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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1. 2024

‘평면’으로써 호출되는 기억들

<카일리 블루스>(2015)


비간의 영화들에서 감상은 대개 롱테이크를 중심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인상’이라는 게 가장 도드라지는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지적은 그리 이상할 게 없다. 심지어는 영화에 대한 비평이 롱테이크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앞서 ‘영화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지구 최후의 밤>과 <카일리 블루스> 두 영화에 대한 지적이므로 이런 주장은 언젠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롱테이크에 대한 지적이 힘을 잃을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혹은 롱테이크가 사라진 자리에서 바라보는 <카일리 블루스>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자문하고 싶다. 우선 롱테이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굳이 횡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카일리 블루스>의 롱테이크는 그 심상에서 크게 두 갈래, 물속에 가라앉은 신발과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에 의존하는데 전자가 ‘자살하는 사람은 신발을 벗는다’라는 추상이라면 후자는 소위 ‘설국’으로 에둘러 묘사되는 꿈의 세계이다. 그런데 롱테이크란 모든 영화적 파악에 앞서 있으며, 따라서 이를 ‘영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화’가 파악의 대상이라면 그런 파악에 앞서 있는 롱테이크를 영화 일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명한 첫 문장처럼 터널을 뚫고 나와 어떠한 장소에 도착할 때, 열차와 연결된 플랫폼은 운송수단으로서 관객을 특정 지점으로 운반하는 효과가 있다. 쉽게 말해 열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이곳’과 ‘저곳’으로 양쪽을 구분하기보다는 같은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옮기는 방식, 혹은 관객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비간의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어떠한 입구나 출구로 기능하기보다는 귀향의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며 이를 따라 제안하고 싶은 것은 영화에서 터널이 갖는 의미만큼이나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위는 그 자신을 공백으로 삼아 영화 외부를 불러들이는 것, “신체가 앞서 나갈 때 그 안에는 무엇을 담을지”의 문제의식으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영화가 대상을 끌어안을 때 화두로 남는 건 끌어안긴 쪽이 아니라 미끄러진 나머지이니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간의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말하는 일은 타당하다. 로드무비가 어떠한 목적성을 갖고서 길을 떠나는 장르라면 분명 <카일리>를 로드무비로 볼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이 두 인상 모두가 영화의 시작과 끝에 걸쳐 두 번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묘사는 영화를 내용상으로 구분하기보다 보는 이에게 구분점을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 시작과 끝을 한 쌍으로 엮음으로써 이야기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작’이나 ‘끝’이 스크린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고 이때 스크린을 초과한 영화들은 경계를 넘어 영화와 현실의 영토를 허무는 효과가 있다. 즉, <카일리 블루스>는 형식상으로 보면 시작과 끝이 영화 안에 모두 자리하기에 꿈이나 상상의 여지를 관객의 몫으로 남기는 부류가 아니다. 가령 페드로 코스타는 노동자 ‘벤투라’를 두고서 작업한 연작들에서 카메라를 목격이나 재현의 수단으로 사유하기보다는 공간에 고유한 시간들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자신이 통과해온 시간들의 마지막에서 폐허로 풀려나는 데, 어찌 보면 이는 터널을 나와 마주하는 설국을 연상케 한다. 어떠한 심상이나 풍경을 전한다는 게 아니라 카메라는 줄곧 움직이겠지만 어쨌거나 이곳의 시공간, 그 무대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카메라는 결국 무빙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미지’를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영화 안에서 수시로 변경되는 ‘탈것’들에 대한 묘사로 이어져, 종국에는 카메라 자체가 탈것이 된다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탈것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운송수단으로서의 영화”라는 개념을 제시해보고 싶다. 영화가 이미 재현된 세계를 갖고 있고 이를 관객에게 서서히 풀어놓을 뿐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 경우 영화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비밀을 조금씩 풀어놓으면서 관객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운송수단으로서의 영화는 세계의 외연과 마주해있으며 나아가는 만큼 족족 영토가 확장된다. 쉽게 말해, 영화가 늘상 관객의 신체를 초과한다면 연극에서 관객의 신체는 최전선에만 자리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오히려 영화가 평면화되어버렸기에, 즉 ‘양각’도 ‘음각’도 될 수 없기에 불가능해진다. <카일리>에서의 카일리는 인물이 안기지도 못하지만 부여잡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세계 안에서 배제된다. 카메라는 공간을 소유할 수도 없고 정박할 수도 없으며 무언가를 부여잡으려는 시도는 항상 미끄러지고야 만다. 말하자면 카일리는 영화가 아닌 관객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외부로서 맞닿은 이상한 월경지다. 이때의 영화는 바깥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세계 신체에 해당하며 카메라의 전진은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의 행진이 된다. 


