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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1. 2024

영화가 가리지 못한 어둠들에 대한 이야기

<노 베어스>(2022)

Art poster by natsumi chikayasu


넷플릭스의 지원으로 제작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영화가 막 공개되었을 때 벌어졌던 논란은 ‘극장’을 거치지 않은 작품을 두고서 ‘영화’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영화를 OTT나 VOD 같은 2차 시장에 유통하기 위해서는 극장에 몇 주 이상 상영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를 따르자면 넷플릭스로 공개된 <로마>는 ‘영화’로 인정될 수 없었다. <로마>는 극장에 걸린 적이 없거나 혹은 그 일수가 모자랐고, 기성 영화제와 언론은 이 점을 근거로 <로마>에 상을 수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며 넷플릭스 측을 공격했다. <로마>를 둘러싼 이 논쟁은 영화 매체의 조건이 단순히 영상이라는 점에 불과하지 않고서 ‘극장’이라는 장소와 긴밀히 연결됨을 보여준 사례다. 마치 작가의 조건이 등단이라고 보는 암묵적 합의처럼, ‘영화’란 ‘극장’에 걸려야만 비로소 [영화]가 된 것이며 감독 또한 그렇다. 입봉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작품이 극장에 내걸리는 것, 상영관 수가 어떻든 간에 특정한 관 수 이상에서 상영 일수를 적절히 확보해야만 비로소 감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노 베어스>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것이 영화 촬영 현장이라는 사실은 지속되는 롱테이크 안에서 카메라가 프레임 밖으로 후진해 나올 때 비로소 밝혀진다. 이때 원근감은 이를 바라보는 쪽이 뒤로 물러서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평면을 있는 그대로 보면 프레임이 내부로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트북의 가장자리를 두고서 나뉘는 두 세계는 영화 매체가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은 프레임이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한계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감독은 원격으로 지시를 내리는 일이 ‘현장성’이 없어 사소한 부정교합을 겪노라고 토로하는데, 뒤로 가면 아예 통신이 끊겨버리고야 말며 아예 마을 사람과는 소통 자체가 통하지 않기도 한다. 감독이 자신은 무언가를 특정하여 ‘찍지 않았다’고 말할 때, 마을 사람은 “당신이 실제로 찍었든 찍지 않았든 간에, 중요한 건 대상이 현장에 존재했다는 것이고 카메라가 주위를 맴돌았다는 것”이라는 취지로 답한다. 여기서 카메라의 역할은 포착 자체보다 포착 자체에 중점이 있으며 이는 다시금 영화의 시작점에서 ‘컷’ 소리와 함께 분절되어 온 영화 속 세계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컷’은 세계를 분절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존재 조건이 된다. 형식상으로 볼 때 감독이 ‘컷’을 지시하는 장면은 끝을 마무리해서 극장을 나오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하는 장면이 곧 영화의 ‘바깥’을 지시하는 게 될 때 이곳엔 진정으로 [영화]가 펼쳐지며 이때 관객은 그런 영화의 주변을 맴도는 것, 혹은 그런 사람이 된다. 즉, <노 베어스>는 프레임보다 주변부를 살아가는 것보다 남겨진 것에 더 중점을 두는 영화다. 김지운의 <반칙왕>처럼 레슬러의 삶이 링 안에서만 존재한다면 여기서 링 안의 격투에 현실을 덧씌우는 건 어디까지나 관객인 우리의 몫이다. 이른바,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에 이야기하기를 실천한다는 게 바로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흔히 영화의 기능을 두고서 대상을 포착해 이곳에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어쩌면 영화는 우리의 삶에 적절한 인상을 남겨야만, 적정한 과반수 의석과 의무상영 기간을 거쳐야만 다시 보기 될 수 있는 VOD의 형태로 가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기억에 남을 때, 그곳에 디테일은 뭉개지고 아스라한 인상만이 남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재현이나 논리도 무의미해진다. <노 베어스>의 마을 청년처럼, 이따금 삶의 다른 연상들로 외도해 눈이 맞아버리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실재와 허구가 아닌 ‘실제’와 ‘허락’인 것이다.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젊은 연인의 모습을 포착하거나 포착하는 일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이 발생해서 여기에 이야기가 달라붙는 과정이다. 생각해보면 영화 내내 어떠한 목적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의심받는 감독은 마을의 유일한 외부인이기에 의심받지만, 반대로 유일한 외부인이기에 그러한 형식상 바깥에 설 수 있기도 하다. 내부인에게 관습이 열렬한 구속으로 다가오는 반면 외부인인 그에게 관습은 그저 해달라고 할 때 해주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편한 해결책이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단지 프레임의 안팎으로만 판가름날 뿐인 영화 속 풍경들에 세속과 대속을 요구하고, 이를 토대로 어떠한 증명을 요구하는 영화적 시선에 대한 한 가지 우화인 것처럼 보인다. 김소희는 <노 베어스>의 영화적 시선에 관해 “카메라를 통한 연결을 말하기 위해 직조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감독이 원격으로라도 현장에 다가서려 했던 일은 영화의 마지막에 죽은 커플을 모른 척해야 했던 일로 연결된다. 감독이 마을을 촬영하려 왔을 때, 카메라에 담긴 게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점은 어떠한 카메라의 기능적 행위라기보다 이를 조율해서 이야기로 가공하려는 감독의 개인적 의사 표현에만 의존할 뿐이다. 반대로 그가 내내 얾메였던 이 관습들에서 멀어지기를 택했기에 이것이 영화로만 남을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것은 자체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으며, 극장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여기는 일은 단순한 프레이밍의 구도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일이 전진이 아닌 후진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일이다. 이를테면 블랙박스를 제보받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항상 그 안에 담긴 사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시청자도 으레 그렇듯 이 안에 벌어질 사건을 기대하며 자연스레 ‘그들’과는 거리를 두려 한다. 저런 현실에 공감하기보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정동에서 카메라는 현실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블랙박스가 어떠한 사건을 포착하는 방식처럼 느껴지는 이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이다. 블랙박스는 CCTV와 별반 다르지 않게 그저 영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인 장치지만,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 때 그 안의 영상들에게선 특별한 가치가 생겨난다. 사건이 여기에 있었고, 현실에는 남아있지만 이곳엔 흔적이 있음을 말해주는 게 블랙박스의 역할이라면 블랙박스란 사실 전적으로 현실의 인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블랙박스가 어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여기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관객에게 ‘현실’은 어떠한 이야기가 된다는 소리다. 


