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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4. 2024

'물'의 '길'의 관점으로 생각한 <듄>의 메시아


<듄: 파트2>를 보며 귀에 익었던 말 중에 하나는 ‘선지자’였다. 영화의 중반에 프레멘 집단의 의례를 수행하는 폴은 자신이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든든한 동료였던 스틸가는 어느새 ‘리산 알 가입’을 외쳐대는 광신도로 변해있고 폴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프레멘 집단으로 이끌었던 동료이자 유일한 이해자기도 했던 스틸가가 자기를 ‘외계’의 존재로 밀어낼 때 폴은 고독해진다. 그러니까, 이 모습은 마치 폴이 다른 이들에게 ‘거리를 두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을 숭배하는 방식에서는 신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 과정을 승천으로 묘사하지만, 이러한 부활은 죽음을 조건 삼아 발동하므로 폴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죽음과의 합일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폴은 프레멘 집단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이들 집단의 내부로 결속되는 듯 보이지만, 폴의 자리는 오랜 세월 전해져왔던 프레멘 집단에서의 예언을 따른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외부인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폴은 프레멘 집단에 동화된 게 아니라 진출했을 뿐이고, 폴 자신이 프레멘 소속으로 성질이 변화한 게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뿐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폴의 성장담이 아니다. 폴은 그저 자신이 갖고 있던 걸 풀어놓은 것일 뿐 자기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그 자신이 처음부터 선택되어 예지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조금은 더 무기력한 쪽에 가깝다. 


 구원을 위해 지정된 예비의 장소, 폐허의 속성이 만약 그렇다고 하면 외계에서 온 선지자인 폴 또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폴의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베네 게세리트는 언젠가 등장할 퀴사츠 해더락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프레멘 사이에 신화를 퍼뜨려왔다. 신화는 폴의 등장을 마치 오래전부터 비롯되어온 것처럼 여기게끔 하면서, 그를 프레멘 집단이 신화를 응응하는 방식에 올라타게끔 내버려둔다. 즉 프레멘 집단 내부에 결속되기보다는, 그러한 내부가 다시금 외부로 순환하는 방식에서 폐허의 바깥을 내부로 수용하는 방법론을 찾아냈을 것이다. 가령 사막의 중심부에 선 폴의 모습은 오랜 역사를 한 생물의 개인사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사막의 모래언덕 위를 오르고 나면, 신체의 경계는 빛과 그림자의 사이를 가로질러 오래된 역사의 한복판에 선다. 폴이 프레멘 사이에서 외계의 구원자로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과정은, 정해진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기보다 성장하지 않도록 설계된 영원한 유년기를 대신해 세계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폴의 신체가 항구적인 메시아의 이미지로만 남아야 한다면, 여기서 부재하는 인간의 성질은 땀을 흘리거나 소변을 배출하는 등의 현상 모두가 사막의 은총에 비견되는 프레멘의 생존 방식에서 발견된다. 신체를 경계 삼아 외부와 내부가 나뉜다면 이 장면은 그동안 행성의 테라포밍을 위해 물을 모아오던 프레멘의 염원이 메시아에게로 이어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듄>에서 프레멘에 관한 묘사는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지만 물에 대한 묘사는 생각해 볼거리가 있다. 가령 물은 행성 전체에 순환한다는 점에서 작중 세계 전부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데, 이런 점은 어디를 가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폴의 처지를 연상케 한다. 운명의 노예가 된 폴에게 이제 선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 전부를 짊어지는 것과도 같다. 챠니와 폴이 물을 두고 나누는 대화 하나를 떠올려보자. 폴은 자신의 행성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물에 빠져 수영하기를 좋아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레멘 태생의 챠니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체 ‘헤엄친다’라는 개념을 반문하는데, ‘물’이 예언의 한 성질을 띤다고 가정하면 어려서부터 예언들에 둘러싸였던 폴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된다. 운명이 메마른 행성 아라카스, 서로와 ‘물’을 교환하는 일이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된다는 프레멘 사회의 관습은 두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운명적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경우 애정표현은 체액의 교환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접촉은 인식의 한 체계를 버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지자가 되는 폴의 모습을 서사적으로 예견한다. “모든 물은 흘러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프레멘의 관습은 신체의 경계를 해체하고 하나 되는 일을 묘사하는데, 이는 행성과 운명을 함께 하는 프레멘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행성의 영화로 분류되는 <듄>에 관해서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서로를 향한 성애는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어 상대방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진솔하지만, 반대로 최전선에 서기에 가장 전투적이면서 상처를 주고받기 쉬운 위치이기도 하다. 신체는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가 일어나는 경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는 폴이 챠니와의 가벼운 신체접촉을 진행하는 과정을 하나의 신호로 사용한다. 상대방에 진심이 되는 게 연애라면, 연애는 신체의 최전선에 선다는 점에서 세계의 파국이 가리키는 지점과 유사하다는 점이 그렇다. 영화에서 폴이 챠니를 마주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맞닥뜨린 운명을 피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지도자가 되는 순간이다. 경계에 선다는 건 신체를 마주하는 일과도 같으며, 신체는 인식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세계의 최전선에 선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 대한 인식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빠져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신체가 개인과 세계의 사이를 이루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막의 언덕 위에 오른 폴의 모습은, 앞으로 인류의 온 미래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 서사의 예고이기도 하지만 사막의 물이 하나의 신체에 집결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상대로 한 체액교환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라카스에서 폴의 자리는 내부의 외부인 ‘폐허’였고 그래서인지 폴의 모습은 아라카스의 테라포밍을 위해 마련된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즉, ‘구원’의 속성은 오아시스가 갖는 도래의 상징성에 결합하는 것 같다. 


