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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8. 2023

무성영화는 영화적으로 흥미롭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무성영화는 영화적으로 흥미롭다.” 미야케 쇼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답변이다. 그는 농인의 대화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간자막(intertitle)을 택했고 영화에서 이는 케이코(키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대변한다. 케이코가 비수어 화자와 대화하는 방식인 필담이 스크린 전체에 확대되는 양식이 바로 간자막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위의 인터뷰에서는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이는 무성영화가 영화의 어떤 성질이나 분파 중에서 관심을 갖고 들여다볼 만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케이코의 세계를 무성영화로 그려내는 이 방식은, 한편으로 케이코의 세계가 영화적으로 흥미롭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한다. 케이코(무성영화)는 영화적으로 흥미로워서 그걸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서로 다른 영어, 한국어, 일본어 제목을 연상케 하면서도, 어찌되었든간에 영화 자체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한다. 그건 바로 무성이 하나의 성질로 이해돼야 하는지다.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증표는 영화가 제시하는 판데믹 상황이다. 첫 번째로, 판데믹 시기를 다루지 않는 예술계의 몇몇 풍토를 떠올려볼 수 있다. 판데믹 시기의 매체들은 판데믹이 끝난 후를 염두에 두면서, 그때 작품이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판데믹 상황을 작품 안에서 배제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판데믹이 단순한 재난이나 사건이 아니라 범지구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전지구에 영향을 끼친 판데믹은 이것이 행성적 크기의 재난이었기에, 바꾸어 말하면 지질시대의 일부였기에 구태여 묘사하지 않아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즉 판데믹을 묘사하는 일에서 ‘바깥’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 경우 매체가 판데믹을 배제하는 것은 판데믹 시기를 숨기는 게 아니라 판데믹을 일종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현실의 반대항으로써의 ‘영화적’인 것이 작동하는 모습이 바로 비-판데믹 상황이었던 셈이다. 같은 이유로 매체에서 판데믹을 묘사하는 일은 특수한데, 여기서 판데믹은 동시대성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논리얼리티를 판가름하는 증표가 된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너의 눈>에서 판데믹은 허구적이다. 허구성을 드러낸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을 근간에 뒀다는 이 영화는 ‘각색’이라는 표현으로 그 자신의 허구성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때 ‘허구적’이라는 말은 이것이 ‘근간을 둔’ 각색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동시대성을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즉 허구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우리가 아는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또는 격리되어서 서로 마주할 일이 없기에 흥미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에서 흥미를 찾는 일은 그것이 현실을 재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과 마주 볼 일이 없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무성영화도 그렇다. 무성영화가 영화적으로 흥미롭다면 그 이유는 모든 영화가 무성영화의 변주여서가 아니라, ‘무성’이라는 대목이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다. 노이즈캔슬링 기술의 유행은 인간을 잠시 현실에서 ‘격리’한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부분은 더더욱 잘 이해된다: ‘무성’은 대상을 격리하면서도 현실의 바깥으로 추방했다. 


판데믹은 행성시대의 전유물이라는 점에서 현실을 넘어선 현실이고 또한 그런 의미에서의 근간이다. 그 말인즉 영화에서 판데믹을 묘사하는 일은 기후변화를 영화가 의식하는 일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기에 영화의 매체적인 성질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50년이 지나 이 영화를 돌아볼 때 영화 속의 2021이라는 숫자와 마스크 착용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숫자는 그저 숫자고 마스크는 그냥 마스크에만 불과할 뿐 영화 관람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는 않는다. 되려 이때의 마스크는 케이코로 하여금 입 모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체육관이나 집처럼 케이코에게 ‘친밀함’을 제공하는 공간을 확인받는 외적 증표로만 이해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스크는 그저 상징이나 기호로만 풀이될 뿐, 영화가 어떠한 동시대성을 들여온다거나 하는 일로 이해되진 않을 테다. 그래서 영화에서 판데믹이 바깥이 없다고 말하는 일은 영화에서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것처럼, 그 자체로 영화의 배경인 ‘바깥’이 되어준다. 


이런 의미에서 무성영화를 일종의 거리두기와 격리로 이해하는 일은 영화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영화를 어떠한 바깥으로 여기는 일에 도움을 준다. 영화가 케이코의 필담을 스크린 전체로 확장할 때 케이코는 잠시나마 프레임 바깥으로 추방되며, 이는 잠시나마 케이코가 허구가 아닐 수 있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케이코를 무성영화로 간주하는 일은, 영화적 세계에서 케이코를 추방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현실을 바깥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위의 “무성영화는 영화적으로 흥미롭다”는 말은 발화의 측면에서 케이코를 무성영화에 빗대지 않고, 케이코 자신의 세계를 독립화하지 않으며, 세계를 무대 삼아 그 위에 케이코를 올릴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된다. 케이코가 링 위에 오를 때만 비로소 자신을 마주 보듯 영화는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을 세계에서 격리,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케이코에게 링이 지배적인 현실로써 기능한다고 말하는 일도 가능하다. 필담이 무성영화로 확장되는 방식은 케이코의 무성이 링 위에서 신체의 리듬으로 변환되는 일과 마찬가지다.


<너의 눈>에서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이 판데믹으로 인한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그와 동시에 케이코의 꿈도 접히는 일은 거리두기의 종말을 보여준다. 가령 권투에서 거리감각의 중요성을 떠올려보자. 권투는 팔을 뻗은 만큼 공격의 범주가 되기에 거리감각을 잘 익혀두어야 하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무언가에 맞서 싸울 의지를 잃으면 권투를 할 수 없다.”는 말은 바라보는 일의 좌절, 앞을 보며 시야를 확보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거리를 두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면역계의 붕괴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바깥’은 내부로 침투해 신체의 항상성을 무너뜨리며, 이제 주체에게 링은 바로 서는 무대가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리는 공간이 되고야 만다. 이는 마치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스크린에 들여오면서 자기만의 장소를 잃어버린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본래 바깥에 존재했던 소리는 이제 유성영화의 시대에 들어서며 경계를 넘나들고, 소리는 영화가 범지구적인 현상으로 확장되는 것에 일조했다. 그렇게 보면 케이코가 샌드백을 때리던 건 그 진동이 무성영화가 전달하지 못하는 부류여서였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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