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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0. 2024

과잉 노출과 결핍 노출



한국에서 독립영화는 뭘까? 정확하게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다양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지만, 문화의 측면으로 보면 SAS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SAS는 Stand Alone System의 약자로, 외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 가동하여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뜻한다. SAS는 다른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외부에 변수가 작용하더라도 큰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노트북에 셀룰러 네트워크 통신이 적용되면 이 장치는 운용 네트워크에서 외부와 격리되어있고, 또한 기기 자체를 독립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SA가 된다. 집 안에 인터넷이나 전기가 끊기더라도, 이 노트북은 비축된 전력과 자체 통신이 있으므로 운용이 가능하며 이는 해당 기기를 거주 지역이나 건물 등의 네트워크 환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뜻한다. 로컬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되려 자신이 로컬이 되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SA 시스템이 자신을 외부화하는 방식에 있다. 많은 경우 SA는 물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소위 ‘인트라넷’이라 불리는 지역성을 구축하지만, 반대로 통신사의 네트워크에 직결되는 방식처럼 “공용을 거치지 않고 환경으로부터 곧바로 연결되기에 역설적으로 ‘자기’를 특정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즉, SA는 독립되어 있기에 무언가 특정한 좌표값을 지닐 것만 같지만 반대로 ‘로컬’과는 거리가 있기에 로컬에 속하지는 않는다. 


셀룰러 네트워크 디바이스는 통상적인 모뎀이 아니라 통신사의 공용 네트워크를 통해 웹에 접속한다. 셀룰러 네트워크란 전파로 연결된 기지국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네트워크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접속’은 다중적이고 또 동시다발적이어서 이용자의 현재 위치를 특정하는 일은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 발생하게 된다. 셀룰러 네트워크 안에서 위치 추적은 대상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기지국이 있는지에 따라, 즉 얼마나 동시다발적으로 연결되어있는지에 따라서 그 특정이 정교해진다. 그러니까 GPS가 전지구적으로 전파를 수신한다는 점에서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면, 셀룰러 네트워크의 경우 기지국등의 셀 단위로 운용되기 때문에 주거지역에 영향받으며 말하자면 전자가 전지구적인 환경과 연결된다면 후자는 도시의 익명성이 어떻게 개인을 드러내는지와 긴밀히 연결된다. 즉 GPS가 지구돔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점을 말해준다면, 셀룰러 네트워크란 우리가 최대한 많은 것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을 제공한다. GPS가 지구 궤도를 요구하는 반면 셀룰러 네트워크는 기지국의 촘촘한 설치를 요구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독립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사유지점이 되어줄 것이다. 전자는 독립이라는 말이 세계의 ‘바깥’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후자는 독립이라는 말이 ‘독립’된 개체가 어떻게 세계 내에서 하나의 ‘독립’된 객체가 될 수 있는지를 가리킨다. 


독립이라는 표현이 특정성을 갖는다면, 그에 대한 근거는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있다. 독립은 무언가에서 떨어져나옴으로써 성립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소속됨으로써 오히려 성립한다. 독립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단일한 지구돔이라는 점, 즉 ‘생태계’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립의 풀이말이 홀로서기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자신을 세계와 분간하려면 우리 자신을 특정하는 값으로의 좌표값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에 있음을 뽐낸다고 해서 그게 어디인지를 지리적으로 특정할 수 없고, 자기를 노출하려면 이곳에 바깥이 없거나 또는 사람들 사이의 얽힘 상태에 있다는 사실, 적어도 이 둘 중 하나는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독립이라는 말은 어딘가에 대항하기보다는 “주류에 대항하는 법은 이쪽도 영역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말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홀로서기라는 말은 혼자가 되는 게 아니라 인프라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하나의 인프라로 구축하는 것, 어떠한 곳에 소속되기보다 자신이 바로 어떠한 소속이 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떨어져나오는 일은 반대로 그 어딘가에 자신을 종속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전부를 ‘어딘가’로 바쳐버리고야 만다. 따라서 그 어딘가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과 얽힐 뿐 자체적으로 자신을 특정할 만한 반향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독립이라는 말은 자기가 이 세계에 괴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하나의 SAS로 기능한다. ‘홀로’라는 말은 혼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일을 가리킨다.


