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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7. 2023

예지와 확산의 마술쇼


놀란에게 물리학은 어떤 의미일까? 놀란의 영화에서 물리학은 철학과 유사하거나 동등한 지위를 갖는 듯 보인다. 가령 물리학이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를 고찰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물리는 우리에게 세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피지컬(Physical)이라는 단어가 몸의 세부 요건을 뜻하듯, 물리학은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 혹은 그렇게 구성된 신체의 하모닉함을 다룬다. 우리 세계는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힘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리학을 통해 세계에 의해 존속되는 ‘나’를 깨우칠 수 있다. 신체는 단순한 철학적 추상이 아니라 기관들의 공조이며, 이에 대한 영향과 감응은 살갗이 까지거나 베어지는 등의 탈락을 통해서만 인지된다. 여기서 세계=신체라는 철학을 들먹일 마음은 없지만, 놀란은 철학을 대신해 물리학을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물리학은 원리가 작용하는 방식을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를 세계에 숨을 수 없게 해준다. 물리학의 발달이 인간 존재를 신에게서 벗어나게 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물리학은 인간을 세계에 내동댕이쳤다는 점에서 마치 하이데거식의 인간상과도 같다. 물리학은 세계에 대해 말하는 학문이지만, 정작 그러한 발화는 세계 자신에 의해서만 문제시되니 말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세계를 문제 삼기 때문에 이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도 그렇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를 문제 삼기 때문에 이 영화를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현실이 이렇다고 문제 삼지만, 대개 이러한 일은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자기 항변에 가까우며 영화 또한 그렇다. 영화에도 법칙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몸담는 건, 바로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이다. 놀란에게 물리학은 세계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런 세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원리를 보여줌으로써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말한 후, 이를 하나의 물리적 법칙으로 공식화하고 나면 남는 건 원리와 현상이다. 냉장고 밖으로 나오자 얼어버리는 콜라처럼, 때떄로 물리학은 마술처럼 보이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준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물리학은 자연의 학문이고, 자연에는 이를 구성하는 법칙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법칙은 누군가에 의해 세워진 게 아니라 항상 주어진 것으로만 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로 치면 프레임 밖에서 설정됐다. 놀란의 영화에서 물리학은 그 점에서 영화학의 일부라고 보아도 좋다. 물리학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바깥에서 윌 현실로 밀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마치 프레임의 바깥과도 같다. 이 ‘바깥’은 인간 존재가 벌거벗겨지는 기분을 느끼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어쩔 수 없게’ 한다. 


영화학은 우리를 영화에 숨을 수 없게 해준다. 영화를 배우는 일은 영화의 구성과 직조 방식을 깨우친다는 점에서 세계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킨다. 물론 정교하게 설계된 것을 알아봄에서 오는 기쁨이나 희열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영화는 더는 순수하지 않다. 영화가 막연한 단일체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이제 영화는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는 일을 의식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게 되고야 만다. 그 점에서 영화를 안다는 건 오히려 벌거벗겨지는 과정에 가깝다. 영화를 안다는 건 이 영화 밖으로 항상 밀려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에 소속되지 못함에 따른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즉,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선사한다. 놀란의 영화에서 물리학은 그런 역할인 것처럼 보인다. 놀란이 영화에서 물리학을 가져오는 방식은 항상 인물의 고독과 연결돼있다. <테넷>의 쓸쓸한 오프닝 장면을 떠올려보라. 모두가 선형적인 시간을 사는 동안 혼자만 시간을 역행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멈춰버린 시간에 머무르고야 마는 시네필의 감정과도 맞닿는다. ‘발견의 순간’이라 서술하는 이 감정은 사실상 경이의 순간이라기보다 “이제 부재하는 것을 회고하는 일”에 대한 슬픔에 가깝다. 


이른바 놀란의 영화에서 물리학은 그곳 세계가 우리와 같은 세계임을 말할 요령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곳과 이곳은 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세계는 아니다. 우리 세계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곳이라면 영화는 그러한 물리법칙이 ‘주어진 것’으로써 인물에게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하는 세계다. 가령 <테넷>의 물리학은 엔트로피계를 묘사한다. 에너지의 총량이 증가하지 않으며, 우주는 단지 꺼져갈 뿐이라는 이 법칙은 기본적으로 영화가 정해진 시간을 갖고서만 진행되는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마치 잘 짜인 마술쇼 같지만, 이런 마술쇼에는 러닝타임이 있으며 영화는 시시포스가 아니라서 언젠가는 지치고야 만다. 즉, <테넷>이 남긴 쓸쓸한 감정은 영화가 현실을 초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놀란은 현실을 두고서 일종의 ‘영화적 물리법칙’에 빗대는 걸까. 우리의 물리법칙이 빛의 속도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놀란은 현실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 걸까. 아마도 아니다. 놀란은 영화가 물리적 현실의 구원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놀란에게 영화는 물리학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매체인 것 같다. 현실에는 프레임이 없지만 영화는 프레임이 있으므로 팔레트 위에 염색된 세포 마냥 대상을 관찰하기에 수월하다는 것이다. 


