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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0. 2024

인물에게는 전날로, 관객에게는 꿈으로

<너와 나>(2023)


<너와 나>에서 특징적으로 볼만한 건 희뿌연 질감의 화면이 아닐까 싶다. 영화 전체가 누군가의 꿈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제작의도에서 이런 필터가 의도하는 점은 자명하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 일상적 일이 누군가의 꿈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에서는, 희뿌연 필터가 영화 전체를 하나의 꿈처럼 보이도록 의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말 그대로 “<너와 나>는 시간순으로 흘러가지 않고 어떤 부분이 꿈이고 현실인지, 꿈이라면 세미의 꿈인지 하은의 꿈인지 모호하게 연출됐다.” 이는 하은의 사망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현실의 어떤 사건을 기반에 뒀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이는 즉, 영화가 암시하는 결정이 ‘최종적’이라는 점에서 꿈을 꾸는 쪽은 아무쪼록 살아있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세미가 하은을 찾아가는 일은, 감독의 말처럼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채집하여 만들어졌고 이런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꿈’은 세미의 것이라는 대목에 무게가 실린다. 세미가 꿈속에서 하은을 만났다고 말하면서 그게 하은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정확히 뒤집은 것이다. 세미가 꿈을 꾼 건,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꿈속에서야 마지막으로 만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 영화에서 꿈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 이미지에 관한 최종 판본을 가리키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만약 이 영화가 하나의 꿈처럼 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라면,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꿈을 꾸는 존재로서 생존자의 입장에 선다. 순서를 따로 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영화는 항상 관객에게 최종판본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쉽게 말해 영화가 선보이는 뿌연 질감은 영화가 자신을 하나의 꿈으로 소개하는 방식, 혹은 관객을 두고서 생존자로 지정하는 방식이다. 관객은 항상 영화의 바깥에 서며, 세월호 사건을 구성하는 주된 감각 또한 그런 사건의 ‘바깥’에 선다는 점이었다. 자본주의의 세기에 생존의 감각은 ‘살아남았다!’라기보다 ‘오늘도 살아남고야 말았다’는 자책에 더 가깝고, 이는 <오징어 게임> 같은 데스 게임의 형식에 대중이 얼마나 호응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뿌연 질감은 이 안에 든 게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생존’이라기보다는 ‘잔존’의 감각에 가까운 것 같다.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게임에서 두 사람 간에 벌어지는 싸움이 눈물을 쏟아낼 때, 생존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는 희뿌연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는 처절한 싸움 끝에 살아남아 버렸고 아마도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말하는 이미지의 잔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맥락을 따른다는 점에서 앞서 소개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부류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두고서 ‘지옥에서 돌아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사진들은 초점이 완전히 나가 있어서 촬영 대상이나 목적이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오늘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세월호 사건에서도 현장에서 채집된 생존자의 영상 중에서는 바닷물에 잠겨 화면이 반쯤 나가버린 게 다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감각에 공명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이상의 뿌연 화면들에서는 감정적인 면을 제외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했던 현장의 바깥에 선다는 점에서 “감정의 바깥에 선다”는 비평의 원칙을 연상케 하며 여기서 영화는 관객을 경험하는 세계의 최전선으로 밀어낸다. 빗대자면 이들 영화는 물질이 기억을 초과한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모든 세계에서도 결국 육신이 바로 이곳에 멀쩡히 있다는 점은, 그 어떤 세계에서도 관객이 최종판본으로서 ‘잔류’하는 원인이 된다. 이른바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나’가 그쪽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설화를 재현하는 것과도 같다. 