블랙박스는 단순히 어둠과 프레임만으로 우리의 현실에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또는, 이야기를 갖고 살아가도록 해줬다. 그렇다면 블랙박스와 화이트룸, 「밝은 방」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노 베어스>에서 “곰이 없다”라는 말의 속뜻은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곰이 있으니 동료를 구해 함께 가라”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구’와 연결되는지가 아니라 ‘누구’로 연결되는가 일 수도 있다. 영화의 카메라가 감독의 대변인이라고 본다면 이런 입장은 더욱 심화된다. “사건은 카메라로부터 시작된다.” 허욱은 디지털 매체의 재귀성을 두고서 ‘내포한 것’에 대해 서술하면서 우연성은 재귀성이고, 그런 점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의 속뜻은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자동차와 긴밀히 연결된 카메라의 운동성은 단순히 운송수단으로서의 카메라가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것들에서 끝을 발견하는 일을 가리킨다. 물론 그 둘은 반대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재귀의 시작점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건이 카메라에서 시작된다면 그 시작점은 끝을 내포하기에, ‘컷’ 소리와 함께 마무리되는 것은 결국 뒤로 밀려나며 현장에서 멀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누가 우선순위를 갖는지에 따라 이야기하기의 방식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즈의 카메라가 180도 규칙을 위반하는 일은 일종의 반칙에 해당하는데, 왜냐하면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뒤로 후퇴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메라를 운송수단으로 바라보는 일에서는 방향이 아니라 누구에서 시작되는지가 중요하다. 오즈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방식에서 돌아오는 순서를 관객에게 암시했다. 즉, 시작된다는 건 출발선에 선다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멀어짐으로써 자신을 바라본다는 뜻에 더 가깝다. 그렇게 해야만 이곳에서는 목격담이 성립하고 또 블랙박스가 생겨날 수 있다. 영화에서 ‘연기’는 무언가를 표출(Acting)하는 게 아니라 결정을 연기(Postpone)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VOD로 해금된 비간의 <카일리 블루스>가 결국 카일리로 돌아온다면, <노 베어스>에서 소문은 마을 곳곳을 누비며 관객이 볼 수 없는 나머지 구역, 마을 사람이 “왜 감독님은 골방에 틀어박혀 계세요?”라고 말하는 일들에서 미끄러지게끔 해준다. 그가 국경을 넘지 못한 것은 마을을 떠나는 일에서 그러한 이탈은 명백한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는 ‘끝’을 위해서만 성립하는 설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도입부는 감독이 어떤 마을에 방문해왔음을 롱테이크로 드러냄으로써 이곳에 특정한 무대를 설정해두는 듯한 인상이 있다. 블랙박스란 단순한 보존이기 전에 연결을 지속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같은 현실이라도 개인이 존재하는 플랫폼에 따라 현상의 분해와 이미지로의 재구축은 서로 다른 언어로 코딩될 수 있다. 영화를 두고서 극장을 나서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보는 몇몇 의견에서 우리는 영화가 제공하는 ‘바깥’에 대한 열망을 읽을 수 있다. 가령 롤랑 바르트가 남긴 에세이 「영화관을 나오면서」처럼 극장의 어둠에 중점을 두는 일은 근래의 한국에서 <1984>나 <서울의 봄> 같은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것에 어느 정도 설명을 제공한다. ‘영화’란 『어둠에서 벗어나기』(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자 동시에 <언어와의 작별>이니 말이다. 롱테이크가 최대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시도라고 보기보다는 극장을 나서는 듯한 상황에서 이런 롱테이크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들에서 진실 찾기에 매몰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덧씌우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계로 인해 영화는 그 근간에서 ‘미래’와 ‘바깥’을 향하는 매체가 된다. 결국 <노 베어스>는 영화가 가리지 못한 어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무언가를 끝내는 것이기보다 끝나는 자신을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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