놀란에게 물리학은 프레이밍이 아니며 또한 물리는 프레임이 아니다. 놀란에게 물리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절대불변의 법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단단함이 영화의 외피를 구성하고 있진 않다. 외피는 단단하지 않다. <메멘토>의 신체를 떠올려보자. 신체는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는 막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보고 듣고 만지거나, 몸에 흔적을 새기는 게 가능하기도 하다. <메멘토>는 자신의 몸을 하나의 매체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물리(학)적인 영화였다. 영화가 우리의 망막을 두들긴다면 <메멘토>에서는 신체가 두들김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우리의 머릿속을 반강제적으로 헤집어 놓듯이, <메멘토>에서 문신은 선택이라기보단 영화가 인물에게 강요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메멘토>를 보다 보면 우리는 그에게서 기억은 일종의 충격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저 산책을 나와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체화의 일종, 이는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며 떨어지면 죽는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만큼이나 우리 세계의 물리법칙이 몸에 체화되어있음을 말해준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발견과 증명의 연속이다. 무언가를 먼저 발견한 뒤에 이를 뒷받침할 이론을 세우기도 하고,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이론을 세운 후에 이를 실제로 관측하려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영화는 대상을 발견한 우리가 이를 합리화하는 과정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의존해서 항상 희망을 주는 것일까. 만약 물리학을 두고서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본다면, 영화에서는 예측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메멘토>처럼 이미 결말을 보여주고 시작하는 영화는 일반적으로라면 가장 마지막에 다다르는 결론을 선제시함으로써 ‘예측’의 지위를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예측은 서사적 미래가 아니라, 세계의 원리를 따라 현실을 규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모든 순간을 알고 이해한다면 영화는 우리에게 완전한 현실이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잡다하게 섞인 쇼트와 시퀀스가 아니라 기억에 변형을 가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인 변성의 면모였다. 영화를 한 편의 신체에 빗대는 이 이야기에서는 기억 또한 열을 가하거나, 냉동하거나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변성될 수 있다고 말하는 화법이 돋보였다. 


관용적으로 말하자면 물리학은 만고불변의 법칙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거스르거나 역행할 수 없는 듯하지만, 오히려 물리학이 세계의 바깥이 되어줄 때야말로 그 안에서 가능성은 더 확고해진다. 예측 자체가 가능성일 수도 있지만, 예측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인물에게 멈추지 않는 힘과 목표를 부여한다. 즉, 놀란이 물리학을 두고서 신체를 조리하는 기술 삼는 면은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인터스텔라> 같은 영회에서는 심지어 ‘항상 미래가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물리학의 ‘어쩔 수 없음’을 구원의 필연성으로 응용하기도 한다. 이런 영화에서 우리는 거울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하는데, 영화의 이러한 경험은 이 안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줌으로써 자신을 안전하게 드러낸다. 이와 유사하게 철학은 우리가 특정 세계에 몸담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입증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존재의 이유가 현상의 원리로써 물리학의 역할과 같다. 물리학의 관점은 경계와 표면을 한 자리에 둘 수 있으며, 이때 신체는 영화의 설정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러한 힘들에 의해 껴안아지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린 이를 숙명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자면, 물리학은 인간이 어디에도 숨을 수 없게 하며 이는 경계에 각인을 새긴다고 하면 뭔가 이상하지만, 신체를 더듬는다고 표현하면 그럴듯하다는 점으로도 이해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음의 두 가지 부류가 등장한다. 당당히 일어서거나, 아니면 몸을 웅크린 채 숨거나.


*


놀란의 영화를 두고 이어지는 설전은 크게 두 가지다. 상업성과 예술성이 그것이다. 누군가는 놀란의 영화가 상업적으로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말하면서 놀란의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크나이트>나 <인셉션>, <인터스텔라> 같은 흥행작을 거론하며 이런 영화의 후광에 다른 영화들이 묻어간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놀란의 영화는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고 말하면서, 놀란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온전히 마술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는 놀란의 영화가 “예술을 아는 힙스터”에 의해 소비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둘을 구분짓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지만 그럼에도 흥미가 돋는 부분이 있다: 이런 논란은 주로 봉준호나 스필버그처럼 기로에 서 있는 작가들에서 촉발되는데, 이때 그들의 영화는 항상 자신을 이루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봉준호에게 은폐되어 강해진 사회성이 있다면, 스필버그에겐 윤리적으로 소심한 소신이 있다. 이들은 영화가 말하려는 본뜻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 영화의 존재론 중 한 축을 담당한다. 


