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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1. 2023

표면장력을 따라 우리를 드러낼 뿐

<물안에서>(2023)


홍상수의 <물안에서>는 세간의 표현으로 실패작이다. 여태까지 잘 만들다가 망한 영화 한 편이 나왔다는 뜻이 아니다. 홍상수의 실험에서 늘 교훈을 얻어갔던 이들조차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늘 외부와의 묘한 긴장 상태를 유지해왔던 홍상수의 후기작에서는 홍상수 본인이 영화 관람에 가장 중요했고 또 해석의 주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의 비관적인 면을 홍상수 개인의 비관으로 바라보거나(<풀잎들>, <강변호텔>), 바라보고 구성하는 주체(<소설가의 영화>, <탑>)의 문제로 바라보곤 했다. 이는 소위 작가적 영화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걸 프레이밍 하는 것에 유용하게 사용됐다. “홍상수의 눈으로 봐.”라고 말하면서 가져가는 프레이밍의 기법은 이것이 극장의 맥락이 아니라 화이트큐브의 ‘드러냄’으로 이해하게끔 해주었다. <물안에서>는 그러한 드러냄 밖으로 나가버린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마주하기엔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다. 


김병규가 액체적 영화라는 용어로 영화적 시간의 틈입성을 제거했을 때 여기에는 관객의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영화로의 이입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식을 따라 자신의 시간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기억이 액체라면, 액체적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에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서 기억의 구획을 실패하게 하며 여기서 기억은 마땅한 형체를 갖지 않는다. 이를 따라 시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고, 관객의 자리는 부재하는 게 아니라 지정되지 않게 되었을 뿐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산보자의 시간이 다시금 돌아왔다고나 할까. 이 산보는 이곳이 액체적 세계라는 점에서 육지에 발을 내딛게 하지 못한다. 대신 깊은 현실성을 대신해 하늘로 높게 날아오르는 부유의 시간, 허물어진 시간의 경계를 따라가는 비상이 새로 등장한다. 이상의 『날개』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중력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사방면으로 작용하기에 마치 무중력처럼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홍상수의 후기작은 적어도 베란다 바깥에 등장한 무언가가 닥쳐왔을 때부터 이미 ‘검은’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었다. 영화 안에 등장하는 ‘바깥’의 암시는 직접적인 묘사 없이도 관객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알린다. 이것은 하나의 쇼일 뿐이며, 이 쇼는 우리가 아니라 저쪽에서도 관측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이들 영화는 극무대가 아니라 원형으로 둘러싸인 쇼윈도에 가깝다. 혹은 동선을 따라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전시관에 가까운데. 영화는 분명 특정한 순서를 따라 재생되지만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여러 동선이 탄생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전시관-어항을 공유하지만 그 관람의 양상은 전적으로 자유였다. 이처럼 홍상수의 영화는 극장보다 미술관에 더 어울렸고, 단지 신비주의에 묶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이른바, 어디를 먼저 볼 것인지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가령 홍상수의 후기 영화에서 주로 지목되는 주체의 시간이 죽음의 가련함과 연결되는 대목이 그러한데, 일반적으로 이는 한정된 자원에 관한 문제로 이해되곤 하지만 인물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는 구조화하거나 분기를 나누는 일이 무색해진 홍상수의 영화에서 구도나 시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특정한 방향이 있지 않으며 되려 경계를 허무는 구도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영화의 외관을 두고 실험하는 대목은 지나갔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소설가의 영화>나 <인트로덕션>처럼 삶이 영화, 또는 영화가 삶이 되는 것처럼 어느 하나를 점유하지 않는 무중력의 지대이며 이는 <극장전>과 같은 전기의 실험과는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홍상수의 영화엔 중력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실패나 죽음 또한 없다. 만약 죽음이라는 말이 기억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면 이제 인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기억되면서 죽음을 극복한다.  


홍상수에게도 시간은 유한하지만 여기서 죽음은 그러한 시간의 종결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홍상수에게 죽음은 만연하고 흐트러져 더는 분간될 수 없는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아닌 게 아니라 이는 관객의 배치를 가정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홍상수는 자신의 후기 영화들에서 이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가정하면서 그런 물음에 동참하도록 영화의 동선을 설계했다. 여기서 ‘후기’라는 말은 포스트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영화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모하는 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의 후기는 비교나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표면화의 맥락에서의 최전선이다. 그 어떤 것도 이후로 지나갈 수 없음을 고려하면 홍상수의 영화에는 그런 맥락에서의 기억은 없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이 홍상수의 영화는 표면장력을 따라 우리를 드러내고 있을 뿐, 그 내용상에서는 항상 물 안에 잠겨있고 또 여기서는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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