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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30. 2023

판타지와 SF의 차이는 우주의 법칙에 있다

“판타지와 SF의 차이는 우주의 법칙에 있다. 우주가 개인적으로 반응하는 게 판타지라면, 우주가 모두에게 반응하는 게 SF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테드 창이 한 말로 알려진 이 문구는 SF가 왜 현실주의와 연결되는지를 잘 말해준다. SF는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리는 일을 다룬다. 이때 세계관 안의 사람들은 ‘그것’이 발견되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혹은 지금의 삶 ‘이전’을 상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21세기 사람들에게서 에어컨을 빼앗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 될 것이다. 21세기 사람들은 에어컨이 발견되기 전에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지 못한다. 2020년대 초입에 있던 판데믹도 그렇다. 판데믹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재고하게 했고, 또한 삶의 여러 면에서 다르게 생각할 것이 강제되기도 했다. 판데믹은 장르가 아니지만 영화보다 더한 현실이었다. 영화는 언젠가 끝나지만, 현실은 악몽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 점에서 SF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라기보단 ‘이전’과 ‘과거’를 상상할 수 없는 비가역적 삶을 다룬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SF는 엔트로피계와 비가역성을 다룬다. 그래서 SF는 결단이나 단절이 더 중요해지고, 사태는 회고적이 되며, 미래에 대한 시선은 수정주의적이 된다. 


놀란의 영화들에서 물리학은 SF라는 말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비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이라 할 수 있을 놀란 영화의 인기는 물리학에 의한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단과 단절, 회고와 수정주의를 필두로 한 현실주의에 깊이 심취해있는 것 같다. 가령 우리가 놀란에게서 물리학을 발견하는 일은 단지 놀란의 어떤 면을 설명할 요령으로 채택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놀란이 현실을 물리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하기 때문인데, <테넷>이나 <덩케르크>처럼 놀란은 영화의 물성을 스크린 내부에 결합하려 한다. 가령 <테넷>의 장면 하나를 언급하자면 이렇다. 회전문을 통해 시간에 물리적으로 감는 형태를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도로에서 펼쳐지는 시간 교차 레이스는 필름의 선형성을 영화에 들여오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근래의 영화가 필름을 넘어선 타임라인을 실현하는 일에 반대하면서, 영화를 두 번 보는 일에 관해서 ‘시간’은 항상 선형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테넷>의 회전문은 시간의 방향을 바꾸는 장치이지 시간을 돌려 감는 장치는 아니다. 즉, <테넷>에서는 노화와 죽음은 여전히 비가역적이고 그에 대한 증명으로, 여행하는 존재인 ‘나’에게 의식은 항상 평형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바로 이렇게 의식이 평형하기에 우리는 SF에 매료된다. 소위 말하는 가속의 시대에 결단이나 단절은 우리의 시간선이 분할하는 지점이 되고 말기에. 무엇보다 현실적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대체하려 들지 않는 이 SF는 그 무엇보다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곳은 항상 우리가 의식하는 현재일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현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그곳에 이미 ‘나’란 존재는 없을 것이다(알츠하이머가 이런 부류다). 그래서 <테넷>은 알고리즘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단지 과거를 회고하기만 할 뿐, 그러한 과거를 대체하거나 수정하려 들진 않는다. <테넷>은 표면적으로 시간여행의 플롯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찾아 헤매는 건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알고리즘으로써 이는 미래의 예정된 파멸을 불러오기에 위험한 물건으로 분류된다는 걸 떠올려보자. 알고리즘 기술의 일부를 가져온 게 인버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물질과 기억”의 완성된 판본이 되리라는 점을 쉬이 예측할 수 있다. 이 경우, <테넷>의 이야기는 물질이 불안해져 접촉면이 상실될 때 지각과 기억의 변동이 불러올 파멸에 관한 게 된다. 즉 <테넷>의 물리학은 우리가 붙들지 못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에서 역설적으로 현실이 고유함을 찾는다. <테넷>은 주인공이 과거에 만난 것과 미래에 만날 것도 모두 자신임을 깨닫는 영화다. 그러니 <테넷>은 엔트로피계를 역행하는 영화가 아닌 것이다. <테넷>의 알고리즘이 불러올 세계의 파멸은, 모든 이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세계이면서, 물질과 기억 간의 접합 면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세계가 미끄러짐으로만 풀이되는 그런 세계이다. 그리고 놀란의 물리학은 우리가 현실과 마찰하는 바로 이 지점을 소명한다. 