놀란의 영화도 이와 비슷하다. 놀란의 영화에는 분열과 융합이라는 두 개의 염기쌍이 있고 이들은 부모에서 자녀 세대로 갈수록, 각각 우성과 열성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격세유전된다. 이를 위해 나는 두 가지 발언을 참조해보고 싶다. 하나는 오진우가 <오펜하이머>를 두고서 놀란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마무리됐다고 지적했던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동진이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갈등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에 빗대었던 일이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오진우는 초기작 <인썸니아>와 <오펜하이머> 간에는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비교적 거대한 서사에서 벗어나 인물의 고뇌와 분열을 그렸다는 점인데 사실 이 둘 간에 유사점을 발견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놀란은 작품의 소재와 주제의식에서 별다른 규칙성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지적은 분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가령, <프레스티지>는 마술을 소재로 자아의 분열과 융합을 다뤘다. 이 영화는 휴 잭맨이 마술사로 분해, 테슬라의 전기장치를 통해 ‘나’를 두 개로 분열하는 모습을 다루는데 그는 이를 이용해 마술을 벌인다. 장치를 가동하고 나면 분열되는 ‘나’는 성공할 때 무대 위에 올라서지만, 실패할 땐 수조 안에 갇혀 사망한다. 문제는 장치를 가동하고 나면 눈을 뜨는 ‘나’가 과연 둘 중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둘 다 ‘나’이기에 그때의 마술사는 삶과 죽음 모두에 걸쳐있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마술사는 마치 양자역학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성질을 관측순간에 따라 고정하는 이중 슬릿을 통과하고 있다. 


마술의 가장 큰 법칙이면서 준수해야 할 규칙은 “돌려주는 것”이다.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으면 단순한 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술’이란 보는 이가 자발적으로 투자한 꿈을 더 크게 부풀려 돌려준다는 점에서,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를 요구한다. 영화도 비슷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환영이지만 관객이 이에 자발적으로 동조한다는 점에서 마술의 변종으로 분류된다. 영화를 마술 환등기에 빗대었던 일처럼 ‘마술’은 영화가 단순히 관객을 현혹하여 자빠트린다는 점을 반박하는 단어였다. 놀란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마술에 속한다. 놀란의 영화를 두고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이 텅 비었다고 말하는 이는, 그러한 “텅-비어있음”이 우리에게 꿈을 돌려준 결과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놀란은 분열과 융합을 그런 반환을 위한 단초 삼는다. 오늘날 핵분열과 융합이 결국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로 연구되는 것처럼 놀란에게 이들은 마술쇼의 원동력이 된다. 어떤 점에서는 관객에게 해석의 책임을 떠넘기거나 혹은 알고리즘을 방관한다고도 보이지만, 적어도 그 모습은 책임을 끌어안고 폭사하거나(<다크 나이트 라이즈>) 세계를 파멸시킬 부류의 보상 알고리즘(<테넷>)은 아닐 테다.


놀란의 대표작을 무작위로 나열해보자. 왜냐하면 양자역학은 확률의 학문이므로 필모그래피에서 확률을 뚫고 발견된 이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먼저, <프레스티지>는 은유적으로 보았을 때 핵(자아)분열과 핵(자아)융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영화다. 앤지어(휴 잭맨)는 끝내 경쟁자인 보든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오랜 분열에 마침표를 찍는다. 놀란의 다른 영화 <메멘토>는 기억상실증에 가로막힌 자아를 몸에 새김으로써 정신의 분열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끝내 그는 분열을 봉합하는 것에 성공하고, 영화는 다시금 하나의 결말로 융합(귀결)된다. <인셉션>은 누군가의 꿈에 진입해 분열된 자아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키는 게 목표인 영화다. 이를 위해 영화는 분열된 사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데, 이런 모습은 마치 타인의 꿈에 진입하려면 자신 또한 분열되어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인터스텔라>는 다중 차원에서 분열된 자신을 목격한 사내가 딸에 대한 마음과 사랑을 다시금 융합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과거의 분열이 사실은 미래의 융합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사후적으로 깨닫는 묘사가 나온다. <다크나이트>는 배트맨과 조커의 갈등을 다루며, 극한의 혼돈인 조커가 인간의 내면에는 분열이 자리한다고 말하는 일을 자신을 통해 임시로 봉합하는 정신분석학적인 내용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 배트맨은 ‘어둠의 기사’ 즉 필요악으로써 사회에 융합된다. <덩케르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세 개의 분열된 시간이 어떻게 하나의 공간에 융합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은 지정된 미래를 단순히 묘사하는 일에 그치지만 않고서 결론에는 어떠한 발견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테넷>은 엔트로피계를 묘사하며 시간의 두 가지 방향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발견을 통해 삶이 분열됨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시간역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발견을 통해 고정되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존재와 비존재라는 분열의 상태가 어떻게 영화적 시간에서 융합되는지를 그린다. 


