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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6. 2023

세계관을 전제한 행복에 관해


웨스 엔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보며 세계관을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의미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이 세계는 세계관이라는 배경과 형식에 의해서만 지지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일단 이 영화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극중극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두 번째, 그런데 이런 의미가 촉발되는 것은 마을에 방문한 외계인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다. 외계인 사건으로 출입이 통제된 마을에서는 ‘행사’로 인해 모인 ‘여러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어울리게 된다. 즉, 이 마을은 일종의 다양체이자 모순이며 또한 콜라주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의미에 관해 묻는 건 사실상 이들 간의 배치 자체를 의미화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의미란 마을이라는 장소 자체이고, 영화적으로 볼 때 이는 ‘영화’라는 프레이밍의 작업 자체가 하나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영화는 장소와 분리해 바라볼 수 없고, 이러한 불가분성이 자체적으로 ‘의미’의 특성을 띤다. 특히나 이는 영화에서 미술 구성과 카메라 프레이밍에 공을 들이곤 하는 웨스 엔더슨에게서 발견되는 ‘배치’의 형상 자체가 영화적 미학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령 2D [슈퍼마리오]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횡스크롤형 운영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프레이밍이 곧 장소의 형태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불가분성이 있다. 또한 그렇기에 이들 프레이밍은 우리가 ‘포착’이라 부르는 영화적 기능을 대체하는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그런 ‘영화적 기능’들의 연쇄만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냐는 점이다. 


영화적인 것을 한데 모아두면 영화가 되는 걸까? 웨스 엔더슨의 영화에서 본질적으로 던져보아야 할 물음이 그렇다. <애스터>는 외계인을 하나의 화두로 던지는데, 이는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가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화두는 그 자체로 어떠한 의미를 갖지는 않으나 영화는 분명 이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정확하게는, 이러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특정한 분자구조를 형성하려 한다. 어떤 면에서는 로즈버드나 와인병 같은 부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의미가 달라붙기 위해 형식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세계는 어떠한 관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방향성을 갖고 한곳에 모이므로, ‘세계에 관함’은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 엔더슨의 영화는 사건과 운동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풀이될 수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면 그냥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넘기면 된다. 지향은 의식을 창출하므로 세계에 관함은 우리가 무슨 세계를 살아가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물론 웨스 엔더슨의 이 작업이 ‘영화적인 것’과 ‘조우’를 한 자리에 둔다는 점에서 굉장히 게으른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다. 누군가는 “영화는 순수하게 스크린 안에서만 승부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자면 ‘’다큐멘터리’란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때는 그러한 재현에 ‘관한다’는 의식이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사건이 되는 현실은 영화가 우리의 현실을 만든다는 점에서 ‘조우’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요컨대 영화 자체가 사건이 되는 일은 그 자신을 세계 삼는다는 점에서 세계관과 공존할 수 없다. 영화 자체가 사건일 뿐이라면 그런 사건에 관할뿐인 현실은 분자 구조를 모방하면서 이곳에 어떠한 의미를 끌어들이려 한다. 세계관은 어떠한 세계를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떠한 세계를 이미 전제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의미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여기엔 단지 무언가에 관할뿐인 인식만이 있고 영화를 보는 이들에겐 자신이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세계에 관함’이 무언가 그럴싸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건 그 때문이다. 세계관은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는 일과도 같다. 여기에 의미는 사건에 후천적으로 달라붙고, 그러므로 무언가를 ‘보았다’는 맥락에서의 ‘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가 있을지언정 그러한 장르가 없다는 말은, 이곳에서 “영화가 있을 뿐 영화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모토는 웨스 엔더슨에게서 “모든 인생이 영화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삶은 영화다.”라는 수준의 인식으로 발현되었다. 각자의 삶에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어쩌면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들 마을에 벌어진 ‘사건’은 말 그대로 영화가 현실 세계에서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마을에 사건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마을을 배치의 구조 삼는 일은 영화를 본다는 일을 하나의 조우, ‘사건’으로 설명하면서 불특정다수의 관객들을 이 마을의 주민에 빗대고 있다. 이들 세계=의미는 세계관=배치에 의해 지지받아 운영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객을 배치의 구조에 포섭함으로써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고 보는 일은, 확실히 낭만적이다. 관객 참여적 영화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영화는 순수하게 영화 내로만 승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서 이런 일은 그리 탐탁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프레임을 초과하게 되면 그건 더는 영화가 아니게 된다. 넘쳐버린 이야기는 영화를 현실에서의 사건으로 만들고, 사건이 된 영화는 여러 다양한 것들 것 불러 모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을 그곳에 살아가게 하진 못한다. 세계관에 의해서만 지지받는 세계란, 그 모든 것을 의미로 만드는 듯하나 실상은 그 무엇도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이른바 ‘세계에 관함’이란 세계에 소속될 수 없을 만큼 넘쳐버려서 바깥에 줄을 서는 중인 것과도 같다. 의미가 초과한다고 해서 그런 의미가 관객에게 전달된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냥 바닥에 흘러넘칠 뿐이다. 쉽게 말해 형식은 의미를 가두어 놓을 수 없고 또 그렇기에 형식은 개별자로서의 관객을 양산하지도 못한다. 물론 이는 단지 웨스 엔더슨의 영화에만 던져질 비판은 아니다. 잘 생각하면 오늘날 세계관이라는 말은 가상이라는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가령 우리가 멀티버스와 같은 프렌차이즈 용어를 떠올릴 때, 어떤 영화들에게선 캐릭터의 고유 서사보다 이들이 공존하는 배치의 구조를 먼저 내세우는 일이 목격되곤 한다. 아마도 제작자는 관객에게 그런 구조에 대해 먼저 말해주어야만 자신이 전달할 ‘사건’이 보다 매력적이게 된다고 여겼을 듯하다. 그런데 관객들이 과연 이곳에 자발적으로 감금되기를 원할까? 


