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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1. 2024

폭발의 순간이 삶을 끊어놓지 않는다는 것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사랑은 낙엽을 타고>을 보며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대피소였다. 삶에 폭격이 진행 중일 때 우리가 항상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바로 영화가 대피소이기 때문이라는 것. 판데믹 기간에 우리가 마주했던 ‘극장’은 밀려버린 신작들의 사이에서 과거의 영화들을 재소환해냈고, 이를 따라 우리가 보지 못했던 몇몇 과거를 이곳에 대피시킬 수 있었다. 즉, 질병의 폭격에서 극장은 되려 영화를 대피시키는 방공호와도 같았다.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에서 씨네 21의 김병규 평론가가 던진 “영화는 대피소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건대, <사랑>은 분명 동시대성이 짙은 영화다. 우선 지친 삶을 살아가는 두 인물에게서 공통분모로 극장이 등장하는 일이 그렇다. 영화관 데이트를 하는 두 커플에게서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하는 일은, 마치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서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영화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모든 인간에겐 단 하나의 삶만이 주어지지만 영화는 그런 와중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다른 한편 전쟁의 한복판에서 떠올리는 영화는 삶의 폭격 속에서 이를 견뎌내는 방공호이기도 하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티비조차 레거시 미디어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영화를 과거의 한 풍경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마치 페촐트의 <트랜짓>처럼 내부와 외부를 허무는 듯 보이는데 이런 경우라면 <사랑>은 좁혀질 수 없는 것을 두고서 발돋움하는 영화였을 것이다. 인간에겐 좁혀질 수 없는 것이 있고, 이해받을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되려 우리가 서로에 다가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고. 바꾸어 말하자면, 이들 영화에서 ‘착오’와 ‘간극’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엔 그를 잘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를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사랑>의 두 연인이 극장을 통해 서로와 연결된다면, 이때 극장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일 테다. 즉, 영화가 대피소가 된다면 그 이유는 영화가 우리의 삶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다시금 현실에 돌려보내기 때문일 테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삶의 어떤 면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러한 연상작용은 우리가 영화에서 자신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 삶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설사 영화를 보며 현실을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영화가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해하는” 일일 뿐이다. 즉 영화가 거울상을 반영한다는 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 ‘내부’를 숨긴다는 뜻에서다. 거울은 보는 사람을 돌려주기만 할 뿐 그 자신의 얼굴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여기엔 단지 표면만이 있다. 영화엔 내부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극장’은 우리 현실의 한 내부가 될 수 없다. 극장은 현실 세계가 지닌 얼굴(표면)들의 한 가지 판본이고 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극장은 영화가 내비치는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이에서 놓인 얼굴과도 같다. 전쟁 이야기가 들려오는 영화의 배경은, 이곳을 관객이 살아가는 현실처럼 보이게 하지만 오히려 이들 영화에 내부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사랑>은 채플린의 몸짓처럼 미끄러지는 영화가 된다.


<사랑>의 마지막 장면은 채플린의 영화들에서 자주 목격되는 떠돌이의 쓸쓸한 최후를 연상케 한다. 많은 경우, 채플린의 영화에서 뒷모습은 인물이 지닌 익명의 속성이 유지됨을 보여주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도시와 영화가 갖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도시의 발달과 극장이 갖는 상관관계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갖는 익명성이 어떻게 군중의 발걸음을 일시적으로 잡아끄는지, 그리고 그 안의 객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한다. 바라보기의 형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영화는 영화 속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가장 간편한 설명이 된다. 마치 영화처럼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어떠한 삶을 읽어내기보다 영화를 통해 삶을 이끌어가는 한 가지 공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이른바 영화는 대피소가 될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서로의 무표정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두 사람은 헌신적이지 않으며, 실제로 서로가 깊은 사랑에 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엔 오히려 영화가 현실을 구할 수 없다면, 망가트릴 수도 없다는 점에서 희망의 한 징조가 있다. 


