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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8. 2023

영화의 형식 안에서 끝내 영화이기를 고수하기

<오펜하이머>(2023)


영화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접근해보고 싶다. 로스 앨러머스의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최초의 핵실험을 관측하는 장면에서 이들은 몇 단락의 주의사항을 공유한다. 첫 번째, 자외선 차단 안경을 착용할 것. 두 번째,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낙진에 대비할 것. 세 번째, 반사판에 폭발이 관측되고 난 후에 고개를 들 것. 이러한 주의사항은 자동차 안이나(유리에 자외선 차단 코팅이 되어 있다고 말하며) 관측소 안, 관측 타워나 바리케이드 뒤 등으로 분산되어 알려진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다양한 관측 위치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잇는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관측의 양상이 영화의 안팎을 가로지르면서, 그와 같은 ‘관측 위치’를 관측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이 장면에서 보호 안경은 마치 3D 영화를 볼 때 지급되는 장비처럼 보인다. 3D 영화는 이와 같은 장비를 통해 관객을 접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영화의 ‘생생함’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펜하이머>도 비슷하다. 핵폭발을 성공적이고 안전하게 관람하기 위해 지급되는 안경, 혹은 자동차 극장이나 영사기실 등을 연상케 하는 장소의 선정은 영화의 ‘스펙터클’에서 벗어나려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이때 누군가는 핵폭탄을 영화에 빗대면서, 히로시마의 계단 등에서 ‘영화’의 원소가 관측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큰 설득력을 지닌다. 오진우가 지적하듯 핵폭탄이 빛-무기라는 점을 고려할 때, 히로시마 계단 그림자는 관측 상태의 고정에 다름없으니 말이다.[1] 영화에 대한 윤리적인 관점을 소명해보자면 히로시마 계단에 남겨진 인간 형태의 그림자는 기본적으로 사진기의 인화 원리와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빛’을 통해 ‘순간’을 관측한다는 점에서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면, 핵폭탄이 빛-무기인 것은 영화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의 폭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스펙터클이라는 단어의 본뜻처럼 영화는 지도를 구획화하고 이를 토대로 범위를 초토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영화에서 원폭의 예정지로 15개 도시를 계획하고, 이를 지도에 그려내는 작업은 인간의 구획 능력이 지도의 실제 범위를 초과하는 일을 보여준다. 위의 논리를 따르자면 영화는 실제 현실이 그려놓은 것 위에서, 그러한 범위를 제멋대로 구획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 대한 몇몇 관점들에서는 영화가 현실을 초과하며, 이는 왜곡이나 방해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영화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거나, 또는 영화는 현실을 초과해서 우리의 미래에 닥칠 광경을 예견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작품이 다루는 매카시의 시대가 남긴 교훈처럼, 판단은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영화는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으며 현실에 진출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영화는 현실에 반응하지 않으며 붉은 것은 현실과의 충돌로 인한 폭발이 아니라 우리 눈에 비친 망막의 붉은빛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누가 공산주의자이며 빨갱이인가? 미래를 지레짐작하는 일은 오펜하이머가 우려했던 연쇄반응을 일으킬 테고, 이는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선취매개할 수 있다고 믿는 일에 다름없다. 즉,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은 영화가 처한 입장을 되풀이하는 듯 보인다.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오펜하이머를 다루는 방식은 그를 하나의 ‘핵폭탄’ 취급하는 것이다. 그는 오펜하이머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과학계를 다 태워 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다루는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간의 갈등은 영화의 초장에서 제시되어, 중반부에서 확장되고 연쇄적으로 반응하는데 결말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그들은 당신보다 더 큰 일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영화가 품는 세계와 보여주는 우주의 한계를 지적하는 듯하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은 오펜하이머를 품기에 너무 작은 나라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는데, 일련의 연쇄반응에도 오펜하이머의 애국관은 깨어지지 않는다. 즉, 오펜하이머는 영화의 형식 안에서 끝내 영화이기를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펜하이머>는 이런 부류의 매체론보다 유운성이 설명하는 반-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게 마땅해 보인다. 영화가 발명되었을 때, 몇몇 이들이 이에 보냈던 우려는 “이제 인류는 현실을 포착하고 재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신의 지위에 올랐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오펜하이머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빗대는 대목과 똑같다. 반하거나 (Anti-) 혹은 반하거나(Counter-). 오펜하이머는 국익에 반할지라도 진솔했고, 국가에 반대하면서도 자신을 고수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과 지인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겪지만 그럼에도 가족과 지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는 내내 오펜하이머의 정신세계를 고찰하면서 원자와 원자 사이의 공집합에 대해 말한다. 인간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이상한 공백이 그의 곁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끌림은 그가 핵확산에 보낸 우려만큼이나 걷잡을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연쇄작용이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태양과 핵분열, 프로메테우스의 서사로 출발하는 이 영화가 태양의 이미지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걸 염두에 두자. 첫 번째.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쳤으며, 태양은 자연 상태의 핵융합 반응이다. 오펜하이머는 태양에서 핵융합 반응을 훔쳤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청문회에 나가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여기서 태양은 붉은 심장처럼 보이기도 하며 영화는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의 붉은 심장에서 모든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두 번째.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붉은’ 오펜하이머는 트루먼과의 독대에서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다. 폭탄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떤 면에서 이는 붉음의 가치를 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애국이라는 틀 안에서 판가름 될 수 없으며 오펜하이머는 그저 애국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망의 세 번째는 이카로스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태양을 가까이하려다 날개를 잃고 추락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때 이카로스는 신에 대적하기보단 호기심 많은 청년의 이미지로 그려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카로스는 신에 반대했는가(Counter-), 아니면 신의 반대편에서 인간을 지지했는가(Anti-). 그는 둘 중 무엇도 아니다. 이카로스는 기술에 매혹되었을 뿐 아버지나 신과 같은 전후사정을 살핀 게 아니며 그저 실험 중에 죽은 것뿐이다. 오히려 이카로스가 남긴 건 추락의 형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영화의 부동화와 추상화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형상에서 우리는 끌어당기는 힘을 본다. 오펜하이머가 동료에게 양자역학에 대해 설명하듯, “이 세계는 텅 비어있지만 원자 간에 어떤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형상을 보고 듣고 느낀다. 또한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통과해 지나가지 못한다.”


