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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2. 2024

으스스하고 기이한 시간 운동

<괴인>(2023)


씨네21의 김소미는 <괴인>을 두고서 이런 표현을 쓴다. “제목처럼 괴이한 리듬으로 인생의 막막한 한 국면에 몰린 남자를 지켜보는 이 영화는,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순간들로부터 나와 타인의 서늘한 이면을 비집고 들어간다.” 많은 경우 동시대성의 맥락으로 파악되는 이 영화에서 어딘지 모를 ‘차가움’을 느꼈다면, 이는 우리가 그만큼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일까. 맥락이 곧바로 닿지는 않으나 <남한산성>에 대한 이동진의 논평을 언급해보고 싶다. 이동진은 <남한산성>에 관해 자신이 좋아하는 ‘차가운’ 영화라고 말하며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성질이라고 말한다. 이는 특히 ‘패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비교될 수 있는 <서울의 봄>이 비교적 뜨거운 편에 속함을 고려할 때, 시대의식의 두 가지 방향성을 보여준다: ‘패배’라는 의식 자체가 뜨겁거나 차가운 성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뜨겁고 차가운 것에는 인물의 방향성만이 평가요인으로 자리할 뿐이다. 


‘뜨겁다’라고 말하는 쪽이 <국제시장>처럼 인물의 활력을 응용한다면, ‘차갑다’라고 말해지는 쪽은 대개 주변환경에 영향받는다. <남한산성>의 경우 선비들이 토론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서로 간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무게감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갑다’라는 인상을 준다. 화친과 적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돌이켜보게 하는 이들 간의 논쟁은 오늘날이라 해서 별반 다를 바 없으며 이를 따라 <남한산성>의 감정은 관객과 거리감을 두지 못한다-이들 영화에서 감정은 ‘한반도’라는 신체에서 비롯되기에 이야기되는 장소는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에 우선한다. 몇몇 정치적 알레고리를 제하더라도, <남한산성>은 한 시대를 가두어 바라보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항명시킨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관객인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을 대하는 문제이기에 이들 영화는 차가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최대한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가짐 탓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거울을 보는 일, ‘몸’에서 멀어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 맥락에서 김소미의 <괴인>에 대한 평인 ‘나와 타인의 서늘한 이면’은 영화가 갖는 차가운 태도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자신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몸에 관한 의식과도 같다. 이른바, <괴인>의 이런 감각들은 관객이 영화 속의 공간들에 있지만 반대로 인물에 이입될 수는 없는 유령의 처지에서 귀인한다. 감독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엔 벽이 있고, 그 벽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 (…) 그 벽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공포감을 영화로 풀어내보고 싶었다"라고 보면, 영화가 풍기는 기이함은 ‘아무리 이입하려 해도 이입할 수 없는, 어딘지 모르게 벽이 느껴지는 주인공의 모습’ 때문일 테다. 이때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기홍은 그 자체로 ‘시대와의 균열을 빚어냄으로써 동시대인이 된다는’ 하나의 설정처럼 보인다. 