다른 것들 안에서 자기를 찾기보다는 다른 것들 사이에 포섭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할 때 홀로서기는 비로소 성립한다. 그런데 한국의 독립영화에서 사람들이 중점을 두는 건 ‘~에서의 독립’, 즉 독립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떠한 것에서 분리되어 나옴’ 정도로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독립영화는 흔히 ‘어디를 거점 삼아 자신을 설명할 것인지’가 중점이 되곤 했는데, 이를 따라 도출되는 질문은 대개 이렇다. “대체 지금의 독립영화는 어디에서 독립하고 있는가”라는 것. 이는 실제로 한국에서 독립영화라는 단어가 본격화되었던 시기와 관련 있지만, 용어의 발단과 전개는 시대에 따라 자신을 설명하는 법을 다르게 하기 마련이다. 그땐 그런 의미였다면, 지금의 독립영화는 관객들 모두가 개인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개인’이라는 말을 ‘공통’의 관심사로 끌어들이는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 같다. 영화 문화에서 “그래서 지금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때 관객의 위치를 특정짓는 것은 그 지위와 역할이 아닌 도달하는 영역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떠한 축제나 서비스를 기획할 때는 예상 수요층을 상정해야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게 없다면 기획과 현장은 괴리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이라는 존재는 객체로서 세계에 실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어쩌면 관객이란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거나 개념인 건 아닐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의 이미지』에서 민중에 대한 서술을 ‘노출’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민중들의 이미지가 과다 노출되어 스펙터클 안에 잠식되고 있다고 진단하는 그는 “아마도 미래의 역사가들은 현대의 민중이라는 동일한 이미지에서 과잉 노출과 결핍 노출이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사태에 놀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pp.18-19.) 그는 이어서 “영화가 이름 없는 자, 통상적인 사회적 재현에서 몫이 없는 자에게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얼굴을 되돌려줄 때에만 정치적인 올바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자.”고 말한다. “민중의 이미지라는 상투어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이미지로 공통의 장소를 만드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그에게 ‘노출’이라는 단어는 민중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형상화하는 이미지다.(pp.200-201.)  특히 위베르만의 이 관점은 그가 반딧불의 잔존을 말하는 대목에서 맥락화된 ‘형상’에 관해, ‘잔존’은 하나의 단절이나 특수가 아니며 어떠한 관점으로서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관객’은 영화의 반대편에서 관찰자로의 지위를 갖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관찰자로서의 관객을 가정한다면 영화가 없을 때 관객 또한 없거나, 혹은 영화가 있는데 왜 관객은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독립’이라는 말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에 제공됨으로써 정작 영화 자체에 관해서는 객체로서의 서술이 불가해진다. 


우리는 독립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밀어내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 질문은 마치 “그게 있으니까 우리가 있을 수 있다”라는 뜻처럼 들린다. 정확하게는, 독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키기가 어려운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어떠한 사건이나 실체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투영한다는 점에서 특정성을 잃으며, 특정한 지리적 위치를 특정 받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외부와 격리된다. 기실 독립이라는 말을 풀어쓰면 홀로서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의미는 자신이 세대주가 되는 1인 가구의 형태에 더 가깝다.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독립해 나왔다고 한들 고립된 건 아니라는 소리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검색 서비스가 영화를 두고서 최대한 많은 태그를 제공하려 하듯, 데이터 네트워크에서 대상을 표면에 노출하는 일은 특정한 제목을 검색하는 게 아니라 어느 하나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사실 덕분에 가능하다. 마치 셀룰러 네트워크처럼, 이들 구조는 다양한 것들 사이에서 익명성을 잃어버리는 일을 응용한다. ‘노출’은 탈은폐의 맥락에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이 하나둘 덧붙여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특정하는 과정을 뜻하며, 독립영화는 어딘가에서 홀로 서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것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되려 자신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혼자’가 되는 것뿐이다.  GPS는 개인을 특정하는 방식이지만 반대로 그게 개개인을 세계에서 독립시키는 것은 아니며 단지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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