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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3. 2023

스침과 미끄러짐, 위기와의 엮임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려보자. 김소희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이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현재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레트로마니아와 미래주의자로 나뉜 세력 싸움이 정작 지금-여기에서 벌어짐에도, 정작 현재는 간과되는 것 같다. 현재를 바꿀 수 없다고 믿어서일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본다면 ‘다시’의 가치란 비교에 있진 않을 테다. 왜냐하면, 찬란한 과거를 현재에 가져오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를 있는 그대로 숭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전’에 대한 애호의 논리는 현재와의 비교에서 그 ‘바깥’을 성립시킨다. 이후도 매한가지다. 이후 또한 존속을 위해 현재를 요구한다. ‘아니다’의 비(非)가 성립하려면 이게 무엇에 관한다는 설정이 필요하기에, ‘현재’는 설사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존속해야만 한다. 그리고 202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에서 공간은 그러한 현재를 다루는 듯 보인다. 아무런 의미도 행보도 없지만 ‘바깥’의 세계가 지금-여기이기 위해 필요한 것. “개연성이랄게 하등 없는” 세계 말이다.       

       

개연성이라는 말은 그럴듯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연성의 상실은, 그럴듯하지 않음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현실능력을 상실하면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모르게 된다는 점을 떠올리자. ‘현실’이 기준이 되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뭐가 있을법한 일인지를 따져 묻기란 어렵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우리가 느낀다면, 그런 현실은 ‘개연성’이 부재한 세계를 만들어내기엔 충분하다. 말하자면 개연성의 상실은 절대적인 기준의 붕괴를 동반한다. 가령 <사냥의 시간> 같은 부류의 한국영화에서 논의된 지금-여기의 상실은 낙원에 대한 합의의 부재에서 비롯됐다. 1) 낙원에 소속된 이가 낙원의 바깥으로 나온다면, 그건 이미 낙원일 수 없을 것이다. 2) 따라서 낙원이 직간접적으로 관측될 경우 그건 이미 낙원이 아니다. 3) 결국 낙원은 절대적인 기준의 상실을 요구하며 이 점에서 개연성의 부재를 동반한다. 낙원은 ‘절대’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만 성립 가능한 믿음의 한 가지 형태인 셈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국영화 위기론은 하나로 일괄해 풀이할 수 없다. 판데믹 시기를 지나며 개봉이 미뤄진 영화들에선 제작시점과 공개시점에 차이가 생겨났다. 즉, 만들어진 시점이 개봉 시점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 텍스트에 관한 분석은 정교함을 잃는다. 하지만 오히려 이를 멀리서 들여다볼 때 일련의 경향이 드러나는 것 같다. 판데믹이라는 시기를 통해 드러났지만, 이에 대한 분석은 판데믹 시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판데믹의 근교로 논의의 지변을 확대해보고 싶다. 자, 여기 <사냥의 시간>과 비슷하게 판데믹 시기에 걸친 놀란의 영화 <테넷>이 있다. 이 영화는 판데믹 이전에 제작됐고 우연히 판데믹 상황에서 개봉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개봉하자 사람들 사이에선 <테넷>이 판데믹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농담이 돌았다. 극장에 들어서자 혼자가 되고, 마스크를 낀 채 시간을 역행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판데믹 시기의 관람행위 같았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테넷>은 판데믹과 무관한 판데믹 영화였다. 