놀란이 CG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배제하는 식으로 내부를 단결시키진 않는다. 즉, 놀란의 영화는 <인셉션>의 꿈 세계나 <인터스텔라>의 4차원 세계처럼 내부로 들어가는 일에 익숙할 뿐 무언가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기해볼 만한 점은 놀란이 과학을 지적하면서 정작 그에 대해 진술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마술사가 자기 복제에 성공하는 일이나 고중력으로 인해 시간이 느리게 가는 일, 또는 엔트로피의 역행으로 시간선을 추월하는 일은 확실히 논리적이지만. 영화적으로만 그렇다. 이들 영화는 과학적 법칙을 밖으로 밀어내진 않지만, 그럼에도 과학은 내러티브의 핵심을 통과해갈 뿐 그 이야기의 진상에 투과되진 않는다. <오펜하이머> 또한 핵심은 오펜하이머의 삶일 뿐 양자역학이나 핵물리학은 어떠한 현상에 관한 은유와 비유로만 사용된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추락의 과정을 서로와의 거리로 치환하고, 이를 상대방과의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영화와 전쟁의 관계에 대한 적확한 지적이 된다.


사실 이 영화는 형식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바꾸어 말해 그런 형식이 이분법에 동조하게끔 한다. 정-반-합의 관계는 영화 안에서 나치가 시작했고, 미국이 받아서 소련이 대응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나치가 빠지고 나면 미국과 소련만의 관계만 남기에 영화는 이 둘을 자유와 공산이라는 두 개 진영으로 남기는 듯 보인다. 실제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말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관계이며, 이는 곧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이어진다. 힘의 균형을 맞추려는 상황에서 더 큰 힘의 등장은 그에 상응하는 엔트로피를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끌림은 되려 서로와 손을 맞잡거나, 통과해갈 수 없게 하는 진정성을 갖기에 되려 힘의 경쟁을 불러오고야 만다. 그 점에서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층위는 오펜하이머가 우려했던 만큼이나 연쇄적이다. 폴 비릴리오의 빛-무기인 영화는 사진의 연장선에서, 폭발을 원리 삼아 작동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진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과학이 없고,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1] https://blog.naver.com/jinu_montage/22305782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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