이들 영화에서 분열과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단순한 지적이나 서술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열과 융합의 과정이 미치는 여파만큼은 선명하다. 이들 영화는 항상 분열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인물이 지닌 결핍이나 사건 등에서 촉발된 분열이 거대한 이야기로 나아가는 일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연극처럼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서 사건과 사건, 인물과 인물 같은 원자적 구조들의 접촉에 의해 불확실하게 확산된다. 이 무작위성은 관객이 발견한 순간에 의해 고정되며 이를 통해 분열은 불안정의 상태에서 안정상태로 이행한다. 이때의 발견이 영화가 제공하는 준비물이 아니라 관객의 관측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어쩌면 놀란 영화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놀란의 영화에서 은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변화가 촉발되는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인셉션>의 팽이에 관해, 혹은 <테넷>의 회전문에 관해, 개중에서도 분간하기 어려운 건 <메멘토>와 같은 교차 편집이겠지만 이런 관점은 <덩케르크>처럼 성공의 순간은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를 논하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단순히 정해진 결론에만 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는 일에서 하나의 규칙성을 찾아내려 든다는 것이다. 


이동진의 지적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의 흑백과 칼라는 스트로스의 의심과 진술, 이후의 사건에 대해 교차하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순간들 사이에 문턱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구분하는 연극무대의 장이 아니라 인식에 제동을 걺으로써 생각의 지점을 만들어준다. 여기서 놀란의 영화는 이야기를 응축하기보단 관객에게 돌려주고, 이러한 이행의 과정에서 벌어질 원자들 간의 접촉과 확산을 유도한다. 재미있는 건 놀란의 영화들이 이러한 확산을 영화에 잡아두는 법이다. 놀란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공통점은 그 결론이 어느 정도 예상되면서도, 그런 예상을 토대로 발견의 순간들이 집약되는 게 아니라 되려 흩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과정이 결말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되려 서사와 전개에 충격을 줌으로써 다시금 분열이 일어나고, 여기서는 다시금 융합으로 이어진다. 놀란의 문턱들이 무거운 원소, 인식의 지점을 걸고넘어진다면 결말 이후에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나머지 가벼운 원소들을 하나로 응집시킨다. 즉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사건은 줄곧 멀어짐으로써 영화에 힘을 주지만, 결론에 이르고 나면 이를 회전문 삼아 지나친 일들을 모아 단서로 재확인하는 일에서 힘을 얻는다. 


이러한 가정하에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처럼 보이면서, 몰락이나 성공 중 무엇을 다루는지에 구애받지 않는 일에 성공한다. 즉 이야기는 별도로 고정되지 않는다. 영화를 원자폭탄이 개발에 성공했기에 수소폭탄의 개발로 넘어가게 되는 일에 빗대어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동진의 관점은 스트로스의 이야기를 오펜하이머의 이후에 놓는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청문회를 통해 주변인물을 증인으로 소환하지만, 정작 그에게 반박의 기회는 주지 않는다. 일방적인 진술과 사실 적시에서 그는 그러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주변부에 있는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관객은 이런 기억들을 구름 삼아 영화 전체에 어떤 비를 뿌릴지, 혹은 심정 상의 기후적 변화를 재고해보게 된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변화의 순간은 몰라도 대략적인 시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원자폭탄을 실험하는 당일 비가 내리자, 자신이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에 따르면 대략 오전 5시 반쯤에 비가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는 무의미하게 확산되는 정보들을 현실로 고정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원자와 원자 사이가 끌어당김으로 인해 불투명하게, 실체를 갖듯 문턱은 사건을 현상으로써 현실 위에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서 벌어진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스트로스가 아니라 되려 오펜하이머 쪽에서 먼저 감지된 것 같다. 여기서 영화의 결말은 예지가 아니라 확산되었고,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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