무엇보다 <테넷>이 우리에게 남긴 건 ‘현재’의 자국이었다. <테넷>에는 현재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영화는 엔트로피의 역행을 주제삼아 타임라인 위에 존속하는 선형적 시간을 묘사한다. 인버전을 통해 엔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지만, 이러한 역전은 오직 사물계에만 적용될 뿐이라서 현상계의 인간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또 늙어간다. 그래서 인물들은 인버전을 행함과 동시에 현재의 자국 안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절대’란 없으며 이를 따라 지금-여기는 부재하는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인버전이 가능한 세상에서는 절대성의 기준이 세계에서 주체로 이동함에 따라 개연성의 존속은 모두 주체의 것으로만 남는다. 이른바 ‘현재’가 부재한 세계는 오직 주체만을 그럴듯한 것으로 남긴다. 인물이 세계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세계가 인물을 따라 움직이고, 우리가 물어야 할 지금-여기는 ‘이곳-지금’의 나로 변동된다. 즉, 여기서 개연성은 개입하여 연결하는 ‘나’에게 적용된다. 판데믹은 시기적인 이탈을 통해 이러한 개연성을 드러냈고 이를 따라 판데믹 이후의 영화들이 생겨난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하나 해보자. ‘이후’의 영화란 바깥의 역할을 개인과 주체에게 맡긴 부류가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우리에게 판단의 기준이 되는 바깥이 개인과 주체에 맡겨질 때, 현재는 공백으로 남는다. 영화를 보는 기준이 프레임이 아니라 관측의 장소와 지점이 된 세상에서 ‘현재’는 되려 순간적이기에 판단될 수 없는 가치에 속한다. 그러니 우리가 일련의 영화를 구분 짓는 것에 시기는 다소 분명하지 않은 기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 영화가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일련의 순서대로 우리에게 흘러들어옴에 따라 형성되는 개연이다. 놀란의 <오펜하이머>가 말하듯, 원자 사이에는 거리가 있지만 이들 사이를 알 수 없는 힘이 끌어당김으로써 사물이 일련의 형체를 갖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영화 간에는 제작의 시점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개연성이 이들 간에 현상을 두둔한다. 현상으로서의 낙원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으나, 중요한 건 그런 낙원이 자신을 작동하게끔 바깥이 되는 주체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에게 ‘이후’가 현재를 말하지 않는 것엔, 아마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비단 한국영화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소리다. 현재나 지금 없이, 이전과 이후를 탐색하는 영화들에서 현재와 지금은 서로를 끌어당기기 위해 마련되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들 영화의 개연은 관객에 의해 집합되어 구성되고 있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현재에서 퇴거당한 이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사회에서 주로 통용되는 거주 공간인 ‘아파트’를 공간의 문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아파트란 인물의 소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아파트를 토대로 액션이나 갈등이 벌어지고 있진 않다. 영화는 인물이 사건을 마주하는 방식을 통해 내러티브를 펼쳐둔 다음, 이 내러티브의 촘촘함이 어떤 형태로 무너질 수 있는지를 구상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씨줄과 낱줄이 서로 엮인 이 구성은, 약간의 건드림에 악기처럼 소리를 내다가 특정한 구성에 잘못 다가섰을 때 원사 전체가 풀려버리는 붕괴의 조짐에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런 직조의 양식에서는 무엇이 중심일까. 구심점은 없고, 마찬가지로 공간에서도 안과 밖은 없다. 단지 엮임만이 있을 뿐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관한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 단어가 언급된다. 하나는 ‘이후’이고 하나는 ‘재난’이다. 전자의 경우 영화의 장르를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규정하는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후라는 말의 용례를 생각하자. 포스트의 맥락으로 말해지는 이후는 아마도 벤야민의 파국을 일컫는다. 벤야민의 주요 테제인 ‘지금’과 ‘이후’는 미래를 환대하는 기능으로 작동해왔다. 그 미래는 과거에서 주어져 있었다고 말하면서, 재난을 마주하는 태도는 파국이기보다 환대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벤야민에게 몰락은 곧 숭고를 의미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카프카를 지지한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에는 이야기에 아무런 전조도 없고, 결말도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 인물은 그냥 벌레로 변하고 좀 어이없게 죽는다. 도입부에서 소설은 두루뭉술하면서 편치 않은 꿈을 꾼 주인공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재난의 시점이 영화 내에서 딱 한 번 제시되는데, 이는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에 제시된 상황은 <변신>처럼, 악몽이 끝나지 않거나 그런 악몽을 독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꿈에서는 악몽이 시작하는 특정한 영역이 있다. 이 영역의 문턱에서 꿈꾸는 자는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이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을 싸움에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이 신경감응이 그를 해방하는 결과로 끝날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그가 악몽에 더 가위눌리게 될지는 싸움에서 결정된다. 후자의 경우 그 신경감응들은 해방의 반응이 아니라 예속의 반응이 된다.”[1]


벤야민에게 파국은 신경감응의 일종으로서, 폭발의 전조에 해당한다. 벤야민은 혁명이 일어나려면 신경이 몸 전체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따라 꿈의 도래는 비극이 아니게 된다. 쉽게 말해 무언가 일어나려면 몸은 고통으로 가득해야만 한다. 벤야민에게서 ‘이후’라는 말은 바로 이 상황을 가리킨다. 최고로 고통스럽지만 무언가 벌어지기 위해 유예되어야 할 시간, 빗대자면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이 손가락을 튕기기까지 걸린 3초 정도의 시간. 고통이 지속되어야만 비로소 몸은 변화의 가능성을 얻으며, 이는 <변신>의 악몽이 다시금 변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이들 글에서 규정되는 ‘재난’은 보다 범위가 좁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재난의 상황을 다룬 이 영화가 ‘이후’로서 기능한다면, 이는 영화가 ‘이전’을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조와 유예의 관점으로 본다면 축제에 가깝다. 공동체에서 축제의 기원이 일상에 균열을 내어 파국의 징조를 의도적으로 빼낸다고 보았던 관점에서, 축제란 ‘이후’로 넘어가거나 지속하는 데 필요한 작업이었다. 매끈한 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지구촌 시대의 열돔 현상과도 같았고 여기서 갈등은 봉합되는 게 아니라 대기에 반사됨으로써 강화된다. 