판데믹 시기에 극장은 분명 사람 사이를 밀집하는 곳이었음에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는 점에서 서로에 거리감을 두는 곳이었다. 판데믹은 접촉과 접속을 나누어 바라보게 해주었고, 같은 곳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줬다. 판데믹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사랑>은 도시가 한 가지 얼굴만을 갖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령 코아르의 이상용 평론가는 플랫폼을 접촉과 접속이 이루어지는 공통지대로 분류하며, 공유와 연결로서의 영화에 대해 말한다. 그 말인즉, OTT 플랫폼에서 영화는 단지 접속되기만 할 뿐 서로와의 상호접촉을 이루어내지 않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연결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플랫폼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산책하는 신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추락의 양상은 삶을 찢어놓는 포탄이나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 사이에 자리하는 운동성의 특수함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추락은 단지 미끄러짐에 하한선이 없다는 점에서 무하한을 가리킬 뿐이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가 자본주의 사회의 우스꽝스러운 일면을 재현하는 일을 지적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유튜브 쇼츠와 같은 표면들에서 우리는 의식을 빼앗기고, 반대로 신체를 미끄러트리며 시간을 매끄럽게 한다. 극도로 제한된 마찰계수는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할 여러 갈등과 혐오들에서 멀어지게끔 하고, 이는 우리가 쇼츠를 비판하면서도 그런 시간을 길게 늘어트리는 이유가 됐다. 그렇다면 서로를 ‘쇼츠’하게 마주하면서도 그 안에서 ‘영화’를 찾아내는 일은 더는 불가능한 걸까. 영화와 극장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사유하는 일은 이들 관계에서 비접촉과 냉소, 개인주의를 발굴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지만, 그게 설사 깨어질 꿈이라 하더라도 이 모든 일에서 현실을 살아갈 용기가 된다. 즉 영화는 관객이 자신을 속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용기의 속성엔 다양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주어진 시간 동안을 이겨낸다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타인의 얼굴을 붙잡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 간에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부지불식 간에 벌어질 수 있을 우발적 사고를 예방한다. 극장을 방문하는 일은 삶을 부여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것이기보다 삶의 표면을 타고 미끄러지는 일에 가깝다. 이를 따르자면 용기는 도망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추락을 종용하는 좀비의 신체에서 정신의 부유를 발견하는 일은 표면을 미끄러지는 일이 어쩌면 산책의 일종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준다. 이렇게 서로에게 흘러들어온 두 사람은 영화를 보며 서로를 붙잡는다. 연애를 한다는 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서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일이며, 기실 결혼은 서로의 재산과 삶을 공통의 것으로 만드는 제도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법령에서 부부는 ‘너’와 ‘나’도 아닌 ‘부부’로 규정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러한 맥락에서 극장을 생각하면 극장은 추락의 반동이 어떻게 상대방을 향한 손짓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나 비접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말이다. 


때때로 영화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 말하고 싶게끔 한다. 그리고 접촉과 접속의 차이는 어떤 면에서 세계와 세상의 차이이기도 하다. 세계라는 말이 유리돔에 반사되어 온 우리의 입장에서 바깥을 가리킨다면, 반대로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과 보아야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전자가 공간에 관한다면 후자는 시간에 더 뉘앙스를 두는 표현이고, 영화가 극장을 벗어날 때 여기엔 다시금 수천 세계가 탄생한다. 이윽고 영화가 내보이는 시간에서 ‘어긋남’보다 ‘대체’를, ‘폭발’보다는 ‘장전’을 발견하고 나면 그 전쟁의 한복판에서 무성영화는 삶을 침묵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 앞에 멈춰서는 짧은 순간 동안 무성영화로 변모하는 세계는 전쟁 같은 삶 속에서 대피소로 기능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기능일 것이다. 이른바 폭발의 순간이 삶을 끊어놓지 않는다는 것, “과거를 대체하고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영화관을 드나드는 일에서 극장이 갖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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