놀란의 영화는 스크린을 접촉면의 일종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이른바 놀란을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일은, 현실을 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다루려는 시도의 일종이다. 꿈의 심층으로 진입했다가 나오는 과정에서 부여되는 수직의 이미지를 관객이 스크린을 내려다보는 형태에 대입하는 <인셉션>이나, 시공간의 묘사를 방의 형태로 만듦으로써 이를 영화관 혹은 스크린에 빗대어 들여다보는 형식을 제공했던 <인터스텔라>의 경우도 그렇다. 이들 영화에서 우리는 무언가 과학적인 면이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우리가 왜 현실을 살아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요청받는 것이다. <테넷>의 주인공이 자신의 현재 위치를 깨닫는 일이 영화의 마지막에 제시되었던 것도, 후퇴의 서사를 엔트로피의 감소로 여기지 않는 <덩케르크>의 이야기도, 웜홀을 건너는 과정에서 늙어버린 딸을 마주하는 <인터스텔라>의 결말도, 놀란은 항상 영화를 관객의 현실과 마찰시키려 든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영화적 시간은 관객의 삶 앞에서 멈춰 서기 때문이다. 이렇게 멈춰선 영화는 관객에게 영화가 자신의 삶을 대체하려 들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영화를 관찰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즉, 놀란의 영화는 관객의 입장을 침범하지 않으며 사유의 기회를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만 남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없는 악몽에서 벗어나 영화를 온전히 이전으로만 남길 수 있고, 반대로 영화는 현실 앞에 멈춰 서면서 스크린을 있는 그대로 기억으로 구획할 수 있다. 


놀란의 영화가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 사람들은 놀란의 영화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점이 오늘날 놀란의 지위를 만들어주었다. 놀란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가 영화에서 같은 걸 보지만, 그것을 다르게 겪기에 매우 많은 이야기가 탄생한다고들 말한다. 요약하자면 놀란의 영화는 마치 마술쇼처럼 그 과정과 원리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이다. 놀란의 영화는 어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결말을 향해 달리지만, 그 결말은 온전히 영화 앞에 멈춰 서며 현실을 침범하지 않는다. 적어도 놀란에게서 영화는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보편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놀란의 영화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타당한 진실이나 사실이 있는데, 영화는 이를 전제함으로써 영화 속 세계를 SF로 만든다. 여기서 SF란 과학이 등장한다는 게 아니라 공유에 그 요지가 있다. 히치콕이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것은 이제 세계의 몫이 된다. 관객만 폭탄이 터진다는 걸 아는 게 아니라, 영화 속 세계가 폭탄을 품고 있다. 마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들 세계는 법칙을 끌어안은 채 침몰한다. 이제 낯선 세계는 사라졌지만, 남겨진 자의 몫이 더 크다. 의도치 않게 살아남아 버린 우리에게 이들 세계는 어떻게 기억될까? 놀란의 영화는 현실과 양립할 수 없으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이 곧 우리 현실과의 경계가 된다. 놀란의 영화는 선을 넘지 않으며, 반대로 하나의 선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른바, 놀란의 영화에서 물리학은 현실에 제동을 걸어주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는 <인셉션>이나 <다크 나이트>처럼 영화의 모호한 결말을 생각하겠지만, 놀란의 영화가 이전과 이후를 확실히 구분 짓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오직 문턱을 넘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 그러니까, 굳이 구분하자면 놀란의 영화는 회복의 서사가 아니다. 놀란의 영화들은 처음 주어진 상황에서 더 좋아지지 않거나, 혹은 여전히 수미상관인 교착 상태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펜하이머>나 <메멘토>처럼 인물을 다루는 영화에서도, <인터스텔라>나 <덩케르크>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놀란의 영화는 출발 지점보다 더 나은 결말을 제공하지 않으며 결말은 항상 예측의 범위를 초과하지 않는다. 즉 놀란의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출발한 만큼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 그런 현실을 초과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한다. 그런 이유로, 영화와 현실의 무게가 같다면 당연히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 둘은 서로 동등하며 각자가 고유의 세계로 기능하는 SF일 뿐, 다른 한쪽을 잡아먹거나 잡아먹히지 않는다. 이른바 놀란의 영화에는 평등함이 잠재해있다. 놀란의 영화는 특정한 몇몇 소수에게만 마술적으로 다가서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보다 과학적이다. 앞서 판타지와 SF의 차이를 서술했던 대목을 떠올려보자. 물리학은 우주 전역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도 평등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모두를 차별 없이 대한다면 이보다 더 자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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