아파트에의 종속이 심화될수록 집단의 갈등은 등장인물의 몸에 상처로 새겨진다. 즉, 아파트와 신체가 신경감응하는 상황에서 아파트는 폐허를 집약하는 곳으로서의 신체, 가단성과 불가분성으로의 신체를 묘사한다. 파국의 시간에서 신체는 집약의 ‘원천’으로 이전과 이후를 갈라놓지 않으며, 되려 그 가운데에 맞서 파국을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황궁아파트는 일종의 제단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파국을 귀신처럼 불러들이는 장소, 사람들은 신체를 제단에 바치며 이를 하나의 기원 삼는다. 모든 의례와 현상이 집합되는 곳, 소멸이자 시작점이 되는 곳으로의 신체. ‘이후’란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후라는 표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맥락에서 사용될 수 없다. ‘이후’는 이전이 자신을 속이는 표현이다. 바로 이때 파국의 역할이 대두한다. 재난은 이전이 자신을 말하기 위해 이후를 불러오는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황궁아파트는 아파트이기에 가능한 일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갈등을 집약해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황궁아파트의 거주민은 집단의 해방이 아니라 예속을 위해 세계에 봉사한다. 이 과정에서 꿈의 역할은 미래 방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과거를 맴돌면서, 이를 혁명의 전조로 삼는다. 


이후는 우리 세계에 바깥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깥이 없다는 말은 내부를 세계적인 문제로 확장시키는 게 아니라, 세계를 내부의 문제로 축소한다. 이를 따라 이들 영화에서 이후는 탈출이 아닌 지속가능성의 문제로 변모한다. 잠들면 죽는다는 것,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벤야민은 깨어있음을 혁명의 전조로 보았지만 이들 세계는 처음에 그러한 깨어있음을 불면증처럼 묘사한다. 황궁아파트의 거주민은 외부집단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침번을 서고, 순찰을 선다. 쉽게 말해 이들 아파트는 한시라도 잠들어있을 수 없다. 굳이 축젯날이 아니더라도 이곳에는 항상 시간과 긴장이 도래하고 있으며, 그들이 원치 않더라도 세계는 점점 더워질 것이다. 그리고 더위는 신체의 대사률을 높이면서 신경감응의 확률을 높인다. 갈등이 벌어질 확률, 꿈이 만들어낸 열돔현상에서 인물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일뿐이다. 이쯤 되면 영화에서 이후는 재난이 벌어지고 난 후가 아니라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에서 해법을 찾는 듯 보인다. 이들은 아파트에 모여 스스로를 감금하고, 희망도 그렇다. 이들은 아파트를 삶의 마지막 장소인 이후로 여기지만, 되려 가위눌림에 가깝다. 


영화는 황궁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을 묘사하면서 안과 밖을 분리하는 듯 보이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재난의 시간이 악몽으로 제시되는 시퀀스에 있다. 가령 재난의 상황이 악몽이라면, 영화가 보여주는 건 꿈의 시간인가? 재난이 닥친 후에 살아남은 황궁아파트는 악몽 이후일까 아니면 그저 꿈의 세계일 뿐인가. 황궁아파트의 축제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후자에 가깝다. 노래방 기계를 필두로 인물의 과거에 진입하는 카메라는 특정한 지점을 연다기보다 꿈의 세계에서 틈새를 발견하고 있다. 여기서는 무언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끝나지 않았음이 줄곧 강조된다. 영화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관계성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의 성격을 결정하지만, 꿈의 세계에서 경계나 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만큼 이야기도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후로서 끝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이런 상황이 제시하는 건 바깥의 부재가 아니다. 노래방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이 보여주는 건 이 영화에도 균열은 있고, 또한 그런 균열을 필두로 안팎이 뒤집힐 미래를 타진하는 것이다. 즉, 이 공간은 무의미하게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전’과 ‘이후’로 분류될 수만은 없다. 


그런 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한국형 재난영화의 계보에 놓는 일은 정교하지 않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일에는 재난이라는 말이 빠져야 한다. 언제부턴가 한국영화에서 재난은 현재성을 상실하는 일과 연결되곤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생겨난 공백은 행진을 위해 마련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짝코>(1983)나 <길소뜸>(1986) 등과 더 잘 어울린다. 한국사회의 특정 시기에서 이후에 놓인 인물들이 이 영화들에서 묘사된다. 이때 중요한 건, 그러한 ‘이후’가 인물의 개인사를 절단하지 않고서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이후는 신체를 상처입히지 않는다. 반대로 신체는 이후에 의해 피 흘리지 않는다. 이는 특히, 실제 시기와는 무관하게 그러한 시기에서 완전히 변질된 신체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유의깊다. 짝코의 휘어버린 코와 길소뜸의 흉터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신체에 대입한다는 점에서 그것 자체로 외부를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 다른 경우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등장인물의 사건보다 상처가 더 세계를 잘 드러낸다. 절벽으로 떨어진 소녀와, 아파트에서 투신한 사내의 신체가 온전하게 남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마치, <독일영년>의 소년처럼 말이다. 

          

[1]발터 벤야민, 『카프카와 현대』, 최성만 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20) pp.3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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