를 가로지르도록 최초의 폭발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들 영화에 주인공이 될 수 없겠지만, 영화와 우리 사이에 있는 의미들은 영화나 우리 양측 모두에서 획득되는 게 아니라 그저 어떠한 얼굴들 사이를 가로지르기만 할 뿐이라는 점에서 우리 또한 계속해서 이전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카메라는 전진함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들로부터 ‘의미’를 가져올 수 있다. 카메라의 전진은 심슨의 멀티플레인처럼 의미를 파헤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와 부딪히면서 얼굴을 내보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른바 카메라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영화라는 것으로 재구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우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미지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실천시킨다. 우리는 사물의 이전에 대해 알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세계는 얼굴로서의 우리를 이전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에서 의미란 건 인간에게서 사회화와 마찬가지로 영화화의 결과물인 것 같기도 하다. 


카메라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꼽히는 발견은 우리가 시야를 맺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치는 응축의 과정을 평면에 뿌려둠으로써 카메라의 멀티플레인을 수행한다. 우리는 세상을 3D로 보지만, 세계와 맺는 관계들은 2D이기에, 영화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항상 언어 이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적 지지체로부터 자신을 세계에 맞닿게 하지만, 정작 영화를 구성하는 건 세계에 대한 개인의 감각이다. 인간의 사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꼽히는 ‘부대낌’은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대두하는데, 이런 ‘나’는 세계를 밀어내는 만큼 자신 또한 밀려난다는 의식 안에서만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카메라에서 렌즈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기록의 과정에서 좌시되는 건 응축이다. 빛은 응축되지 않으면 표면에 자신을 기록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은 기본적으로 빛이 세상과 맞닿는 형태임에도 그 표면에서 걸쳐 하나의 평면으로 남겨진다. 이런 기록의 과정이 우리 자신이 입체로 여겨지게 하는데 일조하지만 정작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평면의 뒤편에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이강현의 <얼굴들>이 남긴 이야기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건 그런 세계가 남긴 흔적들, ‘이전’이다. 말하자면,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는 건 결코 세계의 후면에 숨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흔적이 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완성하게 될 뿐,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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