애도의 형식이 아니라 잔존의 감각으로 바라본 <너와 나>를 생각해보고 싶다. 변해빈이 지적하듯, 영화가 계속해서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머물렀음’과 ‘존재함’이라는 이미지의 지표성을 물질성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다. 사과의 갈변이 시간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사과를 공수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는 감독의 진술은 영화가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인 죽음에서 멀어지려는 일이 일종의 강박증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가령 영화사의 흔적들에 관해 말하는 <바빌론>에서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스크린의 물질성은 배우들의 영혼을 사로잡기에 영화는 항상 시간의 최전선에 선다고. 이 영화에서 배우는 어떠한 표면의 이전에 사로잡힌 존재로서 종말의 감각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런 감각은 감독이 <너와 나>를 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수학여행’과 ‘제주도’라는 키워드가 영화가 줄곧 선보이는 오브제와 결합할 때 이것이 세월호 사건을 가리키게 됨은 쉬이 예측 가능하다. 중요한 건 그러한 예측 가능성이 감정을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는 점이고, 오히려 밀려나는 것은 관객이 된다는 점에 있다. 잔존의 감각으로 바라본 <너와 나>는 애도의 감정을 갖고서 작업하지만, 이런 감정을 영화의 바깥으로 끌고 나가지는 않는 듯 보인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감정의 청산 작업으로 빗대었고, 그게 불가능해서 단지 치환되기만 할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건 아니나, 영화가 뿌연 필터와 지표성을 통해 획득한 게 ‘바깥’과 ‘잔존’의 감각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싶다. <너와 나>를 두고서 한국독립영화의 추악한 경향(김병규)으로 설명하든, 퀴어 서비스와 유년기의 부정청탁(변해빈)으로 바라보든, 이것이 결벽적으로 관객을 밀어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화를 다르게 바라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죽은 이를 탐구하는 대목에서 <너와 나>는 영화의 안과 밖으로 갈라선다. 영화에서는 두 소녀가 서로를 향해 사진기를 들지만 어떤 경우는 성공하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장면에 해볼 법한 상상 중 하나는 “자신이 기억되는 순간에 대한 결정”이다. 영화가 계속해서 전날로 돌아가려 하는 이상 카메라가 갖는 포착의 기능은, 항상 사물에 대한 판단 중지를 요구하면서 ‘찰칵’이라는 효과음을 시공간에서의 절단으로 이해하게끔 한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에서 카메라가 ‘본다’는 것이기에 영화에서 배우들의 역할은 ‘듣는다’라는 취지로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카메라는 벽이라던가 하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넘어갈 수 없지만, ‘듣는다’라는 것은 스크린을 넘어서도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영화 속의 세계, 디제시스에 사로잡혀있지 않다. 쉽게 말해 듣는다는 것의 역할은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고 무언가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감정’을 서술하는 일에서는 대사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보다 그걸 듣는 쪽에서 항상 최종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너와 나>가 갖는 눈물의 속성은 <오징어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제작의도에서 감독은 “<너와 나>는 내게 ‘좀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현장이었다.”라고 구술하는데, 폴 발레리의 문구를 연상케 하는 이 구술에서 무언가에 대한 판단은 오히려 ‘삶을 이탈한 형태’로 규정됨을 알 수 있다. 즉, 살아보고 싶다는 쪽으로 무브먼트가 생겨나는 것은 오히려 세계를 하나로 정의해 떠나보내는 것, “감정의 바깥”에 서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흥미롭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잠정적인 은퇴작이었던 <바람이 분다>(2013)의 마지막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로 점프하는 과정에서 ‘살아야겠다’라는 독백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문문으로 바꾼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쪽으로 바뀐 모습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에게 바깥을 바라보는 쪽보다 바깥에 ‘선다’는 쪽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준다. 같은 원리에서 <너와 나>는 이미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 속의 이야기가 영화 속의 인물에게는 전날로, 관객에게는 꿈처럼 여겨지게 하면서 이 둘 사이의 경계에 ‘듣는다’라는 감각을 사용한다.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변해갈수록 영화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나오는 일은, 그들을 듣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사랑해’를 반복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리가 횡단의 한 형식이라는 걸 고려하면 “원래는 하은이 버스에 앉아서 혼자 우는 신에서 라디오 방송이 나올 계획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암시하는 대사를 넣었다.”는 일화조차도 눈여겨보게 된다. 


많은 경우 지적되었던 거울의 오브제적 속성은 카메라와 반대된다. 카메라가 같은 자리에 있지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면, 거울은 같은 자리에서만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도구다. 일단 거울을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하고, 여기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기 몸의 물성을 의식하게 된다. 즉, 거울을 보는 일은 얼굴을 보는 일 말고도 자기를 의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카메라와 동일한 역할을 한다. 거울과 카메라는 둘 다 신체를 최전선에 밀어낸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카메라는 단지 기록된다는 점에서만 ‘바깥’의 체계를 획득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일은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작 영화가 일상에서 특권화되는 방식은 그 자신의 물성을 통해서다. ‘일상’이 물리적인 현실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루틴화되었기에 별 다른 인식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영화는 영화를 보는 환경이나 과정 자체를 하나의 물성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비일상성을 끌어낸다. 그런 점에서도 <너와 나>는 현실의 부스러기로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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