웨스 엔더슨의 <애스터>는 마을 주민들이 감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점에서,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을 갖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 같은 감독은 그러한 감금의 원인을 현실 사회에서 찾았고, 이는 관객 스스로가 그러한 제약을 감금으로 여기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어줬다. 오즈의 영화는 전후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단어 사이에 있었고 이를 따라 영화는 ‘사이’에 출몰하는 사건이 됐다. 이는 우리가 영화를 두고서 어떠한 출몰로 여기는 게 아니라 영화가 우리 세계의 주민임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이를 따라 영화는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객체로 이해되었으며, 영화는 그 자체로 어떠한 기능이 아니라 그저 삶의 특정 순간들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애스터>는 마치 자신을 하나의 기관처럼 보이게 하려 애쓴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삶이 충만해질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발견’되게 하는 힘이 있고, 이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나’는 이들 사건에서만 비로소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 충만함의 감정은 오히려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세계관에만 전적으로 의존한다. 관객은 어떠한 결론에 이르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을 위로받고 싶어한다.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관할 때 우리는 늘 어떠한 것들의 사이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즉, ‘문제’는 도착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배경에만 불과하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관객에게서 문제 해결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그 결과, 여기에는 그 어떤 사건도 문제로써 인식되지 않고서 자신을 문제 삼는 일에서 멀어져 버리는 부유의 행복감만이 남는다. 어쩌면 이는 자신에게 어떠한 책임을 물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영화에 의미가 있다고 볼 경우, 자신의 삶을 영화에 빗대는 일은 자연스레 의미의 추구가 되기 마련이다. 즉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프레임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세계관이라는 배경을 통해서 해결하려 드는 일은 영화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자신의 삶에서 배경을 끌어당기는 일로 연결되곤 한다. 그리고 이따금 이런 인력은 충만함으로 오인된다. ‘나’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존재하면서 사이를 통해 연결된다고 보는 이 관점은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끌어당기는 힘을 위해 영영 마주할 수 없는 두 배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악질이다. ‘나’와 ‘너’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서로에게 가해지는 ‘취향’에 대한 이야기가 이런 부류다. 취향을 존중한다는 말은 서로를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인정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공존한다는 기묘함을 자아낸다. 어떠한 결론을 내는 게 어려울 수는 있지만 이런 일이 지금을 위로받는 것으로만 소모된다면 우리는 결코 감금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웨스 엔더슨의 이런 작법은 개인에게 발견과 연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막연하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세계에 반발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어떤 면에서 초전도체와 같은 응용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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