영화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과 이입하는 것 사이에서 오는 불일치로 인해 멀미를 유발한다면 무대의 형식에서 관객은 행위자가 된다. 운송수단으로서의 영화, 세계 신체로서의 관객은 이 영화에서 고향인 카일리로 돌아간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오히려 롱테이크를 제한 나머지만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관객이 카메라에 탑승해있다면 카메라와 관객의 속도가 일치할 것이고 바꾸어 말하자면 관객이 보지 못하는 만큼이나 영화도 이곳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롱테이크 자체가 아니라 롱테이크를 제외한 나머지를 사유하기 위해 제시된 게 아닐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비평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카메라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 세계를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부여잡는다’는 쪽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가 현실의 인상들로 작업한다고 가정한다면 영화는 분명 인상에 따라 결정된 ‘관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롱테이크는 최대한 현실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로서 현실의 인상이 아닌 현실-인상의 연장선으로 작업하는 게 된다. 즉, 롱테이크가 추구하는 건 관념의 바로 전 단계 혹은 분화의 지점으로서의 인상이다. 


롱테이크란 현실에 ‘닿거나’ 혹은 ‘돌아온다’라는 귀환의 서사를 갖는다는 점에서 신화적이고 또 운명적인 것 같다. 특히 롱테이크는 시간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시간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따라 롱테이크는 주로 사건의 최전선에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는 곳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사건을 출발시키는 게 아니라 모든 사건에 아프리오리로 자리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발견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남겨진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이야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카메라가 무언가를 본다는 건, 바꾸어 말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신체에서라면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항상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을 부여잡는 문제는 곧 무언가를 응시하고, 마주하고, 견뎌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표정의 선험성을 지시한다. 얼굴이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을 지닌 표면이 될 수 있는 건 우리가 자연스레 대상에서 입체를 발견하고, 또 마찰을 일으키고자 시선을 두기 때문이다. 롱테이크의 이러한 속성이 비간의 영화를 무언가 ‘영웅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러한 관점에서 롱테이크를 바라보는 일이 어떤 점에서는 ‘재귀성’으로, ‘예지’와 ‘이해’의 구도로 파악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싶다. 


허욱은 『재귀성과 우연성』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재귀란 (…) 정지 상태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호출함을 의미한다. 정지 상태란 미리 정해진 실행 가능한 목표거나 아니면 계산 불가능함의 증명, 둘 중 하나이다.” [1]재귀는 알고리즘의 처음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수미상관의 일종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데중요한 것은 그러한 재귀는 그 실행에서부터 이미 시작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전개는 전적으로 인식의 범주 안에서만 속함을 증명한다는 점이다마침 비간의 두 영화에 등장하는 당구는 칸트와 흄이 즐겼던 스포츠이기도 하다당구의 핵심은 하나의 평면을 두고서 공이 나아갈 곳을 예지하고 또 그러한 정지의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다여기서 당구대는 사유가 부딪히는 일에 적절한 바깥으로 기능한다아마도 <카일리>의 롱테이크는 그런 점에서 바깥으로 기능한다롱테이크를 밀고 나가면 마치 정지 상태처럼 보인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를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정지에 가까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으로 본다면롱테이크란 세상과의 연결을 긍정하거나 혹은 이미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영역은 있기 마련임을 증명한다영화가 도입부에서 제시된 금강경처럼영화는 어떠한 시제에서 자신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을 의식하는 일에 더 중점을 둔다.


불교에서의 화두를 떠올려보자. 화두는 이해에 언어가 앞서 등장하는 형태로써 늘 최전선에 자리하는 관객의 신체, 혹은 현상으로서의 카메라를 연상케 한다. 화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작용하며, 이는 영화가 묘사하는 것과 카메라가 바라보는 것이 꼭 어떠한 이해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일리에 대해 말하려면 마주했던 기억들을 떠올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인상들로 작업한 영화들을 두고서 밖으로 나서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신체가 항상 세계의 최전선에 있다면 매번 지나치는 것들에서 자신에 가까운 몇몇 것들을 구하는 일이 바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일 뿐, 롱테이크에서 초과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비평을 발명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자기에로 귀결되는 일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항상 첫 작품인 <돼지가 빠진 날>로 돌아오는 것처럼 어떠한 폭발에서 점점 확장되어 가는 형태를 하는 우주는 그 기원에서 이후를 사유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묘사하자면, 평면을 길게 늘어뜨린 형태를 한 이 시퀀스에서 우리는 어떠한 기억이 평면화되기보다는 그런 ‘평면’으로써 호출되는 기억들에 관해 묻게 된다.


[1]허욱, 『재귀성과 우연성』,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23)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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