이정홍 감독은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이 불가능의 영역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었다.”라는 창작의도를 밝혔다. 여기서 기홍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대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상대방에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이를 기이하다고 볼 수 있다면, 불균질의 지점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잡음으로 작용하는 ‘괴인’이다. 다시 말해서 기홍은 관객을 동시대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이상한 사람’이고, 또 ‘균열의 지점’이다. 이는 씨네21과의 인터뷰와도 이어지는 대목으로, 감독은 기홍에 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기홍은 자신이 불편해지면 멀리 도망가고 상황을 피하려 한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쉬운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에 필연적인 공백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불균질하고 불가능하면서 균열로서 작용하는 공백은 기홍에게 ‘자기를 들여다보는 감각’을 부여하면서 그 자신을 ‘바깥’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텅-빔은 비어있음의 감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백은 경계를 따로 설정하지 않거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해체의 성질을 갖는다. 누구로 규정되지 않으면서 어떤 시대 의식으로도 연결되지 않는 <괴인>의 화법은 그런 점에서 차갑다. 발화에 우선하는 신체, 모든 이미지와 소리에 앞서 무겁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한산성>의 논쟁 장면은 말과 행동이 어긋나있는 기홍의 모습에도 잘 어울린다. 이미지와 소리에 어울리는 일은 흐름을 따라가므로, 이런 일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에 속한 기홍은 영화 내에서 가장 고유한 것-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영화의 초반에 가게 공사를 끝내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대상을 정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벽 뒤에 숨어 훔쳐보는 듯한 인상이 있는데 여기서 ‘소리’는 화면을 초과해 들어온다. 부유하는 소리가 화면을 넘어 프레임 틀 밖에 유출될 때 영화는 역설적으로 스크린의 신체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김소미가 다시금 지적하듯, “우리가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혹은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마다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파장”이 영화 내에서 반복해서 등장할 때 소리는 불현듯 화면 밖에서 침투하는 듯 보인다. “미세하게 모두가 서로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연루자라는 감각”은 마크 피셔가 ‘운명’을 정의할 때 ‘으스스하면서 기이한 것’으로 지칭했던 대목을 연상케 한다. 모두가 서로에게 으스스하고 기이하게 느껴지는 상황은 다소 ‘기묘하다’고 볼법한 게 되어, 화면을 오가며 두들기는 인물들에 관해 바깥의 공간을 줄곧 환기한다. 이는 곧 ‘어디서’라는 물음으로 이어지면서 변화와 우연들을 통제해야 하는 실험형식으로서의 영화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여기서 강조하자면 실험영화가 아니라 실험의 형식이다. 오진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계보학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계보가 눈에 띄지 않는” 영화다. 하얀 섬광이 화면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는 명실상부 스크린의 원류, 하얀 화면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얀 화면을 죽음에 빗대는 오진우의 의견을 따라가면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공식을 곱씹게 된다. 만약 스크린이 뇌라면, 화면을 가득 채운 죽음은 영화의 쇼트가 표면에 올려져 기억에 위계를 두지 않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멈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랭 레네의 뇌에 관한 기념비적 영화 <사랑해, 사랑해>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인물은, 기억의 모든 층위를 횡단하지만 그 끝에는 항상 기기가 작동했던 하얀 화면의 순간이 있다. 마치 드로리안의 시간 이동이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하듯, 영화가 자신을 뇌로 소개할 때 우리는 과거의 순간들을 선택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이들을 같은 평면에 나열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영화가 아닌 우리 자신이 입체화되는 일을 가리킨다. 영화가 기억을 누출하는 방식은 이처럼 전방이 아니라 후방으로, 비가역적이 아니라 가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점에서 빗겨나는 카메라는 ‘목격’이 아니라 무언가를 마주할 뿐이다.  


화면 전체에 펼쳐지는 섬광을 영화가 도착한 곳으로 보는 일은, 바꾸어 말해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보는 것과도 같다. 이는 영화 안의 것들을 밖으로 누출시키기보다 내부에 머물도록 하며 이때 <괴인>에서 시대성을 발견하는 일은 거진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와도 같다. 시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감금을 택한 <괴인>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는 객관적 현실론을 충실히 이행한다. 영화를 밀고 나가면 현실이 되는 게 아니라 영화는 현실을 밀어낼 수 없다고 보는 이 입장에서 영화는 무엇이든 간에 ‘초과’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괴인>은 죽음 이후를 탐구하기보다 계속해서 표면에 돌아오는 방식으로, 마치 <사랑해, 사랑해>의 시간이동처럼 으스스하고 기이한 시간 운동을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기홍의 ‘츤데레’ 같은 면을 밀고 당김이라는 주름의 반복 운동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을 결정짓는 게 망각이라면, 관계들 사이에서만 피어나는 기억도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가령 <괴인>에서 인상 깊게 등장하는 건 다름 아닌 돌이다. 세 사람이 이상하게 균형 잡힌 돌덩어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후 등산을 간 주인공이 돌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한 자리에 병치하면 으스스하고 기이한 돌덩어리 위에 올라 영화 전체를 앙각으로 내려다보는 관객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홍이 아슬아슬하게 놓인 돌을 바라보자 영화는 기홍을 그런 돌 위에 올려보내는데, 이런 위치 짓기는 아피찻퐁의 몇몇 영화들에서 상공에 떠오르는 검은 구체를 연상케 한다. 그저 시선만이 아니라 영화적인 기호와 의견 또한 통행하는 이 연출은 돌이 주는 차가움에 매료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는 수평보다 수직으로 이어지면서 낙하와 추락의 이미지를 전제하지만 떨어지는 것은 기홍이 아니다. 신체가 굳건히 자리 잡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은 타인을 내려다보다 실수로 놓친 스마트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은 화면을 망가트림과 함께 작은 순간은 일상의 큰 화면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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