프레멘 거주지의 지하에 자리한 오아시스는 테라포밍을 위해 마련된 물 저장고다. 원칙적으로 이 오아시스는 테라포밍된 이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아라카스의 현재와는 분리돼있고, 오래된 폐허처럼 느껴지게 하는 유적풍의 분위기는 이곳을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른바 폐허, 모든 시간이 한데 모이는 이곳은 아라카스의 모든 관계를 초월해있다. 모든 죽은 이의 체액을 흘려보내는 저수지에서는 모래벌레가 익사할 때 내뿜는 체액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체액을 추출해 물로써 흘려보내면 선대의 기억을 마주할 수 있다는 하나의 신화적인 관습이 있다. 그래서 프레멘은 이를 신성한 물로 취급하며, 자기들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의 물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일은 이 행성에 모든 과거를 흩뿌리겠다는 뜻처럼 보이는 면이 있고, 무앗딥으로 받아들여진 폴이 저수지 주변을 거닐 때 그는 모래사막의 ‘바깥’이면서 이러한 바깥을 내부로 끌어들일 것이 예비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자체로 영토이자 구획이기도 한 신체, 세계의 한 체계를 대변하는 퀴사츠 해더락은 모계와 부계 양가 모두의 기억을 하나로 교차하면서 그 자신을 세계의 에러값으로 출력한다. 이른바 알고리즘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를 특정하는 것, 폐허는 기본적으로 미래의 기억이 현재에 섞여 들어온 곳이라는 점에서 항상 현재를 초과해있고 그런 점에서 이곳의 과거는 과대대표된다. 


<듄>의 파국은 처음에 행성 단위에서 출발하지만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모든 인식을 세계에 흩뿌린다. 이 폐허에서는 미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과거를 끌어오려는 운동성에 비견되기에 이 둘 사이에는 모종의 얽힘이 존재한다. 파국의 감각은 폴의 육신을 통해 아라카스에 뿌리내리고, 사막에 맞닿은 발은 개인의 서사를 세계에 뿌리내리게끔 하면서 파국의 정동을 내부로 환원한다. 이는 사막이 내면과 맞바뀔 때 세계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귀추를 주목할 만하다. 만약 오류를 의도할 수 있다면 이런 오류는 계산 안에 있다는 점에서 체계의 바깥으로서 사유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폴이 퀴사츠 해더락이 되었을 때, 그를 프레멘 집단에 결속하는 방식으로써 신화가 사용되었다. 이런 폐허에서 정작 소외된 건 과거에 대한 망설임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닌, 지나가는 현재의 발걸음이다. ‘에러’ 값을 출력하는 것,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이 길에서는 자기를 구분 짓는 유일한 것으로써 신체의 역할이 부각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외계라는 표현은 이 우주에 우리만이 살아있는 생명체인 게 아님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고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행성 단위로 결속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이다. 즉, 퀴사츠 해더락은 세계의 신체를 가지고서 작업하는 신체의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외계라는 말은 미지와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므로, 그런 점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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